765화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탈진한 세라가 도로 끌려 나간 뒤, 유더는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지만 어쩐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쿠르가와 예르긴의 눈치가 수상쩍었다.
‘역시 겁먹었나.’
이전 생에도 유더가 제대로 마음먹고 심문하는 모습을 본 이들은 겁을 먹고 꺼리며 멀어지고는 했다. 그래봤자 대부분은 유더가 까라면 까야 하는 마병단 소속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런 반응에 신경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카치안 황제가 유더의 심문을 구경하고서 다른 반응을 보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결과적으로는 ‘고문으로 끝날 일을 쓸데없이 길게 끌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평으로 끝이 났다.
유더는 쿠르가와 예르긴이 자신을 꺼리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조사할 이가 키시아르를 공격한 자라면 유더는 지금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시아르 본인은 아무 분노가 없어 보이지만 유더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키시아르가 공격당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려앉았던 가슴을 잊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의 마병단원들도 조사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현자의 세뇌에 걸려 있는 데다 수적으로 다수인 이들에게 마음속 깊이 공포를 끌어내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상대를 공격했다면 자신도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유더는 그들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그 대가가 무엇이 될지를 그들에게 잘, 아주 잘 알려 줄 셈이었다.
당사자가 함께 있지 않아서 이것만은 다행이었다.
“저… 유더.”
그때, 예르긴이 멀찍이서 그를 불렀다. 상념을 지우고 고개를 들자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서 말인데…….”
“…….”
“세라에게 나그란의 별과 관련된 다른 정보는 들을 필요가 없는 거야? 현자라는 자가 사주했을 거라고 추측했으니 당연히 그걸 제일 먼저 물을 줄 알았는데 남국인들과 관련된 것만 물어보니까 궁금해서.”
유더를 겁내어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게 아니었던가?
차갑게 식어 있던 마음에 일순 당혹감이 작게 자랐다. 유더는 그녀의 진의를 살피듯 가만히 바라보다 대답해 주었다.
“…나머지는 지금 당장 묻지 않아도 이미 단장님과 내가 알고 있거나, 혹은 알아낼 방법을 알고 있는 것들이야. 하지만 남국인들의 의향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부분이지.”
때문에 그 부분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었다고 답하자 예르긴이 알아들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들었지, 쿠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였다고 하잖아.”
“으음…….”
조금 떨어져 있던 쿠르가가 머리를 긁적대며 침음을 흘렸다. 그는 평소에도 과묵한 편이어서 저 태도만으로는 겁을 먹은 건지, 아닌지 파악할 수 없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응. 그런데?”
“…….”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가? 약간의 혼란이 들었으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할 말이 없다. 유더는 더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고갯짓으로 그녀에게 물러나라는 뜻을 전했다.
“알겠어. 다음 조사 대상 들어오라고 전해.”
이후에도 유더는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했다.
나그란의 별 중부 거점의 책임자는 유더의 앞에서 제법 강한 척을 하며 그를 냅다 공격하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압도적인 체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마병단원으로 잠입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으나, 자신이 몸담은 단체에 대한 정보와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마주한 헤른 가의 기사 라델은 자신이 왜 여기서 조사를 받아야 하느냐며 시작부터 난동을 피웠다. 썩어도 기사라고 힘은 아주 센데 각성자가 아니라 제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유더 이전에 그자를 조사했던 마병단원들과 다른 이들이 고생했을 만도 했다.
유더는 그가 부리는 난동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켜본 다음, 그가 내던진 의자가 자신의 머리칼을 스치자마자 일어나 그자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붙잡고 책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머리카락 하나가 스쳤어도 먼저 맞은 셈 칠 수 있으니 분명한 정당방위였다.
라델은 책상에 시뻘겋게 변한 얼굴을 비비며 마이라 1공녀가 전해 달라고 했던 해고 소식을 몸소 들어야 했다.
“마이라 1공녀와 헤른 공작은 당신이 가문 내의 배신자란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 콘체 남작 측도 이미 헤른 가 내부에서 대부분 조사를 끝냈다더군. 당신은 이제 헤른 가 소속 기사가 아니고, 당신을 위해 와 줄 사람 또한 없어. 여기서 나가 제대로 조사받고 싶다고? 헤른 가와 우리 중 어느 쪽 조사가 더 살아남기 좋을지 재 보는 것도 괜찮겠지.”
라델은 거짓말이라 외쳤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 말이 진짜라면 여기서 나가는 게 오히려 손해임을 그도 알았을 터였다.
유더는 그가 사과할 때까지 그자의 뒤통수를 짓누른 손에서 결코 힘을 떼지 않고 계속 심문을 진행했다. 결국 라델은 굴욕과 공포에 떨며 유더와 다른 마병단원들에게 사과한 뒤 더듬거리며 제대로 된 정보를 토해 냈다.
그는 1년 전 콘체 남작에게서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헤른 공작으로 올릴 수 있으니 손을 잡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깊이 손을 잡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콘체 남작의 소개로 만난 남국인 상단에 투자한 일들이 지나치게 잘되다 보니 어느새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헤른 가에는 라델 외에도 그처럼 매수당한 이들이 역시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터였다. 유더는 그에게 다른 배신자들의 이름을 불 때마다 마이라가 그의 목숨을 살려 줄 확률이 더 높아질 것임을 알려 준 뒤 심문을 끝냈다.
“다음은… 이제 없군.”
“응. 아까 그 사람으로 끝이야.”
라델을 끝으로 유더가 진행할 심문은 모두 끝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고 막 당기려 했을 때, 등 뒤에서 예르긴이 그를 불렀다.
“유더. 난 마병단엔 너 같은 사람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악마 같은 훈련법을 만드는 데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무섭고 단호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란 점을 말하는 거야.”
“…….”
유더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말뜻을 못 알아들어서라 여겼는지, 예르긴이 주저하다 조금 더 설명을 보탰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난 우리 단장님을 공격한 놈들에겐 꼬박꼬박 밥 주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하거든? 아까 그 기사처럼 뭣도 없으면서 대단한 척하는 범죄자들도 마찬가지고. 단장님과 마병단을 욕보이려 한 놈들에게 확실하게 죗값을 알려 주는 게 뭐가 나쁘냐 이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평소보다 강하게 나간 거겠지.”
키시아르를 순수하게 존경할 뿐인 그녀와 유더의 마음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들의 단장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몹시 깊은 유감을 품고 있었던 것만은 똑같았던 듯했다.
유더가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자 예르긴이 거 보라는 듯한 얼굴로 입술 끝을 비뚜름히 올려 심술궂게 웃었다.
“뭐… 우리랑 달리 충성심이 부족한 쿠르가는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네 덕에 많은 놈들이 제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드디어 제대로 깨달은 것 같아서 나는 좋았어. 그냥 그렇다고.”
“…내가 언제?”
쿠르가가 곰 같은 얼굴에 억울한 기색을 담아 중얼거렸다.
“난 그저, 유더 같은 그런 조사 방식은 처음 봐서 조금… 긴장했던 것뿐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똑같으니 오해를 살 말은 하지 마.”
“흠, 그래. 그렇다고 치자!”
“예르긴…….”
“아무튼, 그래. 그러니까 우리 눈치 볼 필요 없어. 여태까지 한 대로 마병단의 성질답게 행동해.”
“마병단의 성질이 아니라 정신.”
쿠르가가 뒤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안타깝게 외쳤다. 예르긴이 뻔뻔한 얼굴로 바로 수정했다.
“그래, 정신. 그런데 성질도 맞지 않아?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괜찮지?”
성질이든, 정신이든 아무려면 어떤가. 예르긴의 말대로 유더는 자신을 누가 뭐라고 부르든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 들어찬 건 자신을 보고 있는 예르긴과 쿠르가의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세라를 조사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장하여 두려워하는 중이라 여겼던 게 거짓말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이 무서워한다고 여겼던 건 이전 생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조사 중이었던 유더의 착각이었을까?
유더는 가볍게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병단엔 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라. 이전 생에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평이라 기분이 아주 묘했다.
유더는 그 이상한 기분을 가슴에 담은 채 문고리를 당겼다. 그리고 바로 앞에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장신의 그림자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키시아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단장님.”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거기에 서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당혹감이 앞섰다.
‘아까 그 말, 들었나? 아니면 심문할 때부터……?’
“내 쪽이 좀 더 빨리 끝나서 데리러 갈까 싶어 왔지.”
“어, 어어. 단장님? 언제 오셨어요?”
막 유더의 뒤를 따라 나오려다 키시아르를 발견하고 당황하는 예르긴과 쿠르가를 향해 미소를 지은 사내가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방금 왔네. 열심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마무리하는 대로 올라가서 쉬게. 나는 보좌와 함께 먼저 올라가지.”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린 갈까.”
키시아르가 유더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떼었다. 맨손이 전해 준 찰나의 온기를 느끼며 유더는 그를 따라 잠자코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타인의 기척이 사라졌음을 확신했을 때 입을 열었다.
“…아톤의 심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 끝났지.”
키시아르가 평온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