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4화
“나 또한 그리할 생각이었지.”
키시아르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톤이라는 자의 조사는 일단 나 홀로 먼저 진행해도 되겠나?”
유더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다. 이성은 키시아르가 홀로 조사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으리라고 냉철히 판단하였으나, 사람의 마음이 꼭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왜입니까? 혹시 제가 전에…….”
“그자를 상대로 지나치게 힘을 쓴 일 때문에 우려하여 그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거라면, 아니야.”
말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유더의 불안을 원천 차단 했다.
“나단을 뒤에 세워 둘 테니 내 안전은 걱정 말고, 그동안 다른 이들의 조사를 맡아 주게.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두 사람이서 나누어 해야 그나마 낫지 않겠나?”
논리적이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키시아르는 조사가 끝나는 대로 서로 알아낸 사항을 바로 공유하자고 말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소라면 이런 사항에 일일이 신경이 곤두서진 않는다. 그들이 필요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방금 키시아르가 저를 떼어 놓는 듯 느껴지자마자 날카로운 불안감이 치민 건 어째서인가. 역시 아까 예르긴의 말을 듣고 또다시 떠올렸던 하얀 장갑의 여파 때문일까.
지금의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 확실한 꿈이다. 원인을 모를 뿐, 일상생활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었다. 식사를 남긴 일도 이후로는 없었고 잠도 모자라지 않게 잘 잤다.
그런데도 어쩐지 문득 아까처럼 그 하얀 가죽의 감촉이 피부 위를 쓰다듬는 듯한 기분이 아주 짧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유더의 머릿속은 단두대 앞에 무릎을 꿇었던 그때처럼 어둡게 가라앉고는 했다.
‘머리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의식은 다르단 건가.’
사실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도 키시아르에게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여태 그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서야 키시아르에게도 티가 날 테다. 유더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몸을 돌렸다.
‘…이논이 오면 역시 그 꿈에 대해서도 한번 물어봐야겠어.’
***
유더는 쿠르가와 예르긴을 데리고서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의 조사를 위해 지하로 향했다. 그가 조사하기 위해 제일 먼저 지목한 이는 당연히도 남부 거점의 책임자인 세라였다.
‘이전에 나그란의 별에 있었던 합격자들이 한목소리로 이 사람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을 거라 지목했지. 정황상 내 생각도 그렇고.’
하지만 그녀를 지목한 데에는 그런 중요성 외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조사를 위해 임시로 마련한 빈방에 놓은 책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세라가 쿠르가와 예르긴의 손에 이끌려 왔다. 그간 부상 치료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텐데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상당히 거칠해진 얼굴이었다.
유더는 그녀가 맞은편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켰다. ‘유더 아일’이 자신을 조사한다는 사실에 초조하게 겁에 질려 있던 세라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죽일 테면 빨리 죽여!”
‘예상한 반응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군.’
세라의 죄는 명백했다. 누가 시켰든, 키시아르를 공격한 이상 황족을 해하려 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이 예상치 못한 침묵이 더욱 두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유더가 바란 바였다.
그는 주먹을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채 저를 노려보는 세라를 향해 드디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본인이 죽어야 할 만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긴 했나 보지.”
느리고 차가운, 얼핏 들으면 평소의 그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들은 이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세라는 얼음이라도 닿은 것처럼 어깨를 떨었고, 그녀를 감시하듯 조금 뒤쪽에 서 있던 쿠르가외 예르긴의 입가에도 일순 긴장이 어렸다.
지독하게 춥고 무서웠다. 순수한 공포가 공간을 잠식했다.
이 지하층 전체에 뢰네브의 무효화 능력이 펼쳐져 있으니 힘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감정을 완벽하게 지워 버린 목소리와 끝을 알 수 없이 새카맣게 가라앉아 아군조차 낯설게 만드는 눈동자는 타인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것이 바로 이전 생의 마병단장, 유드레인 아일이 죄인을 심문할 때 사용했던 방식이었다.
“너는 다수의 동료를 선동해 마병단장이 향하는 길목을 미리 지키고 있다 급습을 시전했다. 정체를 들키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 저지른 일이었겠지.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마병단과 제국군을 공격했고, 그 결과 여기에 있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 힘들게 만드는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러니 우선 황족 시해 미수죄. 공무 집행 방해죄. 이상한 균열을 불러내어 몬스터를 발생하게 만든 수상한 남국인들과 협력했으니 제국민 전체를 위협하고 해치려 한 죄. 즉 국가 전체를 배반한 반역죄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거기에 폭행, 상해, 도주, 모욕…….”
하나하나 나열할 때마다 검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 끝이 책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의미 없어 보이는 그 행동에도 세라는 심장이 조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서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말해 봐.”
세라는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내…….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야. 그건, 나도, 속았을 뿐……!”
“속았다. 누구에게?”
“남국인. 그 남국인들이, 나를, 우리를 속였어. 전부 그들 때문이야. 우, 우리는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는 줄도 몰랐어. 그냥, 공격했다가 물러나면 된다고… 그래서…….”
아니다. 그녀는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병단장을 위협하여 마병단에 타격을 주고, 그리하여 현자를 돕고 같은 목적을 지닌 남국인 상인들과 상부상조하기를 바랐던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그 빌어먹을 남국인들은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횡설수설하며 모든 죄를 남국인들에게 뒤집어씌우던 그녀는 문득 저를 응시하는 무저갱 같은 눈과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건 그녀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 거짓말은 처음부터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그저 무어라 하는지 반응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설마, 이미 전부 알고 있었던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저 눈을 본 순간 그게 맞다는 확신과 두려움이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언제든 파도처럼 일어나 뒤덮을 것만 같은 그 무서운 기운 앞에서 그녀는 마침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침묵 속에서 유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계속 말해 봐.”
“…….”
“더이상 말할 것이 없나?”
“…….”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거짓말은 한 번 들어 주었으면 되었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내 눈을 보고 똑바로 이야기해.”
“시… 싫어. 풀어 줘. 풀어 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테니까!”
세라가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뢰네브의 힘 덕에 애써 구속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의 팔다리는 묶여 있지 않은 상태였다. 쿠르가와 예르긴이 그녀를 뒤쫓아 잡으려 했으나 유더는 눈짓으로 그들을 막았다.
“내보내 줘! 살려 줘!”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극도로 겁에 질려 잠긴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뒤로 유더가 다가섰다. 느린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세라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세라는 저도 모르게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채 애원했다.
“제, 제발……. 나도 피해자란 건 정말이야……! 제발……! 나는 그저 남국인들을 믿었을 뿐이야. 우리는 전부 갈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그냥 살고 싶어서…….”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불쌍한 모습을 드러내어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더는 그녀가 아무리 불쌍한 사연을 끄집어내고 울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는 세라가 울다 지쳐 겨우 고개를 들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 딱 한 마디만을 던졌다.
“그래서, 그게 끝인가?”
“…….”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뿐이다. 남국인들이 네게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랐는지. 그것 외엔 없어.”
세라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삼킬 듯한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 왜 여태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를 만큼 짙은 살기가 강물처럼 아른거렸다.
그는 세라를 동정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아무리 애원하고 수를 써 보려 노력해 보았자 저 남자에게는 단 하나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진술을 거부한다면, 그다음은…….
“…….”
세라는 뒤통수가 쭈뼛 서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여기서 나간다 해도 저 살기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생명이 지닌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다.
세라는 결국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만, 말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겁니까.”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 세라의 입에서 천천히 제대로 된 진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유더가 받아 낸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