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화
“아까 예르긴 쉴러와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방문한 손님들과 남국인들 소식 외에 또 뭔가 있었나?”
일거리 한 묶음을 사람들에게 쥐어 보내고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전의 찰나, 키시아르가 서류를 살피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마병단은 힘을 좀 쓰면 그래도 사람들이 움찔하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왜 소드 마스터나 되는 단장님께서는 신검의 주인이기까지 하신데 이토록 모른 척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이런, 그래서 보좌는 뭐라고 답해 주었지?”
“단장님께서 말씀하셨듯, 언젠가는 전부 알게 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차피 다른 이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저희가 가진 진짜가 가짜로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키시아르의 입꼬리가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렇지.”
“…….”
“그래도 단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단장으로서 좀 미안하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예정하신 대로 전부 잘 가고 있지 않습니까.”
키시아르는 이번에도 그렇다고 말하는 대신, 그 말을 하는 유더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 듯 하다가 도로 입술을 다물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던 손님들이 들어섰다.
샬로인의 7급 관리, 사파이어 마법사 연합의 대표, 그리고 샬로인 상인 연합 소속의 상단 상인. 예르긴이 말했던 예전의 지부 앞 시위자들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펠레타 공작 전하……. 이전에는 감히 전하가 오신 줄 몰라뵙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세 사람은 이전에 보았던 건방지고 오만한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조심스럽게 어깨를 움츠린 상태였다. 이마나 옷 곳곳에 식은땀이 보이긴 해도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모습은 아니란 점에서 예르긴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키시아르는 그들의 겁먹은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실례랄 것까지야. 그때는 나도 정체를 바로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내심 안타까웠는데, 이리 자네들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니 아주 기쁘군.”
“아……. 예. 저희도… 그렇습니…다.”
서약으로 묶어 놓고 기쁘기는 무슨. 관리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긴 채 대표로 대답했다. 키시아르는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인사는 이쯤에서 자르도록 하고, 내가 자네들을 불러들인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 어느 정도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 이번에 마병단이 했다는 일들… 때문이 아닌지요?”
“그래. 우리가 몬스터를 제법 많이 잡았는데, 이곳에 있는 인원만으로는 뒤처리가 번거로워 도움이 필요하거든. 들어 보면 자네들에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처음엔 의심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은 키시아르가 꺼낸 몬스터 사체의 처리 및 해결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표정이 바뀌었다. 이전의 강렬한 만남과 경험 덕에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손해 보는 요청을 억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게 될 줄 알았는데, 마병단에서 내민 거래는 생각 외로 상식적이고 쌍방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었다.
‘어차피 샬로인에서 일어난 일이니 누군가는 처리해야 할 일이야. 그걸 우리 쪽에서 맡는다면 마병단을 비롯한 황제 폐하 측 요인들과 선을 댈 수 있겠지. 윗선께서도 언제까지고 헤른 공작과 사콥 남작의 눈치만 볼 수는 없다고 하셨으니 지금이 견제를 위한 최적의 기회일 수도 있다.’
관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앉아 있는 마법사 또한 머리를 열심히 굴려 이해득실을 따졌다.
‘이번에 보여 준 마병단의 힘, 그리고 새로운 신검의 주인이 확실하다는 펠레타 공작 전하의 무력. 그게 진짜라면 이럴 때 연을 대어 두어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도 이미 헤른 가의 1공녀를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 마병단과 협력 중이라니 어쩌면 우리도 제 2의 서부 마법사 연합이 되어 명성을 얻을 수 있을지도…….’
상인 또한 표정이 몹시 밝았다.
‘이건 무조건 되는 장사다. 우리가 몬스터 부산물 전문 상단은 아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부산물이라면 다른 곳에 유통만 해도 엄청난 돈이 돼! 설령 마병단과 황제 폐하의 세력이 도로 주저앉더라도 우린 샬로인의 위기를 돕기 위해 참여했단 명목뿐이니 손해 볼 일도 없겠지.’
이 일을 돕는다고 곧장 마병단과 손을 맞잡는 세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돕는다는 명목하에 적당히 체면을 차리고 이득도 제법 챙길 수 있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그들은 오기 전 했던 걱정과 달리 몹시 기분 좋은 얼굴로 마병단 측의 제안을 수락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 잠깐. 가기 전에 사파이어 연합의 마법사만 좀 남아 주지 않겠나?”
“예? 저는 또 왜……?”
가려다 말고 갑자기 잡힌 마법사가 눈을 깜박이며 불안 반, 의문 반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은근슬쩍 흘긋거렸다. 키시아르는 그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린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일 말고도 마법사들에게 요청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어서 말이네.”
“저희에게… 말씀이십니까?”
“정확한 사항은 내 보좌에게 듣게. 사실 이건 그의 요청에 따른 일이거든.”
“보좌라면…….”
“접니다.”
아악! 역시나! 마법사는 아까부터 우연으로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껏 노력했던 유더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비록 이제는 샬로인을 위해 어느 정도 한배를 타게 되었다지만, 유더 아일이 발휘했던 능력은 아직도 마법사의 꿈에 악몽이 되어 종종 나타나고는 했다.
첫 만남 이후의 소문을 통해 유더가 얼마나 괴물 같은 일들을 해치우고 다녔는지 알고 나서는 더 그랬다.
다른 각성자들도 꺼려지고 무섭기는 마찬가지지만 그중에서도 괴물 같기로는 따라갈 자가 없을 저자가 자신을 만나려 했다는 사실에 갑자기 오금이 저리고 뭔가 잘못한 일이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유더는 순식간에 불안에 사로잡힌 마법사의 표정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알아차렸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 사파이어 연합에 계신 분들만으로 특정 지역의 마력 흐름 변화 상황을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특…정 지역의 마력 흐름 말입니까……? 그게 왜 필요하신 것인지 물어도 되겠소?”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와 관련이 있는 사항이라 생각되어서입니다.”
“이번의 몬스터와 마력 흐름이 말이오?”
마법사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더는 그가 뭔가 더 묻기 전에 단호하게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가능하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까.”
“아, 그……. 우리 연합은 그런 일을 중점적으로 하진 않지만, 필요한 마도구가 있다면야 가능하긴 할 것 같소.”
특정 지역의 마력 흐름을 살피는 일은 주로 연구나 수련을 중점적으로 하는 마법사들이 했다. 사파이어 마법사 연합은 실력이 미진한 이들이 모여 돈을 벌기 좋은 마도구나 만드는 곳이었기에 그런 일과는 거리가 꽤 멀었으나, 그렇다고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려운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한 일이며, 필요한 도구만 갖춘다면야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시아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키시아르가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것처럼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괜찮겠군. 바로 작업에 착수해 주었으면 좋겠네.”
“아, 알겠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들이 발생한 지역을 중점으로 살피면 되는 것인지요?”
“그래. 바로 이 마병단 남부 지부 건물 주변이지. 필요한 마도구와 비용은 이쪽에서 부담할 테니 편히 청구하도록 하게. 잘 해낸다면 샬로인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없긴 했지만 뭐, 이것도 샬로인을 위해서라니 못 할 건 아니었다. 마법사는 돌아가는 즉시 연합의 마법사들을 데려와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말과 함께 물러갔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 키시아르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력의 흐름을 살피는 일에 마도구까지 필요하다니. 마법사로서는 영 실격이겠어.”
“대단한 걸 바란 건 아니니 저들이 일만 제대로 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유더가 마법사들을 불러 몬스터들이 나타난 지역 주변의 마력 분포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어제였다. 간만에 이논에게서 직통으로 날아든 편지 속에 적힌 온갖 분노의 호통을 읽다 보니 그가 번역 중이었을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 일지 속 숨겨진 페이지 생각이 났다.
이곳에 오기 전 그 내용을 결국 다 보지 못하고 왔었는데, 이번에 올 때 가져와 달라는 답을 써야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그쪽 일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일지 속 내용과 더불어 루마의 연구와 관련된 사건들이 쭉 떠오르면서 어떤 사항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이논은 일지를 쓴 초대 타인 공작이 몬스터가 자주 발생한 곳에서는 마력의 흐름이 대개 어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렇다면 만약 일부러 특정 공간의 마력만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적었다고 했지. 그게 사라인 대삼림 내의 마력을 일그러뜨려 오랫동안 고이게 만든 현상과 발상이 비슷하지 않냐고도.’
일그러진 채 오랫동안 고인 마력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생장을 거듭한 대삼림. 그 속에서 특히 자주 나타난 몬스터들과, 목격된 이상 균열.
그리고 바로 이번에 재차 목격한 새로운 이상 균열과 그것을 불러내었다고 의심받는 남국인 상인들.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마력의 매개체.
몬스터가 인위적인 힘에 의해 나타났다는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유더는 마력의 흐름을 조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키시아르 또한 거기에 동의했다.
“마법사들이 어떤 결과를 찾아내든, 일단 남국인 상인들에게는 그 추측이 사실이라는 걸 기반에 두고 조사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나 또한 그리할 생각이었지.”
키시아르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톤이라는 자의 조사는 일단 나 홀로 먼저 진행해도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