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62화 (762/805)

762화

이후로도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밤이 되어 키시아르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 긴장감이 감돌았으나, 정작 유더를 제 곁에서 자도록 만든 사내 본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기만 했다.

“피곤한 하루였지.”

“네.”

“그러면 우선 쉴까?”

“…….”

그는 유더가 아직 꿈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고 그저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유더의 마음은 조금씩 고요해졌다. 그는 앞에서 마병단원들에게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날 너무 많은 전투를 치렀던 데다 키시아르가 다쳤을까 싶어 놀랐던 마음이 영향을 미쳐 그런 꿈을 꾸었던 거겠지.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뒤숭숭한 걸 계속 보지 않아 다행이군.’

“유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남부 지부의 단원 중 한 사람인 예르긴 쉴러였다. 이번에 크게 일어났던 전투에서 유더를 보조하는 일을 맡았던 뒤로 어쩐지 전보다 더욱 친밀함을 내보이기 시작한 그녀가 드물게도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바깥에 익숙한 얼굴들이 와 있다 싶었는데 전에 우리 지부 앞에서 시위하던 사람들이 또 왔더라? 이번엔 여기서 불러서 왔다고 그러는데, 진짜야?”

“맞아. 단장님께서 부르셨어.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들여보내라고 해.”

키시아르가 그들을 다시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지부에 남아 있는 인원만으로 전투에서 수습한 몬스터의 처리와 전투 후의 행정적 수습까지 모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런 일을 떠넘길 상대는 보통 이쪽에 빚을 진 놈들이 적합한 법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겸해서 마법사들 쪽에는 다른 일도 좀 맡길 생각이고.’

유더의 설명을 들은 예르긴이 약간 비열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흐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랬구나. 알겠어. 난 또, 공손한 척 거짓말하면서 새로운 시비나 걸러 온 줄 알고 약간 겁을 줬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었네.”

이전 생에서 바람 속성을 주로 다루는 각성자들은 다른 속성을 다루는 각성자들보다 대체로 장난기가 심하다는 평을 받고는 했다. 그리고 예르긴 쉴러는 그 편견에 아주 딱 들어맞는 성격이었다. 마병단 내에서도 특히 잘 까불대기로 이름 높던 그녀가 작정하고 ‘약간’ 겁을 줬다면 그 상대들은 오줌을 쌀 만큼 기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유더는 굳이 그녀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는 대신 한마디만 했다.

“아무래도 좋으니 깨끗하게만 데려와.”

“아휴, 물론이죠. 내가 설마 마병단에 온 손님들을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들어 데려올까 봐? 나처럼 여리고 약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다고 그래?”

“…….”

“아. 이거 안 통하네. 역시 남작님.”

남작 작위를 받은 것과 이게 대체 무슨 상관일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예르긴이 ‘아, 그리고 보고할 거 하나 더 있어.’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절한 채로 들어온 남국인들 이제 다 깨어났대. 밥도 먹였고, 치료도 얼추 다 끝냈으니 조사 들어가도 될 것 같다고 그러더라.”

“그래? 건강과 태도는?”

“헤른 가 공녀님이 보내 주신 사제님들 말로는 귀신같이 목숨에 지장 안 가면서 엄청 아플 데로만 잘 때려 놨다고 그러던데, 멀쩡하단 소리겠지? 나그란의 별 쪽 놈들이 시끄러운 거에 비해서 남국인 놈들은 좀 기분 나쁘게 조용하긴 해. 또 멋대로 죽을까 봐 일단 밥 먹는 시간 빼곤 입을 막아 놓고 밀착 감시 중이야. 그… 뢰네브 씨? 그분도 그놈들을 특별히 열심히 살펴 주시고 있어.”

예르긴의 말대로 똑같은 현장에서 잡혔음에도 나그란의 별과 남국인 상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따라온 이들이 대다수라 무척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곤 누가 그들을 사주했느냐는 질문에만 죽어라고 입을 다무는 것밖에 없었다.

‘현자를 감싸려는 세뇌의 여파겠지.’

반면 남국인 상인들은 잡혔다 깨어난 이후로는 극도로 조용하다고 했다. 외부 상황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는데 그런다는 건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도 어느 정도 되어 있고, 대처법을 알고 있다는 뜻일 터였다.

“죽지 않도록 살핀 건 잘했어. 이따가 단장님과 내가 가서 조사를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계속 감시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나한테 알려 주고.”

“알았어. 드디어 단장님과 네가 직접 나서는구나. 그놈들, 우리 앞에선 한마디도 꺼내질 않아서 엄청 짜증 났었는데 다행이다.”

그리 말한 뒤 예르긴은 곧바로 물러가지 않고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방금까지 유더가 보고 있었던 키시아르 라 오르 쪽이었다. 그는 현재 쿠르가와 선즈, 에몬, 그리고 샬로인의 치안 경비대 기사단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기사단장은 영주인 사콥 남작에게 미리 들은 말이 있는지 조금 지나칠 정도로 공손했는데, 쉴 새 없이 쿠르가와 선즈, 그리고 키시아르의 허리춤을 번갈아 보느라 굴러대는 눈동자를 보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무엇일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되었다.

‘치안대 기사들이 쿠르가 일행에게 협조하지 않았던 건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군. 거기에 더해 키시아르가 찬 신검도 호기심과 공포를 자극하는 모양이고.’

굳이 따지자면 호기심보다는 공포가 조금 더 커 보였다. 덕분에 대화가 아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중이니 이쪽에는 다행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사람 마음은 참 바람보다도 변덕스러운 것 같아.”

예르긴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좋게 좋게 상대하려 할 땐 그토록 우습게만 보던 사람들이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고 나니 그제야 겁을 먹고 공손해지잖아. 그런데도 단장님에 대한 것들만은 왜 그렇게들 못 믿겠다는 듯 구는지들 모르겠다니까.”

유더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그 의미를 무어라 생각했는지 예르긴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보탰다.

“아니, 물론 나도 처음부터 확 잘 믿겼던 건 아니긴 해. 신검까진 그렇다 치지만 소드 마스터가 각성한 경우는 여태 없었잖아. 그렇지만 눈앞에서 본 증거가 너무 확실한데 그걸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어. 아, 나단 주커만 경 때문에 더 그런 걸까? 그분도 오러를 썼으니까?”

그녀의 추측이 어느 정도 맞기는 했다.

키시아르가 신검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여 싸웠다지만 그날 오러를 쓴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말로만 전해 들은 사실은 믿을 수 없다 여기는 이들이 아직도 키시아르의 허리춤을 볼 때마다 저 기사단장 같은 표정을 짓곤 하는 가장 큰 이유도 아마 나단 주커만으로 인한 소문의 혼란이 클 터였다.

키시아르는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예측하고 오히려 기껍다는 반응을 보인 바 있었다.

‘이번 전투가 소문으로 퍼진다면 나와 나단 둘 모두 오러를 썼단 사실이 함께 알려지게 될 텐데, 소드마스터가 하나라면 몰라도 둘이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가짜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짜일지도 모른단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을 테니, 그 불확실성이 우리를 오히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주겠지.’

그렇지만 두 명의 오러 사용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키시아르가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기존의 소문을 종식하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기존에 키시아르가 신검의 새 주인이라는 사실을 왈가왈부하던 의견들이 더 큰 충격 앞에서 갑자기 쑥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소문들은 아직 남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라 수도까지 퍼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터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키시아르가 결국 신검의 주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쪽에 힘을 보태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신검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그다음에는 검의 극의에 달한 자신의 힘을 드러내어 기존의 의심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사실화한다. 모든 사실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교묘하고 사람들의 저열한 마음과 인식을 잘 꿰뚫고 있는 방법이라 할 만했다.

유더는 그 모든 생각을 제 안에 남긴 채 조용히 대답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결국 단장님이 어떤 분인지 전부 알게 될 테니까. 마병단이 어떤 곳인지도, 마찬가지로 모두 다.”

그러자 예르긴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렇겠지? 네게 확답을 들으니 속이 좀 나아지네.”

기억에 따르면 예르긴은 이전 생에 유더가 단장이 된 뒤 그가 키시아르를 죽였다는 소문에 실망하여 떠난 수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의 키시아르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힘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고, 마병단 또한 마찬가지니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을 터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떠도는 흰 장갑의 잔상을 재차 밀어 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