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61화 (761/805)
  • 761화

    “내가 이해력이 좀 좋지 않아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마병단이 잡아들인 이들 중 오해로 잡힌 자들이 있었던가? 정확히 누굴 말하는 것이지?”

    키시아르가 한량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그가 요즘 들어 천천히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데다 감추고 있던 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본 이는 아직 적, 혹은 함께 싸운 아군뿐이었다. 마병단이 이런저런 일을 해결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펠레타 공작이 거기서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까지는 알지 못하는 사콥 남작의 얼굴에 실실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 샬로인의 귀족 젊은이들 중 몇몇이 그날 처음 불법 격투장을 어슬렁대다 오해를 받아 체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랬던가.”

    “예. 그 젊은이들의 부모와 집안사람들이 저와도 잘 아는 사이이지요. 그들 모두 남부의 오래된 귀족 가문으로, 의무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젊은이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바로 그런 문제를 일으킬 이들이 아닙니다. 잡힌 이유를 제가 들어 보니 그저 오해 같더군요.”

    사콥 남작은 불법 격투장에서 붙잡힌 귀족 젊은이들이 얼마나 불쌍하며 운이 없었는지 안타깝다는 듯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그 귀족들은 그저 악독한 범죄자 누키조 패거리에게 속은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며 도망치던 도중 잡혔다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건 너무하다는 주장이었다.

    “그 젊은이들은 그날 이후 가족들의 얼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병단에서 엄중한 조사를 이유로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는다더군요. 난리에 휩쓸려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을 이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가 아닙니까. 부디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도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그만 풀어 주시기를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마병단에게 사과를 하고 조력을 약속할 때보다 몇 배는 더 진심 가득한 얼굴로 떠드는 모습을 보니 그에게는 이쪽이 본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가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사콥 남작을 바라보는 동안, 그 모습을 흘긋 본 키시아르가 싱글대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불쌍한 자들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군.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혹 이름을 좀 알 수 있겠나?”

    “예. 물론입니다.”

    사콥 남작이 반색하며 순식간에 여러 명의 이름을 댔다. 키시아르는 그 목록을 모두 들은 뒤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좌.”

    “예.”

    “불법 격투장에서 체포한 이들의 방문 기록을 가져오도록.”

    “…펠레타 공작 전하? 방문 기록이라니요?”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 억울한 이들은 도박장에는 본래 발도 안 들이던 이들일 것 아닌가? 다행히도 누키조는 제 격투장에 자주 방문한 귀빈들의 정보를 꼬박꼬박 기록해 두는 자였거든. 이름과 방문 횟수, 도박에서 따거나 잃은 금액까지 꼼꼼히 적어 두었지. 심지어 외상액과 잃은 금액 대신 맡긴 담보 물품까지 모두 말이야.”

    키시아르의 능청스러운 말이 이어질수록 사콥 남작의 관리되지 못한 얼굴 근육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힘겹게 물었다.

    “그런, 그런 게 있었단 말입니까? 저는, 들은 적이 없는…….”

    “아, 몰랐나? 샬로인 영주의 기사들이 조사를 돕기 위해 찾아오면 바로 공유하라고 말해 두었는데 전달받지 못했나 보군.”

    당연한 일이었다. 샬로인의 영주는 여태까지 마병단이 한 일을 의도적으로 전부 모른 척했고, 조사에도 협력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붙잡힌 귀족들 측의 말만 듣고 왔으니 누키조의 비밀 장부를 마병단이 찾아냈다는 중요한 소식을 알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유더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집무실에서 보관 중이던 누키조의 비밀 장부 사본을 가져왔다. 큐레이지나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마병단원들이 찾아낸 이 비밀 장부는 누키조가 언젠가 잡힐 때를 대비해 기록해 둔 귀족 단골 손님들의 치부책에 더 가까웠다.

    문서의 엄청난 두께를 본 사콥 남작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대, 대체 그런 물건을 어떻게……. 정말 진짜 기록이 맞는 겁니까?”

    “하하하, 남작은 참 꼼꼼한 사람이군. 걱정할 필요 없네. 그 장부는 누키조의 곁을 지키던 부하가 알려 준 격투장 내의 비밀 금고 내에서 찾아낸 물건이거든. 귀빈들 중 도박장과 돈 문제로 얽힌 경우는 본인 증명을 위한 서명과 증거까지 남아 있어서 확인도 아주 쉽네.”

    “그… 전하. 잠시만……!”

    “보좌. 이름을 불러 줄 테니 잘 찾아보도록. 첫 번째. 아브카치아 가문의 에네스카.”

    키시아르가 사콥 남작의 말을 못 들은 척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 젖혔다. 유더는 귀빈 목록을 뒤져 바로 첫 번째 이름을 찾아내었다.

    “에네스카 아브카치아. 누키조의 도박장에 79번 방문하셨군요. 외상이 삼천 골드 정도 있었기 때문에 갚겠다는 각서를 자필과 인장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오, 79번이라. 거의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거기서 도박을 하고 있었단 건가? 대단한걸.”

    “펠레타 공작 전하! 지금, 뭔가, 오해가……!”

    “두 번째. 오브라이나의 말로네.”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다음 이름을 불렀다.

    “132번 방문하셨습니다. 도박장 2층뿐만 아니라 1층에도 자주 방문하셨고, 하루에 2번씩도 오셨다고 하는군요. 담보로 백조 세공 귀걸이를 두고 가셨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자는 속아서 온 이가 아니겠어. 그럼 세 번째인가? 살마카의 콜레스.”

    “32번 방문하셨고 빚이 사천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지? 보좌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드디어 그자에게 오해라 볼 만한 여지가 나타난 건가?”

    “아뇨. 단장님께 예의를 갖추지 않아 제가 ‘작은 항의’를 했다는 부분이 마병단 추가조사 부분에 덧붙여져 있어 읽어야 할지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아, 그렇군. 그자도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 콘케레메의 쥬시페는?”

    “231번 방문을…….”

    “아니, 그 정도면 집을 두고 도박장에서 산 수준이 아닌가? 그자가 오히려 다른 자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면 믿음이 갔겠군. 다음, 판탄의 타쉬킨?”

    “58번…….”

    “아술릭의 나이글?”

    “61…….”

    과연 누키조의 일등 귀빈들다웠다. 누구 하나 뺄 놈이 없을 만큼 방문 횟수와 그간의 행적들이 주옥같았다는 뜻이었다.

    키시아르가 이름을 부르면 유더는 대답을 하고, 유더가 대답하면 키시아르가 능청을 떨며 너무나 안타까운 목소리로 평을 하나씩 덧붙이면서 다음 이름을 또 불렀다. 주거니 받거니 약속이나 한 듯 박자가 딱딱 맞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사콥 남작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완전히 거무죽죽한 색으로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하고 숨이 막혔다. 이제 그만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키시아르는 그 많은 이름을 한 번 듣고 다 기억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끊지도 않고 계속해서 목록을 줄줄 불러 젖혔다.

    저것이 과연 ‘기억이 안 난다’며 한량처럼 웃어 대던 그 남자와 동일 인물인가?

    사콥 남작은 문득 이곳에 오기 전 헤른 공작에게서 받았던 명을 떠올렸다.

    ‘마병단을 찾아가 이쪽의 과실을 사과해라. 지나치게 굽힐 필요는 없으나 충분히 정중한 척은 해야 한다. 앞으로의 전적인 협력을 약속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들이 손에 쥔 게 무엇인지 확인하라. 특히 가문의 배신자들을 더 이상 그들이 조사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마병단이 여러 일을 처리하고 샬로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데다 그 과정에서 헤른 가의 배신자들까지 찾아낸 건 사실이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헤른 가의 입장에서 굴러 들어온 놈들에게 치부를 들키는 그림밖에 나오지 않는다. 헤른 공작은 마병단에게 이 이상 밑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하기 싫었지만 사콥 남작은 헤른 공작에게 충성하여 명을 따랐다. 다만, 목적을 전부 이루기 전에 상대를 너무 만만히 보고 개인적인 욕심을 한번 부린 게 이런 꼴로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마병단이 어떤 패를 쥐고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너무 섣불리 이름부터 말했다. 내가 이런 멍청한 실책을 하다니……!’

    그는 입술을 깨문 채 크게 소리를 쳤다.

    “제, 제발 거기까지만 해 주십시오. 공작 전하!”

    “음? 아직 안 끝났는데, 왜지? 억울한 이들을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그만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 제가 잘 알겠습니다.”

    “무얼 말인가?”

    키시아르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황가의 망나니가 얼굴 하나는 반반하기로 유명하다기에 오기 전 나름 기대를 했었는데, 저따위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그저 소름만 끼쳤다.

    “제가, 아무래도 친한 이들의 말만 듣고 잠시 판단이 흐려졌던 모양입니다.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면 당연히 응당 벌을 받아야겠지요. 그, 그 이상은 확인해 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다 안 끝났는데?”

    “괜찮습니다. 부디 제발 그만…….”

    “이러면 곤란하지, 남작. 나는 자네를 위해 바쁜 와중에 내가 직접 잡아들였었음에도 혹 기억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 여겨 결백한 이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저 잘못 알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려 하나?”

    “그……!”

    사실 사콥 남작 또한 누키조의 도박장에서 잡힌 귀족들이 결백하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착하고 선량하기는 무슨. 그들은 샬로인 귀족 사회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망나니들이었다.

    그래도 이 기회에 자신은 아는 귀족들을 위하여 나서 주었다는 생색도 내고, 마병단 쪽도 젊은 귀족들을 풀어 주어 귀족들의 협력을 얻으면 서로 좋은 일이 아닌가?

    다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놓고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며 교묘하게 꼬투리를 잡다니.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하던 바를 이루긴커녕, 헤른 공작의 명조차 못 따르게 된 상황에서도 사콥 남작은 그저 식은땀만 흘렸다.

    펠레타 공작이 제가 중간에 사욕을 부리려 했던 부분을 헤른 공작에게 말해 버린다면 모르긴 몰라도 좋지 않은 결과가 오리란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말은 그저 저의 멍청함에서 비롯되었을 뿐, 헤른 공작 전하의 뜻과는 결코 다르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마병단과 전하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도울 수 있도록 저, 사콥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니…….”

    키시아르는 사콥 남작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망나니다운 모습으로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웃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 보지. 자, 그러면 우리가 할 이야기를 다시 해 볼까. 아무래도 나눌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말이야.”

    사콥 남작은 말 그대로 탈탈 털린 채 마병단에 ‘전적인 협력’의 세부 사항을 제공하고 돌아갔다. 본 목적이었던 헤른 가의 배신자들도 마병단에 그대로 남겨 둔 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