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56화 (756/805)

756화

“조금… 정리되고 나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유더의 창백한 안색을 말없이 훑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만, 조건을 하나 두지. 당장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지만 잠은 계속 이곳에서 자는 것으로. 괜찮겠나?”

잠을 자다 말고 문제가 생겼으니 가능하면 곁에 두고 살피고 싶다는 뜻이 전해졌다. 키시아르가 잠도 자지 않고 홀로 이전 게임을 복기하던 때, 유더 또한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까.

할 일도 많은데 새로운 하루의 시작부터 저 때문에 우려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오늘 활동 도중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보고하거나 숙소로 돌아가도록 하고.”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답하지 않으면 키시아르가 염려를 거두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유더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예상대로 키시아르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자, 그러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식사부터 할까.”

식사는 침실과 이어진 집무실 한편에 이미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유더는 그게 자신의 드문 늦잠 때문일 것임을 눈치챘다.

마병단의 아침은 대체로 해가 뜨기 전부터 이르게 시작된다. 모든 단원들이 비슷한 시간표로 움직이며 생활하는 단체 특성상 식사 시간을 한번 놓치면 많은 애로 사항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식사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단원들의 이야기였고, 단장 키시아르에게는 크게 해당이 없었다. 그는 수도에 있을 때도 일이 바쁘면 집무실에서 대부분의 식사를 처리하곤 했다. 이번도 그렇게 하는 셈 치며 거기에 은근슬쩍 1인분을 더하는 정도는 쉬웠으리라.

다른 이들은 단장과 보좌가 함께 아침을 먹는다고 해도 식당까지 갈 시간도 없이 집무실에서 먹어야 할 만큼 일에 찌들었다고만 여길 테고 유더에겐 편안히 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생기니 여러모로 용의주도한 행동이었다.

유더는 제 앞에 쌓인 많은 빵과 왠지 키시아르의 것보다 더 큰 그릇에 담긴 수프를 꾸준하게 먹어 치우며 제 몸 상태를 살폈다.

늦잠을 자긴 했어도 피로하진 않았다. 식욕이나 육신을 움직일 때의 느낌도 평소 그대로였다. 몸을 타고 흐르는 각성자의 힘도 거의 회복되어 지금 당장 이 건물을 뒤집어 보라 해도 어렵지 않게 해낼 듯했다.

이 정도면 그 이상한 악몽이 몸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꿈은 대체 뭐였을까.’

그건 여태까지 꾸었던 꿈과는 무언가 달랐다. 과거의 기억을 꿈으로 다시 본 것도 아니고, 의미 없이 뒤섞인 무의식의 발로라기에는 기이한 실재감이 있었다.

일단 꿈에서 본 손이 이전 생의 키시아르의 손이라는 건 분명했다. 유더가 그 사실을 확신하고 ‘키시아르’를 부르자 정답을 맞혔다는 듯 목에 글을 써서 확인까지 해 주지 않았던가.

손뿐임에도 마치 확연한 자아를 가진 것 같았던 그 움직임.

그게 정말 그저 꿈이란 말인가?

그것이 닿을 때 맡았던 아스라한 피비린내가 떠오르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음식을 남기는 게 싫어서 주는 대로 먹는 편이었지만 이런 상태로는 더 먹는 쪽이 오히려 속을 망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유더는 조용히 스푼을 놓고 식사를 마쳤다. 무어라 한마디 할 줄 알았던 키시아르는 의외로 남은 음식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의 배려가 지금만큼 기꺼웠던 적이 없었다.

유더는 아직도 신경 한구석을 긁는 듯한 하얀 장갑의 잔상을 구석으로 떨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남부에서 머무르는 게 기정사실화된 오늘부터는 다시 정식 단복을 입어야 한다. 여간하면 입을 일이 없기를 바라며 수도에서부터 가져온 짐 속의 단복을 생각하며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장님, 쿠르가가 돌아왔습니다!”

“각협부대의 선즈 대장님과 에몬 부대장님도 함께입니다!”

식사를 마친 뒤, 집무실에 제일 먼저 찾아온 건 밝은 얼굴을 한 단원들이었다. 어제 키시아르의 명에 따라 헤른 2공자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한 장소로 떠났다가 소식이 끊긴 쿠르가가 무사 귀환했다는 말에 유더의 기분 또한 상당히 가벼워졌다.

쿠르가는 어제 헤른 2공자의 시신 조사 후 키시아르의 명으로 헤른 가의 기사들과 함께 셔펜 항구로 향하라는 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본부로 가 함께 갈 단원들을 차출했어야 했을 그는 모두가 돌아오고 몬스터까지 전부 처리한 뒤에도 귀환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귀환하지 않았던 이는 그뿐이 아니었다. 쿠르가와 함께 떠난 헤른 가의 기사들, 그리고 제국 각협부대의 대장 선즈와 에몬도 함께 귀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고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선즈와 에몬이 귀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늦게 확인된 건 우습지만 급격한 혼란 속에서 마병단과 제국군 특수부대 사이의 상호 신뢰만은 지나치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와 유더를 비롯한 마병단 측에서는 헤른 2공자의 시신 확인 이후 그 두 사람이 알아서 돌아갔으리라 여겼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이번에 일어난 일들이 일들이니만큼 지노 장군에게 보고를 위해 자리를 비웠거나 다른 일로 잠시 다른 곳에 있으리라 자연스럽게 판단했다.

그와 반대로 제국군 측은 헤른 2공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따라간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은 선즈와 에몬이 마병단 측에 어떤 부탁을 받고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통솔할 사람이 없어도 마병단과 협력하여 전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은 혼이 쏙 빠져 그들의 부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각협 부대원들이 대장과 부대장의 부재가 지나치게 길어졌다는 사실을 이상하다고 인지하기 시작한 건 쿠르가의 부재 사실이 모두에게 전해진 다음부터였다.

쌍방 모두 어떤 문제가 일어난다면 서로 곧바로 알려 줄 테니 일단 믿고 싸워도 좋다고 판단했던 게 오히려 문제를 늦게 인지한 원인이 된 것이다.

허둥지둥 찾아온 각협부대원들을 통해 선즈와 에몬의 부재 사실을 확인한 키시아르는 귀환하지 않은 이들이 모두 헤른 2공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함께 갔던 이들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선즈와 에몬, 쿠르가는 모두 마병단으로 먼저 돌아갈 예정이었어. 헤른 가의 기사들까지 합쳐 함께 마차를 타고 동행하는 게 수순상 자연스럽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겠군.’

키시아르는 제국군과 마병단원 여럿을 보내 헤른 2공자의 시신이 안치된 곳에서부터 마병단 지부로 오는 방향의 길과 쿠르가가 본래 향할 예정이었던 셔펜 항구 쪽을 살피도록 명했다. 쿠르가와 선즈, 에몬이 무사히 복귀했다는 걸 보면 그의 추측이 다행히 좋은 쪽으로 맞아 든 듯했다.

곧 곰처럼 덩치가 큰 쿠르가와 선즈, 에몬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쿠르가 싱, 복귀를 보고드립니다.”

“각협부대 대장 선즈, 그리고 부대장 에몬이 마병단장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유더는 차례로 인사하는 세 사람의 면면을 조용히 살폈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방금 귀환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꾀죄죄했다. 곳곳에 부상을 입어 붕대도 두른 상태였다.

‘그래도 다행히 중상자는 없군. 치료를 받은 걸 보면 오자마자 사제들을 만난 모양이고.’

“모두 무사히 귀환한 모습을 보니 기쁘군. 피로하겠지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예, 물론입니다.”

쿠르가가 각 잡힌 자세로 마병단식 경례를 한 뒤 그들에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어제 저는 단장님께 마병단원 5인을 추가 차출하여 헤른 가의 기사들과 셔펜 항구로 향해 2공자님의 죽음에 대해 조사할 것을 명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선즈 대장님과 에몬 부대장님께서도 저를 도와주시고 싶다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희는 먼저 마병단으로 향할 예정이었습니다만, 헤른 가의 기사께서는 마병단원들을 데려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셔펜 항구로 가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쿠르가의 말은 키시아르의 예상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본래대로라면 다 함께 마병단에 들렀다가 셔펜 항구로 갈 예정이었던 그들의 방향을 틀어버린 건 헤른 가의 고집 센 기사, 라델이었다.

그는 마병단을 기다리고 싶지 않으니 먼저 셔펜 항구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쿠르가와 선즈, 에몬은 그것이 조사의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라델은 화를 내며 먼저 셔펜 항구로 떠나 버렸고, 쿠르가와 선즈, 에몬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뒤쫓았다. 셔펜 항구 쪽으로 먼저 가서 라델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마병단 지부에서 사람을 뽑아 오는 게 그때 그들의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런데… 셔펜 항구로 뒤쫓아 가던 도중, 라델 경의 움직임이 의심스럽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5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