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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49화 (749/805)

749화

그때부터 두 사람은 아까 일어났던 몬스터와의 전투를 움직임 하나, 검로의 방향 하나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해체하여 각자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상대방은 최선의 선택을 했으나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걸 증명하고 설득하려는 주장이었다.

물론 설득된 이는 없이 주장만 존재했기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 결론은 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오히려 더욱 부드럽고 열기를 띠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열한 번째 몬스터를 상대할 때 단장님께서 검의 방향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바꾸신 건 본래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그랬지. 본래는 밀어 내려고 했었어. 하지만 왠지 그쪽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결과적으로 괜찮은 판단이었고.”

“제가 보기에도 그쪽이 옳았습니다. 밀어 냈다면 열두 번째 놈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거리로 변했을 테니까요. 보고 결정하신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단장님은 시야가 넓으시니 아마 열두 번째의 행동 패턴을 계속 보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 그렇군.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목표 외에도 인지 밖의 시야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전투 도중 찾아드는 ‘감’의 정체란 건가? 신선한 분석인걸. 직접 느껴 보지 않았더라면 이해하기 어려웠겠어. 그러면 너도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그간 마병단이 전투를 치르고 나면 후에 그 전투를 복기하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술과 전후 상황에 대한 의논에 가까웠지, 이런 식으로 세밀하고 직접적인 전투 방법 하나하나를 운동 경기 분석하듯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전투의 작은 움직임까지 일일이 따져 보고 살피는 건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전술은 판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하기에 어느 정도 객관성을 지켜야 하지만 이건 객관성도, 전문성도 뭣도 없었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싸웠던 이나 검술, 혹은 격투술 이론 따위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 기억의 공유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그 쓸데없는 대화를 이상하게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유더는 조금 뒤늦게 자신이 이 대화에 상당히 몰입하여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묘한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뭔가… 이런 대화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얼마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는지 어느새 물도 상당히 식은 상태였다. 유더는 가볍게 힘을 풀어내어 몸을 담근 물 전체를 감쌌다. 잠시 후 식었던 물이 굳었다가 풀리며 방금 덥힌 듯 김을 훅 뿌렸다.

유더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린 키시아르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떴다.

“물을 덥혔군?”

“몸이 식으면 안 되니까요.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 몰랐습니다.”

키시아르는 놀라지 않고 그저 눈만 휘었다. 그 반응을 보고서야 유더는 자신이 예상외로 대화에 몰입 중이었다는 사실 외에 또 다른 뭔가를 깨달았다.

“……혹시 지금의 대화 흐름.”

“하하.”

“역시 단장님께서 의도하셨던 거군요.”

사실 생각해 보면 진작 파악했어야 할 일이었다. 키시아르는 자유자재로 이야기판을 주도하는 데 도가 튼 화술의 일인자다. 상대가 유더라 해도 작정만 한다면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 흐름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파악이 늦은 건 역시 피곤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또…….

“하지만 재미있었지?”

…그래. 이 대화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키시아르가 자신의 첫 전투를 실패했다고, 좋지 않은 추억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스스로 지닌 모든 전투적 지식을 끌어내어 설득하려 했다. 유더가 가장 잘 아는 건 물론 각성자의 능력과 관련된 전투술이었으나 그 외의 검술과 온갖 무기술, 격투술에 대해서도 어디서 뒤지지 않을 정도로는 지식이 있다고 자부했다.

설령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해도 그에게는 빈틈을 보완할 풍부한 전투 경험이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옛 경험으로 얻어 낸 사례와 미래에 새로이 밝혀진 지식들이 말 사이에 뒤섞였는데, 키시아르는 그런 부분들에 큰 흥미를 내보였다.

반대로 키시아르는 전투 경험으로는 유더에게 한참 뒤질지 몰라도 타고난 분석력과 깊이를 다 알지 못할 만큼 방대한 학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언급하는 온갖 특이한 지식들은 경험만으로는 알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적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들려주는 그의 말솜씨에 유더가 빠져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생각해 보면 유더는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참여했던 전투를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흥미만으로 계속 분석하며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이전 생에는 그런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었고 이번 생의 동료들은 아직 유더와 전투 관련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기에는 경험도 지식도 다소 미숙했던 탓이었다.

키시아르가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검을 쓰는 이가 검술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지. 나도 아주 좋아해. 특히 직접 싸운 전투에 대한 분석이라면 어떻게 재미없다고 느낄 수 있겠나?”

“재미있으려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혹 싫었나?”

“……아뇨.”

그 점까지 합해 완벽하게 키시아르의 의도대로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으나 유더는 이내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로에 젖어 무거웠던 머리와 마음은 어느샌가 놀랄 만큼 가뿐해진 상태였다.

“대화가 중간부터 방향을 바꾼 탓에 결론이 나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단장님께서 오늘 전투 도중 일어난 몇몇 돌발 상황을 마음에 크게 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인의 실수에는 관대하지 않은 이가 내게만 그리 관대해서야 되겠나?”

“그런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덕일까. 머릿속에 짓눌려 있던 생각들이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오늘 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 본 단장님께서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워 보인다고 느꼈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저 즐거워 보였던 키시아르의 표정이 순간 조금 변화했다.

“음, 그게 이전의 단장님께서 부자유스러워 보였다거나 전투의 심각함을 잊고 계신 듯 보였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저는 보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앞으로도 좀 더…….”

뭐라고 덧붙여야 그때 느낀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가 좀 더 자유롭고 기분 좋게 전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유더가 잠시 입을 다문 사이, 키시아르가 말했다.

“아니.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니.”

그리 말하는 키시아르의 목소리에는 방금까지 가득했던 웃음기가 없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려 했지만 그가 갑자기 손으로 물을 떠 올려 얼굴을 씻어 낸 탓에 확인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를 메운 수증기 사이로 키시아르가 재차 물을 뜨고 얼굴에 주르르 끼얹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그러기를 몇 번 더 반복한 뒤에야 사내는 비로소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익숙했던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 대신 자리 잡은 건 더없이 자유롭게 싸우던 그때 그 순간과 같은 표정이었다.

유더의 심장이 누군가 손으로 꽉 쥔 것처럼 일순 아주 크게 뛰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을 느리게 훔쳐 내면서, 사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렸다.

“사실 기념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쉬게 할 생각이었을 뿐이라 진짜로 기념을 해도 될 만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었는데…….”

지면 아래의 용암 같은 열기를 머금은 속삭임은 듣는 이의 몸속에도 열기를 옮겨 전하는 힘이 있었다.

“방금 그 말을 듣고서야 정말로 그래도 괜찮은 일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

“생각해 보니 더 해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게 처음이라서인가.”

약간의 자조적 미소를 띠고 흐려진 말끝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여러 감정을 머금은 채 유더를 응시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유더 아일 외에는 듣지 못할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내가 처음으로 느꼈던 것들을 나 아닌 누군가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건 이토록 기적처럼 기쁜 일이었군.”

“…….”

“그래. 기뻐.”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되뇐 사내의 입술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 주어서 고맙네.”

그 말속에 깃든 긴 세월의 무게를 몰랐더라면 지금과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더는 이제 그 말을 하기까지의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억겁과 같은 인내의 순간들을 참아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영원히 오늘과 같은 해방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사라질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오늘 수많은 몬스터를 단신으로 상대한 그의 모습을 보고 들은 그 누구도 그런 이면의 순간들을 짐작하지 못하리라.

그가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서른도 안 된 청년이라는 사실도.

유더의 심장이 미친 듯이 튀어 올랐다 낙하하기를 반복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훅 올라온 불길이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키며 허리 아래가 오싹하게 울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무엇으로든 이 터질 듯한 무언가를 뱉어 내고 전해야만 했다.

유더는 몸을 일으켜 무너지듯 키시아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내 또한 기다렸다는 듯 유더를 품으로 받아 내며 고개를 묻었다. 물이 거세게 출렁이며 넘쳐흘렀으나 누구도 거기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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