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화
“괜찮아.”
“…….”
“날 봐 줘.”
“…….”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유더는 내리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끝까지 모두 풀어 헤친 셔츠 안의 맨몸이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고 단단하게 자리한 피부와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 같은 근육이 주인의 호흡에 따라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유더는 그것을 한참 동안 직시하다 조금 더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지평선처럼 곧고 긴 쇄골, 또 그 위로는 오래된 나무줄기처럼 죽 뻗은 목빗근, 그리고 다시 그 줄기 끝을 따라가면 싱싱한 잎사귀 사이로 드리운 햇빛 같은 금발. 한번 보기 시작하니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유더의 시선이 마침내 종착지에 다다라 완만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과 붉은 눈동자에 이르렀을 때, 키시아르는 도달을 축하하듯 깊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무엇이 어떠냐는 말씀이십니까.”
“이제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나냐는 뜻이네.”
남의 몸을 본다고 갑자기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유더는 왠지 반박하지 못했다.
키시아르를 본다고 갑자기 드러누워 쉬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충동이 때와 상황을 이기고서 고개를 쳐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가 바란다면 다른 일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지고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바로 지금 같은 기분이 들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한 것뿐이었다.
유더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렸다.
“들어 보게. 눈앞에 닥친 일들이 무엇보다 급하다 여겨 골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오늘밖에 할 수 없어. 이를테면… 태어나 처음으로 신검에 오러를 두르고 몬스터를 상대한 뒤 그 모습을 가장 보여 주고 싶었던 이와 함께 기념하는 것도 그렇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유더는 일순 생각을 멈추었다.
보통 유더에게 휴식을 권하는 이들은 사람의 체력과 기력은 무한하지 않다는 걸 이유로 삼고는 했다. 인간의 몸은 동력 없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불편해도 꼬박꼬박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납득하도록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지금 쉬어야 할 이유를 피력했다.
오늘은 그가 최초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검과 오러를 사용하며 홀로 싸웠던 날이다. 그러니 그걸 둘이서 함께 기념할 수 있는 것도 오늘뿐이다.
그간 여러 이유로 힘을 숨겨야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잠시나마 자유롭게 싸웠던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유더가 어떻게 그 말을 무시하고 넘길 수 있겠는가?
키시아르는 유더를 향해 쐐기를 박듯 물었다.
“그래도 함께해 주지 않을 텐가?”
졌다. 하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를 말로 이길 수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의 유더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터다. 애초에 키시아르가 자신을 보라는 말에 이끌려 눈을 돌렸을 때부터 이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유더는 웃고 있는 사내를 향하여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수백 년 전의 양식대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큰 욕조 위로 뜨거운 김이 아지랑이처럼 올랐다. 사람 몇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크기였으나 그곳을 이용 중인 두 명의 사람은 마치 아주 작은 욕조에 겨우 들어가 있는 것처럼 몸을 겹쳐 앉은 상태였다.
유더는 가슴께에서 찰랑이는 물을 바라보며 등 뒤에 닿아 있는 사내의 가슴 고동을 느꼈다. 먼지와 피, 몬스터의 체액을 모두 깨끗하게 씻어 내고서 이렇게 앉아 있으려니 무슨 생각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느껴지는 거라곤 그저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따뜻한 온기와 기다렸다는 듯 나른하게 몸을 감싸는 키시아르의 향뿐이었다.
사실 그 향은 욕실에 들어오기 전부터도 몹시 농후했다. 그것을 이제야 인지한 건 안기다시피 한 자세 덕에 가까워진 거리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유더의 머릿속에 다른 것들이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젖은 머리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속눈썹을 귀찮게 할 정도로 두드려 대도 수습할 마음이 들지 않아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더니,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큰 손이 물 밖으로 올라와 앞머리칼을 대신 쓸어 넘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머리칼을 넘겨 준 뒤에도 그 손은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드러난 이마를 손끝으로 가볍게 지분거리던 손길이 흐르는 물방울을 따라 콧날로, 그리고 뺨과 턱으로 다시 내려갔다. 턱 아래의 목덜미 어딘가에 손이 쿡 닿은 순간, 미끌거리면서도 간지러운 기분에 등줄기가 일순 오싹하게 떨렸다. 물에 젖은 피부끼리의 접촉은 평소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부위의 감각을 더욱 곤두서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유더는 어깨를 움찔 굳히면서도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머리를 뒤로 기대자, 마침내 손이 떨어져 나가고 대신 입술이 이마 위에 맞닿았다.
반듯한 이마에서부터 미끄러진 입술이 손길이 닿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 내려가 입술에 맞닿은 건 마치 예정된 수순과도 같은 일처럼 느껴졌다.
입맞춤은 평소보다 더 깊었고, 그만큼 더 느렸다.
덕분에 몸과 머리도 이전보다 더욱 나른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 뜨고 있으려 노력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입맞춤이 끝난 뒤 유더는 눈을 내리감지 않기 위해 하아 하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대로 육신을 내리누르는 무게에 질 것 같았다.
키시아르가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졸린가?”
“아뇨.”
졸리지는 않았다. 다만 몸이 무거울 뿐이었다.
“자도 괜찮은데.”
“기념을 위해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쪽이 잠들어도 같이 있는 건 같이 있는 거지. 그것으로 충분해.”
“그럴 수는 없지요.”
충분하기는 뭐가 충분하단 말인가. 유더는 정신을 좀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자세를 바꾸었다. 키시아르의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몸을 돌려 맞은편으로 향하자 사내가 아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거리가 멀어지는데. 뭐, 그래도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으니 이쪽도 좋군.”
장난스레 손에 물을 떠다 밀어 보내는 키시아르의 손을 유더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까 가벼운 부상을 입었던 팔이었던 탓이다. 다행히 그의 손은 이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고 멀쩡해 보였다. 유더의 손도 이렇다 할 통증이 없으니 마이라가 소개해 준 치료사제의 실력은 더 의심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유더는 내일 당장 그 사제와 빠른 연락을 주고받을 수단을 만들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부에 예정보다 오래 있게 될 것 같다고 확정된 이상 그런 부분부터 확실하게 뒷받침해 두어야 뒤탈이 없을 터였다.
‘그래도… 다음에 또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보급 경로, 다양한 현지 조력자들 확보, 이곳에서 새로이 이용할 수 있을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정리.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잠시 부글거리다가는 피로에 짓눌려 도로 가라앉았다.
“아직도 이 손 걱정이 되나?”
키시아르가 유더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손을 들어 휘저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마터면 단장님께서 더 큰 부상을 입으실 수도 있었으니까요.”
“운이 좋다고 말할 생각은 없네. 그건 내 판단력의 문제였으니까.”
키시아르가 미간을 모은 채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몬스터들이 같은 종이라 해도 완전히 똑같은 특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실수한 거지. 뒤에서 지켜보는 것과 직접 상대하는 것의 차이가 어느 정도로 큰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탓이야. 그 때문에 하마터면 보조하던 네가 위험에 처할 뻔했으니 손 하나 정도면 대가가 싸게 먹혔지. 멍청했어.”
키시아르의 평은 스스로의 전투에 내리는 것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가차 없었다. 기념을 위해 쉬자더니, 사실은 본인의 전투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유더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옳지 않은 말씀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단장님의 판단은 최선이셨습니다. 오히려 몬스터의 특성을 파악하고 알려 드려야 할 제가 바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크니 대가를 치러도 제가 치렀어야 했겠지요.”
“그거야말로 옳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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