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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46화 (746/805)

746화

“…그래서, 답신은 어떻게 보내실 겁니까?”

유더를 안고 있던 키시아르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생각에 잠긴 붉은 눈이 에버의 서신 겉면을 훑었다.

“일단 폐하 쪽에서 들어올 소식을 보고 나서 확실히 결정해야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현자가 수도 밖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그쪽을 염두에 두고 처리할 생각이네.”

서신만 보고 내린 결론이라기에는 상당히 확신 어린 답이었다. 키시아르는 그 이유에 대해서 곧 설명해 주었다.

“카치안이 시기적절하게 현자를 부를 수 있었던 건 분명 우연이 아니야. 그자의 세뇌 능력에 걸려들기에 너무 좋은 조건으로 오랜 기간 함께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이미 그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을 테지.”

그건 유더도 이미 생각했던 바였다.

“현자가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목숨을 구명할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디아카 공작과 카치안 황태자에게 연락하려 애썼을 거란 건 저도 짐작했던 바입니다. 아마 렌보우 자작을 이용했겠지요. 덕분에 시기적절하게 마병단에게서 빠져나가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수도 밖으로 향했을 거란 추측과는 어떤 연관이 있겠습니까?”

“서신에 의하면 디아카 공작은 그간 현자의 진짜 능력을 알지 못했네. 하지만 그날 카치안을 본 뒤에는 어땠겠나?”

키시아르는 직접적인 답을 말해 주는 대신 질문과 함께 입술을 차갑게 끌어 올렸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가 결론을 내린 이유를 이해했다.

“…현자가 바라는 대로 그의 진짜 능력이 어떤 계열인지 깨달았겠군요.”

디아카 공작이 세뇌라는 능력에 대해 얼마나 깨달았을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현자가 황태자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늙은 너구리 같은 이가 과연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건, 아주 환영하지는 않았으리란 점이었다.

디아카 공작의 권력은 황태자 카치안을 통해 완성된다. 과연 그가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카치안을 움직이려 하는 것을 원할까?

‘아니겠지.’

하지만 현자도 그 위험성은 충분히 짐작했을 터다. 바라던 대로 권력을 얻고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능력이 황태자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아카 공작에게 유용하며 전혀 해가 될 일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을 작자니까.

키시아르 또한 유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 일로 현자는 디아카 공작에게 ‘나를 다른 이들처럼 함부로 내버리지 말라. 수틀리면 황태자를 이용할 수 있다’는 위협과 동시에 ‘그렇지만 이 능력은 당신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라는 달콤한 유혹을 전달했겠지. 디아카 공작이 거기에 어떤 답을 내릴 수 있겠나?”

“일단 가장 중요한 황태자 곁에서 떼어낸 뒤에 증명해 보라고 하는 쪽이 디아카 공작 입장에서는 위험도가 가장 낮지요.”

“그래. 그러니까 황궁 밖으로 나간 게 분명 그자일 거야.”

“그렇다면 현자는 신뢰를 증명하기 가장 좋을 곳으로 가려 하겠군요.”

“거기가 어디일 것 같나?”

유더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생을 반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져도 어떤 자들은 결코 변치 않는다. 주변의 환경이 바뀌고 일을 시작하게 된 원인은 달라졌는데도 그런 이들의 근본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각성자들을 위한다면서도 결국은 스스로의 증오를 가장 중요시하는 나한.

자신을 믿는 이들을 기만하며 권력을 탐하는 욕심을 버릴 줄 모르는 현자.

유더는 남쪽을 향해 사라졌다는 나한과 마찬가지로 현자 또한 이전 생의 끝을 반복하려 하는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을 느꼈다.

그 확신을 담아서,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 남부일 것 같습니다.”

남부는 현자가 본디 머물던 본거지가 있는 곳이며, 동시에 현 상황에서 디아카 공작에게 가져다 바치기에 가장 좋을 먹잇감인 키시아르가 있다.

신뢰를 증명하고자 하는 현자는 결코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하리라.

키시아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해.”

“그놈 뜻대로 일이 잘되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대비해야겠지요.”

“그래. 오히려 모든 걸 여기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 효율적이어서 좋군.”

일이 폭탄처럼 터지고 있는 상황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재주다. 그렇지만 유더는 그 자신감 넘치는 여유로운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에버나 다른 단원들의 분함은 이해하지만… 내가 봐도 이번 일이 우리에게 최악의 방향은 아니었어.’

이유는 간단했다. 현자가 디아카 공작을 만나기 위해 나타났던 날, 그자의 본래 목적은 결국 이루지 못했으리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현자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디아카 공작을 찾아갔다. 하지만 디아카 공작이 그를 만난다고 곧바로 도움을 주려 했을까?

그가 그리 마음 따뜻한 자가 아니라는 건 현자도 이미 알고 있었을 터였다. 현자가 그간 열심히 황태자를 치료하는 한편 제 부하들과 함께 태양궁을 간 크게 침범하고 마병단 2기 모집에 흙도 뿌렸다지만, 디아카 공작을 만족시키기에는 늘 뭔가 부족한 결과만을 낳았다. 직접적으로 얼굴을 본 것도 키올레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의 한 번이 처음이었다. 그 정도면 신뢰 관계는커녕 그냥 간을 보는 수준의 관계에 불과했다.

이번 남부에서 일어난 처절한 실패가 수도에 벌써 전해졌더라면 디아카 공작은 아마 현자에게 수도를 빠져나갈 기회를 주기도 전에 어떻게든 죽이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자가 디아카 공작을 찾아갔다면 그건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다. 유더는 누구보다 각성자에 익숙한 이의 감으로 그자의 진짜 목적이 디아카 공작의 ‘강제 설득’에 있었으리라 판단했다.

말이 좋아 강제 설득이지, 사실은 그냥 세뇌다.

현자가 사람을 세뇌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뭔지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칸나는 나그란의 별에 소속된 이들의 경우를 토대로 ‘신뢰’가 열쇠가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유더 또한 거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그걸 쓸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드물지만……. 정신계 능력자 중에는 그런 녀석들이 있긴 했지. 분명 능력을 발휘할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도 특수한 조건이나 희생을 통해 잠시나마 본래 힘의 일부를 발휘하는 경우가…….’

이를테면 이전 생, 유더가 이끌었던 마병단의 정과 부단장이었던 카드점 능력자 글로에.

그녀의 능력은 실체를 지닌 낡은 카드를 통해 발휘된다. 카드가 없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적들은 글로에를 노릴 때 카드부터 노렸다.

하지만 카드를 빼앗기고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글로에는 실체 없는 카드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신기를 발휘했다. 물론 그 기적을 여러 번 일으키진 못했고 한 번 일으킬 때마다 수십 일을 누워 지내야만 했다지만 그래도 대단한 일이었다. 유더는 그 일을 통해 어떤 이들은 능력 발동 조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잠시나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단한 경험과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현자 그놈도 능력 발휘 하나는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각성자보다도 많이 한 편 아닌가?’

그놈은 나그란의 별에 들어갔던 수많은 이들을 모조리 세뇌해 본 경험이 있는 놈이다. 제 능력 발휘라면 그 누구보다도 많이 해 봤을 테니 조건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디아카 공작을 잠시나마 세뇌해 볼 방법을 알고 있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단 말이지.’

세상일이란 참 누군가 한 사람의 마음대로는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디아카 공작을 강제로 세뇌할 방법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를 현자는 정작 마지막 한 발을 앞두었을 때, 키올레를 만나고 말았다.

서신 속에 써 있던 키올레의 온갖 바보짓을 떠올리자 또다시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흘렀다.

‘그놈이 거기서 갑자기 튀어나와 도움이 되다니…….’

키올레에게 미리 현자의 능력을 알리고 디아카 공작의 이상행동을 감시하라고 말했던 건 그냥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준비의 일환이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지나치게 수상하게 굴어서 오히려 반대로 현자 쪽에 먼저 세뇌당할까 싶어 그냥 대놓고 시끄럽게 굴라는 말도 덧붙이긴 했다.

그런데 그 말들이 쌓여 정작 그 상황에서 현자를 정확하게 막아 내는 방패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튼 그 덕에 키올레와 디아카 공작 둘 다 아직 현자에게 넘어가지 않고 제정신을 지키고 있는 듯하니 최악은 결코 아니었다.

얼마 후, 마이라가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밖으로 나가 남부 지부 정리를 돕고 몬스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뒤 해산했다. 하루 종일 흉흉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던 남부는 아주 잠시나마 평온해졌다.

마병단원들은 잡아들인 이들을 나누어 가두고 조사를 하느라 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건 일을 도와주고 있는 제국군과 합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일루사 황제의 서신은 그날 저녁에야 도착했다. 황제는 자신이 먼저 심어 두었던 능력의 매개체들이 버려진 상황이라 새로운 매개체를 심는 데 시간이 걸렸음을 먼저 설명한 뒤 파악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디아카 공작은 현자를 남부로 보낸 것으로 파악된다. 카치안은 반발하였으나, 현재는 조용하다. 현자가 디아카 공작의 사람에 더 가까우며 태양궁을 침범한 진짜 범인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흘렸으나 아예 믿지 않는 듯했다. 다시 시도해 볼 예정. 남부에서 큰일이 또다시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상자는 없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하라.’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군.”

정보가 적힌 서신을 태운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저희의 추측이 맞았다는 게 이제 확실해졌군요.”

“그렇지. 그러면 이제 필요한 이들을 불러들여야겠어.”

키시아르가 펜을 들었다. 그는 수도의 본부에 있는 단원들 중 상당수의 이름을 남부 추가 지원 파견 목록에 적은 뒤, 맨 위에 책임자의 이름을 썼다.

“책임자는 에버 벡으로 정할 생각이네.”

“그게 정하신 벌입니까?”

“그래.”

좋은 생각이었다. 에버라면 분명 현자를 끝까지 뒤쫓아 확실하게 잡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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