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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45화 (745/805)

745화

그는 나름대로 모욕과 무시를 참는 데 이골이 났다 여겨 왔던 자신이 얼마나 갈 길이 먼 젊은이에 불과한지를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프루엘레의 시선을 마주한 마병단 동료들이 현자와 디에먼을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 안 돼! 아파! 손대지 마! 현자님!”

디에먼이 에버의 손이 닿기도 전에 몸부림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현자는 저를 붙잡으려 하는 손길을 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디아카 공작이 저를 모른 척하리라는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약간 어둡게 가라앉은 침착한 표정이 프루엘레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의 손이 막 현자의 어깨를 잡으려 했던 그때, 현자가 키올레와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디아카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

공작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 사람이 후회되는 점이라면 그저 디아카 경이 저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침묵했던 것뿐입니다.”

이번에는 키올레가 보란 듯이 진저리를 치며 제 아버지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현자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능력이 무엇인지 공작 전하께서는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으셨었지요. 이제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아, 이 아저씨 정말 말 많네!”

핀이 현자의 눈을 가리고 재갈을 물렸다. 현자는 웅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마병단원들에게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팔을 붙잡힌 채 흔들대는 그의 초라한 모습에서 사람들이 막 관심을 끄려 했을 때였다.

“공작 전하! 급보입니다.”

디아카 가의 기사 한 사람이 급히 뛰어오며 큰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뜻으로 한마디 하려는 듯했던 공작은 그가 속삭인 말을 듣고서 안색이 달라졌다.

그의 시선이 순식간에 4구역의 호수를 넘어 멀리 아른아른 보이는 1구역의 황궁 쪽으로 향했다.

“키올레. 아무래도 오늘은 너와 산책할 때가 아닌 듯싶구나.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듣도록 하고 당장 함께 가야겠다.”

“예? 어디로요?”

키올레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눈꺼풀을 떨며 어리벙벙하게 물었다. 디아카 공작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붙잡혀 있는 현자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게 센 눈썹 사이로 불쾌한 주름이 잡혔다.

눈과 입을 막힌 현자는 뭔가를 예감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자신의 치료사들을 급히 찾으신다는군. 그자의 조사는 뒤로 미루는 게 좋겠네.”

통보와도 같은 한마디가 마병단원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에버는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엘레는 그때 느꼈던 불길한 예감의 원인이 그것이었던 듯하다 느꼈다고 합니다. 이후 저희는 이미 붙잡은 자를 넘길 수 없다고 항의하였으나, 디아카 공작 측은 황족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는 규범과 사고가 일어났을 때 붙잡은 현자의 다른 동료들을 먼저 조사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하며 거부하였습니다.’

디아카 공작은 현자가 그 사건의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지 않은 점, 본인 또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함께 들어 단원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끝까지 항의하려 한 핀에게는 기사들이 포박을 위해 검을 들이대기까지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핀이 그런 공격 따위에 겁을 먹을 이는 아니지만, 그건 그 자체로 디아카 공작의 확실한 의지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

현자가 각성자이기에 마병단이 우선 조사할 권한이 있다는 말 따위는 디아카 공작이 지닌 힘 앞에서는 고려할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마병단원들이 여기서 디아카 공작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모두 황가의 규범을 어기고 황족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고발하는 쪽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단원들은 결국 디에먼과 현자를 제외한 나머지 3인만 체포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이후 광휘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 황제 폐하의 말씀이 없어 저희 쪽에서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칸나와 다른 이들의 조사를 통해 오늘 새벽 몰래 디아카 저에 방문했다가 빠져나가는 짐마차 두 대의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한 대는 2구역 너머로, 다른 한 대는 수도를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됩니다.’

한 대는 2구역 안, 한 대는 수도를 빠져나갔다. 현자가 황궁 안으로 도로 들어갔거나, 혹은 수도를 빠져나갔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좀 더 신중하게 준비하고 대응했어야 했습니다. 질책받아 마땅한 일이니 부디 너그럽게 보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부단장으로서 마지막까지 임무를 책임지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이번에 붙잡은 세 사람을 조사하고 현자의 거취가 확실해지는 대로 재차 보고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에버와 마병단원들이 이 일을 얼마나 분하게 여겼으며 깊이 자책하고 있는지 그 짧은 문장 속에서 모조리 느껴졌다.

유더가 다시 한번 훑은 서신에서 시선을 떼자 키시아르가 그것을 접어 책상 위에 올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에버는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경우 질책받지 않는 쪽을 오히려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단장님이 그리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이전 일보다 더 힘든 일을 맡기고 벌이라고 하시는 쪽을 추천드립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어려운 훈련이나 눈물이 나도록 욕을 먹는 쪽을 벌이라 여기겠지만 에버는 그쪽으론 통하지 않는 편이니까요.”

유더의 답을 들은 키시아르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에버 벡을 다른 이들보다 잘 알고 친밀히 여기는 면모가 있는 것 같군. 혹 이전 게임에서 그리한 적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키시아르에게 이전의 마병단에 대해 크게 자세히 말한 적은 아직 없었던가? 있었던 일과 일어날 일을 간략히 말하긴 했으나 거기까지는 불필요하게 자세해지는 이야기라 판단해 말하지 않았었던 기억이 났다.

유더는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버는 이전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신과 부단장을 맡아 주었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확실히 익숙한 편입니다. 친밀하다고 말하기는 무엇합니다만…….”

“그리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는데도 친밀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렇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에버가 어떤 임무를 언제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평범한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함께 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똑같은 마병단 초기 단원으로 입단했음에도 끝까지 서로를 향한 직위 호칭과 거리를 둔 말투를 칼같이 유지했다. 에버의 탁월한 능력이야 믿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 누구와 결혼했는지 같은 건 그때의 유더가 알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걸 친하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아무튼 그렇다 해도 나름대로 얼굴을 보고 지낸 세월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단원들보다는 에버가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더 확실하게 보이는 편입니다.”

유더의 설명에 키시아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유더가 무어라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그는 긴 한숨 같은 웃음과 함께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면… 지금은?”

“…….”

“혹 지금도 그리 생각하나?”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예전에 내린 지 오래였다. 유더는 과거의 후회를 담아 쓴맛이 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은 에버와 상당히 친밀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버 쪽에서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내가 보기에도 에버 또한 너를 몹시 친밀하게 여기고 있거든. 아니라고 말했다면 슬퍼했을 거야.”

키시아르가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싶긴 한데, 어쩐지 약간 낯부끄럽긴 했다. 유더는 머릿속을 맴도는 이전 생의 에버를 떠올리며 이전부터 수없이 했던 생각 하나를 툭 입 밖에 내뱉었다.

“그건 이전 게임이 끝나 간다는 걸 알았을 때… 제가 가장 잘못 생각했다고 여겼던 점 중 하나였습니다.”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말인가?”

“예.”

주변을 믿지 않았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늘 날카로웠으며,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했다. 다른 모든 패를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패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

그러니 패배하는 게 당연했다.

유더는 거기까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앉아 제가 한 말을 곱씹으며 속상해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답신은 어떻게 보내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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