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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44화 (744/805)
  • 744화

    귀족들은 프루엘레의 말을 듣고서야 디아카 공작의 앞에 무릎을 꿇은 현자 외에도 에버가 때려눕힌 남자의 정체를 새삼스레 의식했다.

    “저자들이… 얼마 전 폭발 사고를 일으킨 범인이라고?”

    에버의 발아래 아직 밟혀 있는 디에먼이야 남국인 혼혈 같은 불그스름한 피부에 인상도 그리 좋지 않으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교양 있고 따스한 인상을 지닌 현자는 전혀 그런 사고를 일으킬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현자는 귀족인 렌보우 자작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타인 공작이 될 뻔했던 프루엘레가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신분이 발언의 신빙성을 단숨에 높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실보다는 보이는 것과 말하는 이의 신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슬쩍 변하려던 찰나, 디아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저자들을 데려가는 일을 왜 나에게 묻는가?”

    “기절해 계신 렌보우 자작을 포함하여 여기 있는 범인 모두가 디아카 공작 전하를 뵈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니었을까요? 먼저 대화를 하고 계셨던 듯하니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판단했을 뿐인데 실례를 범하였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아들과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 누군가와 약속한 바가 없네. 렌보우 자작과 이들이 가던 길을 가로막은 연유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런 무례한 일이. 몹시 불쾌하셨겠습니다. 그러면 공작님께서는 저들을 오늘 처음 만나신 것입니까?”

    프루엘레의 해맑은 질문에 디아카 공작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프루엘레를 바라보는 시선이 스르르 가늘어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현자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서 입을 열었다.

    “글쎄…. 워낙 많은 이들을 만나다 보니 누구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따윌 일일이 기억하진 않네. 내가 나를 만나려 하는 모든 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일순 현자의 어깨가 굳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디아카 공작을 불렀다.

    “디아카 공작 전…….”

    “말하던 도중 끼어들어도 좋다 허락한 적이 없는데, 누가 나를 부르려 하는가?”

    키올레가 닥치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디아카 공작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언성을 높이지 않고서도 듣는 이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목소리에 현자의 낯빛이 변했다.

    키올레의 난리 법석보다도 빠르고 효과적으로 현자를 닥치게 만든 디아카 공작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프루엘레에게 말했다.

    “시끄러운 일이 길어지는 건 질색이네. 할 말이 있다면 어서 하게.”

    “알겠습니다. 물론 공사가 다망하시니 그러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드는군요.”

    “무엇이 말이지?”

    프루엘레는 얼어붙어 있는 현자를 흘긋 본 뒤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가 범인들을 뒤쫓으며 파악한 바로 저자들은 광휘궁에 출입이 허가된 치료사라는 신분으로 황궁에 여러 번 드나들었다던데… 그런데도 디아카 공작 전하께서 저들을 기억하지 못하실 정도라니, 이상한 상황이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

    “아. 얼마 전 낙향하신 뒤르망 남작님과 렌보우 자작님이 신분 보증인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도 출입 기록을 통하여 이미 확인하였으니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치 않으셔도 됩니다.”

    뒤에 칼을 숨긴 귀족 간의 발언을 잘 모르는 에버는 그때의 발언들을 그저 들은 대로만 적어 두었다. 하지만 그것을 읽고 있는 유더와 키시아르에게는 그 이면이 훤히 보였기에 당시의 위험천만한 상황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요약하자면 프루엘레는 우선 디아카 공작에게 폭발 사고의 범인들과 관련이 있느냐고 돌려 물었다. 디아카 공작은 당연히 연관이 없다 말하며 넘어가기 위해 현자와의 관계를 가볍게 부정했고, 그러자마자 프루엘레가 현자의 정체를 입에 올리며 디아카 공작의 모순과 거짓을 단번에 찔러 드러내 버린 것이다.

    디아카 공작 측에서는 마병단이 현자의 정체를 모를 거라 믿었을 테니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무엇이든 확실하지 않은 대답을 내놓으며 자신과는 관계없는 척을 일삼는 그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몰아간 프루엘레의 말재간이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디아카 공작도 노회한 너구리답게 한 번의 공격 따위에 바로 당혹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수도 내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의 범인들이 사실 황태자의 치료사였다는 충격적인 폭로에 웅성대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지, 모른다 말하지는 않았네. 그리 말하니 조금 기억이 날 듯도 하군. 얼마 전 뒤르망 남작이 황태자 전하께서 부상 이후 기력이 조금 쇠하신 듯하다며, 충신 된 마음으로 솜씨 좋은 치료사들을 보내 드리고 싶다 말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신을 믿는 입장에서 그 일이 어찌 달가울 수 있었겠는가? 출입을 허가해 주기는 했으나 내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네. 뒤르망이 얼마 전 낙향하면서 그 일을 평소 친분이 있던 렌보우 자작에게 넘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지.”

    그렇게 말한 뒤 디아카 공작은 아직도 기절해 있는 렌보우 자작을 짐짓 안타까운 듯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치료사라더니, 사실은 각성자에 수도의 치안을 어지럽힐 뻔한 사건의 범인이라……. 정말이라면 몹시 안타까운 일이겠군.”

    그 말대로 디아카 공작은 현자를 처음 보느냐는 질문에 본 적이 없다는 확답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만난 이들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있느냐고 오만하게 반문했을 뿐이었다.

    디아카 공작이 황태자궁에 드나드는 치료사씩이나 되는 이에게서 신경을 끄고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모두 알지만, 일단 모순되지는 않는 설명이라는 게 중요한 법이었다. 귀족들은 디아카 공작의 태연한 모른 척 앞에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이자들을 데려가도 괜찮으시다는 말씀이겠군요.”

    “그러니까, 애초에 그것을 왜 나에게 묻느냐고 물었네. 범인이 맞다면야 알아서 데려가면 될 일이 아닌가? 마병단이 이번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운 좋게도 근처에 있어 피해 없이 마무리했다더니, 실은 놓친 자들이 태연히 수도 내를 걸어 다니도록 만들고 있었다는 게 알려질까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네만…… 자네들의 단장은 디아카가 아니라 펠레타 공작 아닌가. 허허.”

    디아카 공작이 농을 치는 듯한 말투로 혀에 심은 칼을 휘둘렀다.

    그는 마병단이 ‘운 좋게도’ 이번 사건의 근처에 있었다는 점을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여기게끔 미묘하게 강조하면서 도리어 키시아르와 프루엘레를 공격해 웃음거리로 만드는 화법을 사용했다. 현자와 자신의 연관 관계를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대신 상대 쪽으로 초점을 옮겨 버리는 말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프루엘레조차 답할 말을 잃었다.

    ‘음흉하기로는 따라갈 자가 없다더니……. 너구리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군. 그래도 말려들지 말자. 일단 현자와의 연관 고리를 부정한 이상 데려가기만 하면 목표는 달성이니까.’

    현자가 치료사란 신분으로 황태자궁에 있었다는 게 밝혀진 이상, 그보다 더한 연결고리도 있을 거란 사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분명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데려가지 못하도록 막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디아카 공작이 하는 말을 보니 진짜로 그냥 모른 척하고 데려가도록 놔둘 모양인 듯했다.

    ‘이유는 하나겠지. 마병단에서 현자를 조사해 어떤 결과가 드러나도 발뺌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니까.’

    실제로 그 발뺌 능력을 이미 간략하게 눈앞에서 보여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이 작당질을 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코앞에 들이대도 저 늙은 너구리라면 분명 웃으며 다른 자들을 대신 밀어 넣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리라.

    마치 저번 파티에서 유더에게 독주를 선물했던 뒤르망 남작을 가차 없이 내몰고 사라졌듯이 말이다.

    프루엘레가 그 사실을 짐작했으리란 점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 뻔한 자의 이러한 태도는 마병단에 대한 더없이 완벽한 무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보다 확실하게 마병단이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짓이 또 있겠는가?

    프루엘레는 울컥 치솟은 심화를 드러내지 않도록 삼킨 뒤 매끄럽게 웃었다.

    “하하, 운처럼 보이는 일도 실은 필연이 열 개가 필요하다 하지 않습니까? 마병단은 언제나 제국과 수도의 치안을 위하여 헌신할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부디 기억해 주시기를.”

    프루엘레는 고개를 숙여 디아카 공작에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분하지만 당장 저 괴물 같은 노인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더 이겨 먹겠다고 나서느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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