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43화 (743/805)

743화

“저, 아지헨 툼이 디아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순례자의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현자였다.

모두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지 못한 이유는 가지각색으로 달랐으나 놀라고 있다는 사실만은 같았다.

상대가 디아카 공작의 앞에 결국 직접적으로 나서 버린 이상 여기서 바로 움직일 수는 없다. 에버와 프루엘레,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물레방아 뒤편에 몸을 숨긴 단원들의 시선이 긴장감 속에서 짧게 교차했다.

현자가 고개를 들어 공손히, 그러면서도 초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처럼 휴식을 취하시는 때에 주변이 소란스러워 얼마나 근심이 크셨겠습니까. 하지만 오직 진실만을 관장하시는 신의 이름 앞에 진실로 말하건대, 오늘 일어난 이 모든 일은 이 사람과 가엾은 제국의 백성들 탓이 아닙니다. 자비로우신 공작 전하. 부디 이야기를 들어 주실 수 있으실지요?”

“…와, 세뇌 능력자라더니 혓바닥이 장난 아니게 기네. 혓바닥으로 아주 그냥 리본도 묶고 줄넘기도 하겠어?”

물레방아 뒤에 숨어 있던 핀이 어이없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작게 비아냥댔다. 레블린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상태였으나 핀의 말을 듣고는 터질 뻔한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년들이 나누는 말을 듣지 못했을 현자는 디아카 공작이 답을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인자하고 진실된 인상을 지닌 현자와 방금 사람과 나무를 사이좋게 때려 부수며 등장한 에버를 번갈아 바라보며 제각기 수군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여자가 손을 휘둘러 나무를 부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무서운 일이. 절대 보통 사람일 리가 없어요. 각성자가 분명해!”

“수도 내의 각성자라니… 마병단일까요?”

에버는 단복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마병단이 맞다면 맞는 대로, 아니라면 아닌 대로 각성자가 4구역 내에서 폭력을 저지르고 나무를 부수었으니 마병단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떠들기 시작했다.

디아카 공작은 디아카 공작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키올레의 뒤에서 지그시 현자와 주변을 훑어보았다. 노회한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눈치가 빠른 프루엘레조차도 그랬다.

에버에게 쏟아지는 적대적이고도 꺼리는 시선을 본 프루엘레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에버는 누가 뭐라 하든 그저 무표정을 지키고 있었으나 바라보는 프루엘레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쓰레기 같은 짓을 하겠다고 예고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안타까움과 분노 앞에서는 변신 상태를 지키는 것조차 힘들 만큼 화가 났다.

그는 어서 뒤로 빠져 본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는 판단하에 조심스럽게 몸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프루엘레가 움직이기도 전, 누군가가 그를 스쳐 지나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곧이어 노호와 같은 분노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감히 헛소리하지 마라!”

“……응?”

“어?”

“…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소리를 지른 이는 다름 아닌 키올레 다 디아카였다.

수군대던 귀족들이 너무 놀라 얼빠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깜짝 놀란 건 근처에서 지켜보던 마병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게 드디어 미쳤나?”

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관자놀이 근처에 손가락을 돌려 미친 게 아니느냐는 뜻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레블린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당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현자 또한 놀랐는지 드물게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재차 입을 열었다.

“……디아카 경? 혹시 그 말씀은 누구에게…….”

“닥쳐라, 이 사특한 놈! 나를 얼마나 안다고 감히 이름을 불러! 나타나자마자 헛소리를 연발하며 주변의 분위기를 흐리는 것을 그러면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현자가 말을 전부 끝내기도 전에 키올레가 가차 없이 말허리를 잘랐다.

“저는 디아카 경이 아니라 그저 디아카 공작 전하께…….”

“닥쳐! 그 입으로 아버지와 내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 했을 텐데!”

키올레가 발작적으로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거의 현자의 목소리를 아버지가 듣지 못하도록 하려는 장난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저, 디…….”

“아버지! 아무래도 오늘은 휴식을 취하실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상한 자들이 줄줄이 출현하는 걸 굳이 상대해 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서 돌아가시죠!”

“디…….”

“으아아아!”

대체 키올레 다 디아카는 뭘 어쩌려는 걸까. 의심에 미친 게 아닌가 싶은 모습인데 한편으로는 아까 정말로 이상해졌던 렌보우 자작이 떠올라 그 태도가 마냥 괴상하다고만 보기가 영 힘들었다.

키올레는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주변 귀족들에게 소리를 친 게 아니라는 건 판명되었으나 귀족들은 찔끔한 마음에 도로 입을 다물고 그저 조용히 눈만 굴렸다. 프루엘레 또한 남의 시선을 잘도 끌어 준 키올레 덕분에 조용히 물러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작자군. 무얼 의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나 레블린과 비슷한 자일지도 몰라. 앞으로는 정말 사람을 소문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겠어.’

디아카 공작은 현자가 입을 열려고만 하면 감히 사특한 기운을 띤 눈을 들지 말라느니, 입을 닥치라느니 하며 화를 내는 아들을 향해 어이없음을 감춘 얼굴로 입을 열었다.

“…키올레.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이상한 일이 일어난 상황에서 그에 대해 고할 바가 있다고 하는 자가 나타났다면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더군다나 마병단의 부단장이란 자가 단복도 입지 않고서 대낮에 사람을 상하게 하는 모습을 목격한 상황에선 더더욱 말이다.”

디아카 공작의 가느다랗게 내리뜬 시선이 에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얼마 전 파티에서 본 에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체를 들킨 건 에버건만, 정작 마병단이란 말에 낯빛이 창백해진 건 키올레 쪽이었다. 그는 몹시 큰 목소리로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 저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저자가 렌보우 자작보다 더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저자와 말을 섞으신다면 위험해지실 것만 같다는 확신도 듭니다! 그러니 절대 주변에 다가가지도, 말을 섞지도 마십시오! 아, 혹시 몸 상태가 벌써 이상해지신 건……!”

“키올레.”

이름 하나로 아들을 일단 조용히 만든 공작은 키올레의 씨근대는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렌보우 자작을 관찰할 때 뭔가를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렇지?”

키올레가 일순 눈가를 움찔 떨었다. 거만해 보이는 얼굴 덕에 다른 이들의 눈에는 무언가 깊은 심계가 존재하는 표정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제대로 눈치챈 이는 이곳에 없었다.

“이곳에서 이야기하지 못할 일이기에 그리 난동을 부리느냐?”

“그…… 그게.”

“디아카 공작 전하, 이런 곳에서 뵙게 되는군요.”

키올레가 간신히 입을 열려던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등장했다.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바로 몇 달 전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저건 분명 마병단에 들어갔다던 레블린 샨 아페토 3공자…….”

“앞에 선 빨간 머리도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누구였지?”

디아카 공작은 레블린이 아니라 맨 앞에 선 붉은 머리칼의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타인 1공자를 여기서 다 보는군.”

“하하, 예. 저도 이제는 어엿한 마병단의 정식 단원이 되었으니 못 올 곳을 온 건 아니지요.”

그 한마디로 인해 사람들은 사교계에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았던 타인 1공자가 눈앞의 청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레블린과 달리 프루엘레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건 아버지 타인 공작의 재판이 진행 중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레블린이 떠들썩한 사건을 일으키며 마병단의 임시 단원이 되었던 것과 달리 프루엘레는 니폴렌을 보호하고 가문의 이름에서 벗어나 살기 위해 비교적 조용히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열렸던 황궁에서의 파티 때 동생과 함께 참석하면서 정체가 조금 알려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는 이는 아직 많지 않았다.

‘아마 그것도 오늘 이후로는 끝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루엘레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는 인형처럼 예쁜 레블린에 비하면 평범한 인상임에도 무시하기 힘든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4구역에 있는 타인 가의 별장을 부단장님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방문하였는데, 감히 얼마 전 수도에서 폭발 사고를 일으킨 범인들이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수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잡아들여야 할 이들인지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혹 거기 무릎 꿇고 있는 이를 저희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똑같은 마병단인데도 4대 공작가의 자제라는 출신은 이런 곳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프루엘레는 그 효과를 지금 어느 때보다도 똑똑히, 그리고 지긋지긋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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