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화
긴장 속에서 프루엘레를 지켜보던 에버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건, 렌보우 자작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기 조금 전이었다.
“응? 니폴렌? 왜 그러니?”
에버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니폴렌이 갑자기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작은 코를 치켜들고서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새끼 고양이의 눈동자 속 동공이 빠르게 가늘어졌다 커지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기어코 입을 벌려 작게 울기까지 했다.
제 형의 질문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선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는 니폴렌이 스스로 입을 열다니. 혹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싶어 에버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니폴렌? 어엇……!”
에버가 막 작은 고양이를 다시 추슬러 안으려던 순간, 고양이가 그녀의 품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쑥 벗어나 훌쩍 뛰어내렸다. 서둘러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새끼 고양이는 예상치 못한 속도를 발휘해 에버의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나가 버렸다.
‘이런!’
비상사태다. 프루엘레가 당장 올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어딘가로 달려가는 고양이를 뒤쫓아 달리는 에버의 곁에서 갑자기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에버! 무슨 일이야?”
바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힌 엘더였다. 이제는 남매 중 한 사람만 있어도 타인을 순간 이동 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핀이 힌을 보낸 것이다.
에버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혹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키올레 다 디아카가 벌이는 흥미진진한 난동 쪽을 흘깃대느라 다른 곳에는 관심도 없었다. 몸집도 자그마한 힌이 갑자기 에버의 곁에 나타났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에버는 서둘러 상황을 알렸다.
“니폴렌이 갑자기 빠져나갔어요! 어서 찾아야 해요.”
“니폴렌이? 뭔가에 겁을 먹고 빠져나간 거야? 아니면?”
힌이 에버의 곁에서 함께 뛰면서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물었다.
“무서워하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딘가를 쳐다보다 갑자기 빠져나갔어요.”
“별일이네.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한 것 아냐?”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는데… 아, 저쪽으로 간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갔지?”
그렇지 않아도 작은 새끼 고양이가 풀숲 사이에 묻히기까지 하니 자취를 찾는 게 무척 힘들었다. 에버가 당혹하며 걸음을 멈출 뻔했던 순간, 갑자기 그들 사이에 드리워져 있던 나무 그림자 하나가 울렁이더니 사람 모양의 그림자로 불쑥 변화했다.
그림자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땅에 드리운 그대로 어느 방향을 향해 손을 뻗어 가리켰다. 힌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가케인의 분신이다!”
“저쪽인가 보네요. 가죠!”
에버는 가케인의 시기적절한 도움에 감사하며 그림자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재차 움직였다. 니폴렌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그늘진 호숫가 구석이었다.
“니폴렌!”
에버는 크게 안도하여 고양이를 안아 들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니폴렌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문 앞에 선 듯한 모습으로 큰 나무 앞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얼 보고 있는 걸까?
니폴렌이 에버를 돌아보며 꼬리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에버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왠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저거……. 왠지…….’
“여기,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아까 거기서 그렇게 멀진 않네? 저쪽에 디아카 가 바보도 보이잖아. 아무튼 니폴렌도 찾았으니 이제 얼른 돌아가면 되겠다!”
“잠깐만요, 힌.”
“응?”
“니폴렌의 두 번째 힘. 뭔지 기억하죠?”
“저 모습으로 변하는 거 말고 말야? 당연히 알지, 그럼.”
니폴렌은 어린 시절 키웠던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지만 그게 지닌 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저 작은 소년은 각성자와 각성자가 아닌 사람을 귀신같이 잘 구분하는 또 다른 능력도 하나 지니고 있었다.
그 두 번째 능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각성자인 마병단에서 그다지 두각을 드러낼 일이 없었지만 가끔 방문하는 비각성자 손님이나 마법사들이 올 때면 분명하게 티가 나곤 했다.
하지만 모든 각성자가 그러하듯, 니폴렌의 능력 또한 마병단에서 계속 지내는 동안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에버는 얼마 전 몹시 기분 좋은 얼굴로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던 프루엘레를 떠올렸다.
‘니피의 능력이 아무래도 그냥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구별하고 각성자를 편하게 여기는 정도만이 아닌 것 같아요. 최근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도 발동되면 알아차리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대단하죠?’
들어 보니 함께 있던 중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깜짝 놀랐는데, 찾아내고 보니 칸나가 능력을 쓰고 있는 방 앞에 엎드려 뭔가를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고 했다.
니폴렌과 의견을 제대로 나누기 힘드니 어디까지 감지가 가능한 건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지만, 프루엘레는 그것이 긍정적인 발전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감각이 예민했던 아이예요. 그 능력 덕에 감각 인식에 좀 더 익숙해질 수 있다면 고양이 모습이 아니라도 좀 더 편히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에버는 신중하게 니폴렌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니폴렌. 거기… 뭔가 있니?”
“…에버. 혹시 니폴렌이 그 두 번째 힘 때문에 여기로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확실히는 몰라요. 하지만 저번에 엘레에게 들은 게 있어서요.”
“흐응…….”
그 말에 힌의 눈빛도 슬며시 변했다.
두 사람의 시선 속에서 꼬리를 이리저리 느리게 움직이고 있던 니폴렌이 잠시 후 에버를 돌아보고는 입을 벌렸다.
야옹이라기보다는 삐익대는 소리에 가까운 작은 울음.
니폴렌이 뒷다리에 힘을 주며 벌떡 일어나 앞을 긁으려 함과 동시에, 에버의 손길과 순식간에 울룩불룩 자라난 힌의 주먹이 고양이 앞의 큰 나무를 향해 쇄도했다.
만약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저 나무 하나가 부서지고 끝날 일격.
그러나 공격이 닿기 직전, 에버는 나무를 둘러싼 주변 일대가 일제히 파르르 떨리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 쿵……!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손에 닿은 허공에서 두꺼운 벽이 깨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방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누군가가 경악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람을 보호하듯 서 있는 세 사람.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가장 뒤에 물러나 있는 순례자 로브 차림의 중년 사내.
‘…찾았네. 여기였구나.’
프루엘레의 말이 옳았다. 그들이 줄곧 찾지 못했던 것을 저 작은 니폴렌은 너무나 쉽게 찾아 주었다.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지만 그 또한 분명히 마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는 없으리라.
공격이 직격하기 직전 훌쩍 피해 근처의 나무 위로 도망친 니폴렌을 확인한 에버는 짜릿하고도 사나운 감각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이 현자라 불리는 사람과 그 일행이지요? 계속 찾았는데 드디어 만나 기쁘네요.”
“설마… 마병단?”
“그래요. 지난번엔 우리 단원들의 눈을 피해 잘도 도망친 모양이지만 오늘은 그렇게 안 될 겁니다. 당신들의 죄와 그 정황은 이미 알고 있으니 얌전히 따라와 주시죠.”
“현자님! 어서 피하십시오!”
물론 얌전히 따라와 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나그란의 별의 일원이 뒤를 돌아보며 거칠게 외친 뒤 에버에게 힘껏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알 수 없는 힘이 순식간에 그와 에버를 감싸며 반원 모양의 공간을 이루었다.
에버는 사내의 공격을 피하면서 반원 모양의 공간을 두드렸으나 마치 단단한 벽에 갇힌 것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까 나무 주변을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보호막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공간을 만들어 뭔가를 가두고 감추는 게 저 사람의 능력인 듯했다.
‘이런. 조금 귀찮은 능력이네.’
“일단 한 놈 가뒀으니, 이 틈에 어서 빠져나가세요! 이 계집은 제가 맡겠습니다! 남은 건 꼬맹이 하나뿐이니……!”
열심히 소리치던 남자가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무언가를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으응~ 그래. 꼬맹이 하나뿐이지. 그런데 내가 그냥 꼬맹이는 아닌데, 어떡하지?”
얼굴 외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우락부락하게 부풀린 힌이 즐겁게 웃었다. 맹수 같은 눈동자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기괴하고도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이들이 숨을 삼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에버는 힌에게 명했다.
“힌! 제가 여길 깨고 나가는 동안 저쪽을 부탁할게요!”
“응!”
에버는 손가락에 힘을 집중하며 자세를 잡았다. 얇은 보호막처럼 장갑 위를 감싼 힘은 마치 단단한 금속처럼 모든 것을 막아 내고 찌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작 여자 한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았다가는 그 손가락 끝에 맺힌 무시무시한 힘 앞에서 대응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압당할 것이다.
‘나도 괜히 부단장에 임명된 건 아니니까 말이야.’
같은 각성자라면 겉만 보고 상대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간만에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머저리를 만나니 전의가 솟았다.
에버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 발을 쿵 내딛고, 뒤를 이어 손을 내뻗었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 내려던 남자는 부딪친 순간 소리도 없이 조각조각 금이 가는 검날, 그리고 그 너머를 뚫고 코앞까지 다가오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며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사람의 몸이 서로 맞부딪치며 생성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였다.
에버가 벽을 깨고 나오기까지는 그로부터 정확히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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