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40화 (740/805)

740화

“키올레. 네 녀석이 기어이…….”

“키올레 경. 이 무슨……! 황궁기사단의 기사가 어찌 기사도 아닌 제게 결투를 신청하려 하신단 말입니까!”

“그래요? 그럼 빨리 말해 보시라고요. 광휘궁에서 도망쳐 돌아오지 않는 놈들과 그토록 친한 분께서 마치 노린 것처럼 이런 때에 나타난 진짜 속셈이 뭔지!”

“진짜 속셈 따윈 없다고 제가 아까부터……!”

어이없음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범벅이 된 렌보우 자작의 외침에 키올레가 으르렁대며 고개를 돌려 프루엘레 곁의 하인을 지목했다.

“거기 너! 내가 아까 맡겼던 검, 어디 있어? 어서 가져와라! 저 거짓말쟁이에게서 내가 아버지를 지킬 것이다!”

“도련님.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정말로 결투를 신청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검은 절대 가져다 드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고작 디아카 공작 전하와의 대화 한 번을 부탁드렸을 뿐인데 지나친 대응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야말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러나 프루엘레는 냉정하게 그 모든 모습을 관찰하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 키올레 다 디아카는 결투를 할 생각이라기보단… 그냥 시비를 걸어 렌보우 자작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결투를 신청할 거라면 저렇게 길게 난동을 피울 필요 없이 깔끔하게 무기 두 개를 스스로 가져온 다음 큰 소리로 확실하게 ‘당신에게 신과 검의 눈 아래 거짓 없는 결투를 신청한다’고 외치고 동의를 받아 내면 될 일이다.

귀족끼리의 결투에는 보통 공정을 기하기 위해 참관인 3명 정도를 두는 편인데 진짜로 하겠다면야 얼마든지 지나가는 다른 귀족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키올레는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라는 말 이후엔 그저 ‘그러니까 그게 싫으면 빨리 대답해라’느니, ‘내 검을 가져와라’ 등의 소리만 치고 난동을 부릴 뿐 결투에 필요한 진짜 작업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할 거라고 을러 대는 말과 진짜로 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프루엘레는 어쩐지 키올레가 그 차이를 분명히 알고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생각 없이 난동을 피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방금까지 프루엘레는 키올레를 ‘재능도 없는 주제에 기사 놀이에 심취한 무능력하고 건방진 디아카 가의 막내’라는 대외적 소문 그대로의 인물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키올레보다 더한 평을 받으면서도 사실은 누구보다 치밀하고 인내심 있게 힘을 숨길 줄 아는 키시아르 라 오르 펠레타 공작 같은 이도 있는 법이다.

‘아까 광휘궁을 운운하던 그 말도 왠지 심상치 않았어. 키올레는 황태자의 호위기사인데도 현자 측을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흠. 가문에 휩쓸리지 않고 그런 결론을 내린 인물이라면 상당한데. 심지어 소문과 달리 입도 그리 거칠지 않아.’

키시아르를 먼저 만나 편견을 완전히 깨 버린 탓에 프루엘레는 키올레를 아주 만만히 볼 수만은 없겠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키올레가 왜 성질대로 분명하게 결투 신청을 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상대를 향한 욕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지 이유를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키올레가 다시 한번 큰 소리를 냈다.

“그래. 더 솔직히 말하도록 해 볼까! 렌보우 자작!”

렌보우 자작이 기세에 놀라 움찔한 사이, 키올레가 거침없이 말을 쏟아부었다.

“자작과 광휘궁의 불민한 평민들이 작당을 하듯 모여 있는 광경을 대체 몇 번이나 보았는지 압니까?”

“뭐, 뭣?”

“자작이 마치 그 평민들의 부하라도 된 듯 여러 번 외부를 다녀오며 도움을 주고 있었단 사실도 압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지도 않고서 몰래 궁에 들어와 만나고 가는 걸 그간 센 횟수만 여섯 번! 심지어 그놈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궁에 한 번 왔다 가지 않았었습니까? 그것도 제가 근무하지 않는 시간을 노려서!”

“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언제……!”

“이렇게 하인조차 데리고 오지 않고서 혼자 돌아다니다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노린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언제 본저에서 나와 혼자 되는 시간을 가질지 알아본 것 아니냔 말입니다!”

그야말로 의심병 말기라 할 만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렌보우 자작은 그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이전처럼 기세 좋게 억울해하지도 못하고 눈을 토끼처럼 뜬 사내가 순간적으로 눈을 어디론가로 굴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몹시 짧은 반응이었으나 그를 주시하고 있던 프루엘레는 그 광경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디아카 공작 또한 아들의 난동에 골치 아파하던 모습은 간곳없이 일순 눈을 가늘게 뜨고 얇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눈빛은 이제 명백히 렌보우 자작을 관찰하는 맹수의 눈으로 변화한 상태였다.

“……흐음.”

우습지만 그 상황에서 렌보우 자작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건 한창 열을 내고 있던 키올레뿐이었다.

“이런데도 자신이 수상하지 않다고 말할 셈입니까? 이 키올레 다 디아카가! 무려 직접! 관찰한! 일인데 틀렸다고 말할 셈이라면 해 보시지! 당신이 신의를 저버리고 평민들의 부하가 된 게 아니라고 말해 보라고!”

키올레가 가슴을 활짝 펴고 외쳤다. 얼마나 열을 냈는지 이마에 땀까지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렌보우 자작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입을 벙긋거리다 숨을 헐떡거렸다. 사람들은 그가 키올레의 엄청난 모욕에 충격을 크게 받아 이제 할 말마저 잃은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무어라 말할 것처럼 계속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하던 렌보우 자작이 별안간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크게 비틀거렸다.

“끄, 끄윽!”

“렌보우 자작님?!”

디아카 가의 하인이 당황하여 외쳤다. 하지만 렌보우 자작은 그 말을 들을 정신도 없이 허리를 꺾고 고꾸라져 땅에 쓰러졌다.

“자작님이 쓰러지셨다!”

“다, 당황하지 마! 여, 연기일 수도 있다! 철저히 확인해!”

당황하지 말라면서 누구보다 당황한 키올레가 볼썽사납게 말을 더듬었다. 프루엘레는 슬쩍 하인들의 틈에 섞여 쓰러진 렌보우 자작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고통에 경련하면서 고장 난 물건처럼 어떤 말만 반복하여 중얼대고 있었다.

“나, 나는. 혀, 현자님을……. 현자님이 내게 부탁을…….”

“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자작님!”

하인들이 그의 몸을 흔들자 렌보우 자작이 눈을 흐릿하게 떴다. 그는 자신을 멀찍이서 내려다보는 디아카 공작을 향해 몹시 간절하게 입을 열어 애원했다. 뭔가에 홀린 듯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눈이 모두를 일순 오싹하게 만들었다.

“혀, 현자, 현자님을 만나, 만나 주십시오, 공작 전하. 그분은… 오직 공작 전하의 도움만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직 공작 전하를 위해……. 아니, 황태자 전하를……. 아니…….”

“봐, 봐라! 저 이상한 말과 태도! 지금 렌보우 자작의 상태는 보통이 아니야! 내가 수상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키올레가 쭈뼛거리면서도 외치자 드디어 막내 도련님의 의심병이 아주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하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지금의 렌보우 자작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경련을 하면서도 디아카 공작을 바라보는 목과 눈만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저주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임무 전 현자와 그 일행의 능력에 대해 이미 전달받은 바 있던 프루엘레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현자는 세뇌 능력자라고 했었지. 저게 바로 세뇌 능력의 효과인 건가.’

방금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범해 보였던 렌보우 자작이 왜 갑자기 뭔가에 혼동을 일으킨 듯 쓰러져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세뇌당한 상태이며, 현재 어떤 이유로 그에게 씌워진 능력의 힘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냉정히, 그리고 조용히 렌보우 자작을 내려다보던 디아카 공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군 렌보우 자작. 분명 내가 처음에 자네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리 예의를 모르는 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을 높이 사고 있었는데… 대체 무엇이 자네를 이리 만들었을까?”

“아니, 아니…… 저, 저, 저는. 저는…… 끄으으윽!”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나무가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악!”

모두가 그곳을 향하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갑을 낀 손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한 여자가 그녀를 피하여 몸을 굴리는 이를 향해 거침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프루엘레는 그녀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았다.

‘에버 부단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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