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화
“-부단장님? 갑자기 어디로 가셨어요? 위험한 건 아니시죠?”
그들에게 답을 하려면 물레방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야 한다. 에버는 니폴렌을 안고서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눈을 도록도록 굴리고 있던 세 사람이 에버를 발견했다. 에버는 고양이를 안고서 주인을 기다리는 호위처럼 서성거리며 한 손을 아래로 내려 짧은 수신호를 두 번 보냈다.
그 의미는 간결했다.
‘현 상황에 문제없음.’
‘시선을 목표에서 떼지 않고 대기.’
두 신호를 합치면 프루엘레 없이 에버만 있는 현 상황은 걱정할 요소가 아니라 의도된 바라는 뜻이 된다. 다행히 총명한 세 사람은 그 의미를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레블린이 답을 해 왔다.
“-엘레 형이 세 번째 변신을 한 거군요? 알겠습니다. 대기할게요.”
제 친형제들에게도 형이라고 친근하게 부른 적이 없던 소년은 피도 섞이지 않은 프루엘레를 상대로는 아무렇지 않게 그 호칭을 사용했다.
똑같은 공작가 자제 출신에 부모를 등지고 들어왔다는 배경까지 비슷한 이상 안 친해지기가 더 어려울 관계. 하지만 프루엘레 쪽에서 처음 마병단에 협력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레블린이란 점이 그들의 친분에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친분 그 이상으로 나아가 서로를 새로 생긴 형제처럼 여기고 이렇다 할 말 없이도 서로의 행동 패턴을 정확히 읽어 내는 그들의 모습이 에버는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한편, 기사로 변신한 프루엘레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광경을 눈앞에서 관람하는 중이었다.
“이보시오, 키올레 경. 제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접니다, 저. 바로 며칠 전에도 얼굴을 본 렌보우 자작입니다! 공작님과 인사조차 못 할 사이도 아닌데 지나가다 뵙고 인사를 드리러 온 게 그리 이상합니까?”
“자작님이 누구신지 제가 왜 알아야 합니까? 인사는 이미 진작에 했으면서 왜 자꾸 절 쫓아내고 아버지하고만 대화하겠다고 하시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답해 달라는 요구에 왜 자꾸 말을 돌리시죠?”
“아니 제가 언제 말을 돌렸습니까.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질 않습니까.”
렌보우 자작. 그리고 키올레 다 디아카.
두 사람은 프루엘레가 기사로 변신하여 다가가기도 전부터 계속 결론 없이 반복되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렌보우 자작이 4구역에서 산책 중이던 디아카 공작을 발견하고 인사를 왔다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있다며 키올레를 뒤로 물려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공작이 그 요청에 응답해 키올레를 물리거나, 아니면 거절하면서 상황이 빠르게 종결되었을 일.
그러나 디아카 공작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키올레가 별안간 의심의 눈을 번득이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면서 상황은 예상치 못한 장기전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건 프루엘레가 상황을 걱정하여 다가온 기사라고 착각한 하인이 지긋지긋하고도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알려 준 바였다.
‘아. 기사님. 걱정 마십시오. 그냥 막내 도련님께서 요즘 보이시던 그것이 다시 발동된 것뿐이니까요.’
‘……그거요?’
‘…주인님 주변의 모든 이가 흉수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시는 증세 말입니다.’
‘아…….’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보다 보니 그 하인의 말이 정확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키올레는 갑자기 연락도 없이 다가와 놓고 인사를 마친 뒤에도 끈질기게 공작을 보려 하는 렌보우 자작을 몹시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주인을 지키는 작은 개처럼 나서서 디아카 공작이 렌보우 자작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마치 디아카 공작이 렌보우 자작과 대화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공격이라도 당할까 의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크고 태도도 어린아이처럼 유치한지, 아버지를 생각해서 저런 행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하나도 감동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프루엘레가 보기에 사실 그건 디아카 공작도 마찬가지 심경인 듯했다.
“…키올레. 나도 물론 이 상황이 유쾌하지는 않다만, 자작과 이런 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리 품위 있는 행동 같지는 않구나.”
디아카 공작이 혀를 차며 그만하라는 말을 돌려 했다. 하지만 키올레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욱 대경실색하며 고개를 돌려 제 아버지를 살피며 난리를 부렸다.
“예?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아프시다거나……!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지는 않으시고요?!”
“그러니까 괜찮다고 몇 번을…….”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이 몹시 기특하다며 한동안 제 염려를 무시하지 않으실 것이라 약속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약속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오늘은 저하고만 호수를 걸으실 거라면서요!”
“키올레, 키올레……. 그 ‘한동안’ 이후 며칠이 지났는지 아느냐? 벌써 몇 주가 지났다.”
몇 주라면 누구라도 한동안이라는 말에 넘치고 남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 생각할 터다. 그러나 키올레는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입니다! 전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의심스럽습니다. 대체 저 없이 아버지에게만 드려야 한다는 말이 뭐란 말입니까. 대답하지 않으신다는 건 즉 분명 떳떳하지 못한 용건을 품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디아카 가의 자랑스러운 황궁기사단 소속 기사로서 절대 이런 위기에 손을 놓고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잠깐만요, 떳떳하지 못한 용건이라니요! 그 무례하고 비약적인 말씀은 도무지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군요!”
렌보우 자작이 지지 않고 황당해하며 소리를 쳤다. 프루엘레는 그의 황당함을 십분 이해했다.
‘인사를 해 놓고도 가지 않고 계속 디아카 공작과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건 역시 저자가 황제 폐하의 추측대로 도망친 현자를 비호해 주고 있기 때문일 터.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디아카 공작은 현자나 렌보우 자작 측과 언제든 손을 끊을 수 있도록 철저히 선을 두고 있었나 보군.’
디아카 공작 측에서 도망친 현자를 보호할 셈이었다면 진작 찾았을 것이다. 렌보우 자작과 현자는 디아카 공작의 권력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지만 디아카 공작 입장에서는 굳이 사고를 치고 도망 중인 놈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 줄 이유가 없으니 이렇듯 찾아온 게 분명했다.
‘멍청한 짓이야. 디아카 공작과 같은 이가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찾아온다고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은 극히 낮을 텐데…….’
오만하고 거만하며 가족을 포함한 아랫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발아래라 생각하는 도박광 타인 공작을 아버지로 둔 덕에 프루엘레는 그런 고위 귀족들의 마음을 몹시 잘 추측할 줄 알았다.
4대 공작가의 수장들은 단순한 가문의 수장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들은 천년의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 온 거대한 귀족 세력의 가장 꼭대기에 선 이들이었다. 누구의 눈치를 볼 이유도,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진심으로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하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약화된 황권에 마지막 한 방을 날리고 황태자 자리를 낚아채어 다음 시대의 승리자 자리를 차지한 디아카 공작이라면 그 오만함의 크기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파티에서 보았을 때도 느꼈었지. 밖에서는 잘 숨기는 듯 보여도 유더가 자극했을 때 드러난 태도의 일면은 내 아버지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것 같더군.’
하지만 그런 자가 제 막내아들의 막무가내 앞에서는 비록 짜증스러운 표정을 드러낸 상태라고는 하나 잠깐이나마 참아 주고 있다는 게 프루엘레는 오히려 조금 신기했다. 디아카 공작이 나이 들어 본 막내아들의 재능 없는 모습을 한심해하면서도 바라는 대로 기사단에 자리를 마련해 줄 정도로는 귀여워한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 듯했다.
“그럼 뭔데요.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인사를 핑계로 하려는 그 말이 대체 뭐냔 말입니다!”
“그걸 대체 제가 왜 키올레 경에게 말해야 합니까? 아, 물론 부자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게 된 건 정말 죄송합니다만…….”
“말하지 않는다면 의도를 의심하고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
“예? 결투라니요. 키올레 경? 진짜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그. 이전에 황태자 전하의 궁에서 절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 의도를 대체 왜 이리 의심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그러니까 더욱 의심스러운 거란 생각을 못 하는군! 에잇!”
키올레가 기어이 장갑을 벗어 던졌다.
“도련님……!”
주변을 지키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눈을 질끈 감았다. 디아카 공작 또한 머리를 짚었다.
“키올레. 네 녀석이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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