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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38화 (738/805)

738화

‘그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 두고 뭐라고 하는지나 알려 줘.’

유더와 키올레 다 디아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답신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에버는 키올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디아카 공작과 키올레의 근처에서 귀족다운 차림새를 갖춘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그들의 목표인 렌보우 자작이었다.

에버는 그들의 주변을 훑으며 엘더 남매와 레블린을 찾으려 했으나 세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 딱 붙어 속삭이는 듯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단장님. 저희는 그쪽이 아니라 반대쪽에 있어요. 물레방아가 있는 쪽이요.”

레블린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호숫가에서 이어진 산책로 곁에 붙은 자그마한 관상용 냇가와 그 옆에서 돌아가는 예쁜 물레방아가 보였다. 그 뒤편에서 세 명의 소년 소녀가 에버의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가는 도로 쏙 사라졌다.

에버는 안도감을 느끼며 프루엘레에게 말을 걸었다.

“세 사람은 저기 물레방아 쪽에 있었네요. 보이시나요?”

“아…… 네. 그런데 벡 님. 이젠 괜찮으니 절 좀 내려 주실 수 있으실지…….”

니폴렌을 안고 고개를 푹 숙인 프루엘레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에버는 그제야 아직도 프루엘레를 번쩍 안은 상태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앗. 죄송해요. 내려 드리는 걸 잊었네요. 불편하셨죠?”

“아뇨. 전혀요. 아니,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있어도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니었고 이제 내려 주셨으니 되었습니다. 네. 괜찮고말고요.”

귀부인의 말투가 아니라 프루엘레 본인의 본래 말투가 튀어나왔으나 다행히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땅에 내려선 프루엘레는 몇 번 긴 심호흡을 한 뒤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을 가장하며 에버에게 손짓을 했다.

“일단 저기 있는 벤치에 앉죠. 전 잠깐 현기증이 난 걸로 할 테니 벡 님은 양산을 꺼내 해를 가리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는 척하며 시선을 피하세요.”

“네.”

그들은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앉아 디아카 공작 측을 지켜보았다.

‘렌보우 자작이 디아카 공작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지만 디아카 공작 측은 그리 기꺼워 보이지 않네. 렌보우 자작이 분명 디아카 공작 측 귀족파라 들었는데… 지금 이건 이전에 이미 약속된 상황이 아니었단 걸까?’

무어라 말하는지 조금 더 잘 들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귓가에 시기적절하게 또다시 레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단장님. 저희 쪽에서는 저들의 목소리가 좀 더 잘 들려요. 아까부터 듣기로 디아카 공작 측에선 오늘 렌보우 자작과 여기서 마주칠 거라고 예상치 못한 것 같았어요. 디아카 공작이라면 그것조차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아닐 것 같아요.”

“왜죠?”

에버는 작게 중얼거렸다. 레블린이 듣지 못할 테니 답을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대답은 바로 옆에서 돌아왔다.

“디아카 공작과 키올레 경의 곁에 다른 귀족들이 없으니까요.”

“그건 아는데, 그것과 무슨 상관이죠? 오히려 사람의 눈을 피해 만날 약속을 잡았기에 측근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벡 님. 디아카 공작은 원한다면 그런 조심을 할 필요가 굳이 없는 사람이에요. 렌보우 자작을 만나려 했다면 이보다 편한 곳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굳이 4구역 외곽에, 장자도 아닌 아들 한 명만을 데리고 수행 인원을 최소화하여 나왔다는 건 정말 말 그대로 개인적인 휴식을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주변에 다른 귀족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을 보아서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음…….”

그러니까 즉, 귀족들의 상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의 눈을 피해 누굴 만나려는 목적이 있었다면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일 때를 택하지는 않았으리란 뜻이었다.

렌보우 자작이 계속해서 웃으며 말을 걸었으나 디아카 공작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는 몹시 차갑고 지루해 보이는 얼굴로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렌보우와 말을 더 잘 섞어 주는 건 아들인 키올레 쪽인 듯도 했다.

‘그렇다고 그리 호의적인 듯 보이진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것 같긴 한데…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네. 예상대로라면 이 근처에 현자 측 일행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들이 있다면 대체 어디 숨어 있을까?’

이대로 계속 레블린 측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올 목소리만 기다리는 건 능사가 아니다. 에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론을 내렸다.

‘의심을 받지 않을 곳에 숨어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는 움직이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적들의 동향을 더 자세히 파악해야 해.’

위험도를 지금보다 더 높이는 결론이다. 하지만 에버는 동료들과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파악하여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생각을 이런 상황에서 하진 못했을 텐데. 왠지 새삼 신기하구나.’

그간 마병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에버는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 사람을 책임지는 부단장의 위치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부담감이 오히려 좋기도 했다. 스스로도 몰랐던 적성이 몸 안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입단 초기 유더가 저 키올레 다 디아카를 상대로 나섰을 땐 내가 그런 날이 올지 궁금해했었는데… 이젠 대귀족을 앞에 두고도 하나도 무섭지가 않아.’

그녀는 슬며시 웃고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엘레. 변신을 한 번 더 하는 것, 혹시 가능할까요.”

프루엘레가 잠시 상태를 가늠해 보듯 눈을 감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디아카 공작 측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원하시는 거지요?”

“네. 위험하겠지만 그편이 최선 같아요.”

“괜찮아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제 능력이 거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말씀해 주신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정받은 기분이라 몹시 좋은데요.”

프루엘레가 주변을 한번 훑고는 씩 웃었다. 귀부인의 얼굴로 짓기에는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장소를 조금 옮겨야겠네요. 귀부인은 잠깐 호위를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까요.”

에버는 프루엘레와 함께 벤치에서 일어나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산책로로 들어섰다. 프루엘레는 커다란 나무 뒤로 들어갔다가, 몇 초 만에 건장한 남성 기사의 모습이 되어 빠져나왔다.

디아카 공작의 곁을 지키던 이들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아까 호숫가를 통제하고 있던 디아카 가의 기사 중 한 사람의 외견을 잠깐 빌렸어요. 공작 근처에는 없었던 걸로 보아 아마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겠죠. 처음 본 사람의 외형은 오래 유지하기 힘들지만 기사들은 계속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는 편이니 잠깐 가까이 다가가도 그리 의심받지 않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문제가 생기면 바로 도망쳐요. 제가 지켜보고 지원할게요.”

“든든하네요. 그러면 여기, 니피도 잠시 맡아 주시겠어요?”

에버는 프루엘레가 건넨 작은 고양이를 받아 안았다. 다행히 그간 안면을 익힌 덕인지, 니폴렌은 이런 상황에서도 에버의 품을 거부하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프루엘레가 태연한 걸음걸이로 디아카 공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에버는 긴장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프루엘레가 디아카 공작의 주변에 다가가자 뒤를 지키던 하인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뭔가를 묻는 듯한 태도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설마 벌써 정체를 들킨 걸까?

‘그렇다면…….’

에버는 언제든 뛰쳐나가 프루엘레를 낚아채고 힘을 쓸 수 있도록 준비했다. 하지만 잠시 후 프루엘레가 아무렇지 않게 하인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서 그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는 모습을 보고는 긴장했던 몸에서 느리게 힘을 풀었다. 프루엘레가 살며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흘렸다. 실로 대단한 담력이었다.

그때, 갑자기 본래 자리에서 이탈한 그들을 이상하게 여긴 듯 귓가에 레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단장님? 갑자기 어디로 가셨어요? 위험한 건 아니시죠?”

그들에게 답을 하려면 물레방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야 한다. 에버는 니폴렌을 안고서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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