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화
겉면을 확인한 키시아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본부에서 온 보고인가. 이건 바로 확인해 봐야겠는걸.”
키시아르는 보통 보고서를 먼저, 그리고 혼자 읽고 나서 다른 이에게 읽게 할지 말지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서신을 뜯기 전에 유더에게 손짓을 하여 가까이로 부른 다음에야 봉인을 뜯었다.
“제가 같이 봐도 되는 겁니까?”
“마병단에서 온 거라면 어차피 둘 다 봐야 할 물건이지. 따로 보는 것보다는 같이 보는 편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고개를 조금 더 가까이 기울이며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그걸 핑계로 조금 더 가까이 닿고 싶다는 건 내 작은 계략이고.”
순간 유더는 그와 닿아 있는 팔과 손을 이전과 다르게 의식했다. 그러자마자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입술 끝을 올린 사내가 유더의 어깨를 안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옆이마가 콩 맞닿았다.
“꼴이 그리 깨끗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는 건 매너가 없는 행동이겠지만… 씻고 나올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조금만 봐줘.”
키시아르 혼자 더러운 상태처럼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더럽기로 따지자면 흙바닥을 구른 유더가 더했다. 그런데도 그런 건 상관없는 듯 이야기하는 점이 과연 그답다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유더는 제가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여 덮어 두었던 욕심과 비슷한 생각을 키시아르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와 우스운 감정을 느꼈다. 다만 그와 다른 점이라면 키시아르는 욕심과 일, 둘 모두를 그럭저럭 만족시킬 방법을 찾아냈다는 점이었다.
유더는 끌어안긴 채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몸에서 천천히 힘을 빼냈다.
“…봐 드리고 뭐고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제 꼴도 그리 깨끗하지는 않은데요.”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충족하는 데는 사실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고작 이 짧은 대화와 머리를 맞대고 앉은 접촉만으로도 유더는 여태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긴장을 잃지 않던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유더 자신보다도 분명히 인지했을 키시아르가 녹아내릴 듯이 웃으며 말려 있던 보고서를 완전히 펼쳤다.
“그래. 그러면 먼지투성이가 된 사람끼리 사이좋게 무슨 보고가 왔는지 읽어 볼까. 나쁜 소식은 아니기를 바라는데 말이야.”
마병단 본부에서 온 보고서 작성자는 에버였다. 그녀는 힘있게 눌러쓴 글씨로 간결한 인사와 함께 그간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보고와 진행 사항을 적어 나갔다.
나한과 현자가 수도에서 만나 일으킨 폭발 사고 이후 각기 도망친 놈들의 행방을 쫓았다는 이야기, 칸나가 거기서 붙잡은 각성자들의 조사를 전담하느라 마병단의 첫 각성자 전용 취조동 건물을 열었다는 소식 등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나한은 역시 남쪽으로 향했나. 남부 거점으로 돌아갈지, 다른 곳으로 갈지는 알 수 없다지만…… 왠지 그놈이라면 여기로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비를 해 놔야겠군.’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의 진행 사항 보고 후 이어진 새로운 소식은 상당히 놀라웠다.
‘황제 폐하께서 숨어 버린 현자와 만날 확률이 높다 여긴 렌보우 자작이 4구역으로 향하니 뒤를 쫓으라 명령을 내렸다고? 그래서 위장과 추적에 능한 인원을 뽑았는데… 4구역의 특성상……. 잠깐. 이 이름은 왜 여기서 나오지?’
유더가 별안간 튀어나온 어떤 이름에 드물게도 자신의 시력을 잠시 의심했다. 하지만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다시 보아도 거기에 쓰인 이름은 분명히 유더가 아는 멍청이의 이름과 똑같았다.
“키올레 다 디아카의 이름이 갑자기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군.”
유더가 하고 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말이 옆에서 흘러나왔다. 키시아르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능력 있는 보좌를 두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더 생각지 못한 자가 도움을 주기도 하는군그래. 오늘 보고 들은 모든 소식 중 이게 가장 흥미로운걸.”
“…….”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읽느라 넘겼던 해당 부분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보았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렌보우 자작의 목적지였던 4구역에는 귀족들이 외유를 나가는 장소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그중 몰래 사람을 만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 숲, 혹은 호수 둘 중 하나의 장소에 자작이 향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였고 자작은 실제로 호수로 향했습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그곳에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
에버는 수도에 온 이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이 주는 약간의 흥분을 삼키며 함께 걷고 있는 동료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번 임무를 함께 할 인원은 책임자인 그녀까지 총 일곱이었다.
힌 엘더, 핀 엘더, 가케인 볼룬발트, 그리고 여태까지는 임시 단원이었지만 이제는 아니게 된 프루엘레 반 타인과 그의 동생 니폴렌 반 타인, 마지막으로 레블린 샨 아페토.
다만 니폴렌이 고양이 모습으로 작은 가방에 들어간 채 형의 품에 안겨 있었기에 겉보기에는 여섯 사람으로 보였다.
그들은 현재 위장을 위해 프루엘레가 제공한 타인 가의 4구역 사유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다 왔습니다. 여기예요.”
마차에서 내려 조금 걷자마자 곧 나타난 건물은 전통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타인 가의 사유지라는 사실이 선명히 표기된 조각상이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프리실라의 도움을 받아 이미 저희가 올 거란 걸 알려 두었으니 안에는 현재 사람이 없을 겁니다. 편히 들어가세요.”
에버와 가케인은 동시에 부담감을 느꼈으나, 힌과 핀은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을 볼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슴없이 건물의 문턱을 넘었다. 타인 가 못지않은 4대 공작가, 아페토 가의 일원이었던 레블린 또한 이 정도 화려함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오! 여기서 호숫가 전체가 보여!”
“어디? 진짜다!”
힌과 핀이 별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프루엘레가 편안한 태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네. 그래서 이곳으로 선정한 거예요. 호숫가 전체를 볼 수 있으면서 안전한 장소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요.”
렌보우 자작이 4구역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4구역에 대해 알아보았을 때, 이곳의 특성에 대해 잘 모르는 에버가 제일 먼저 조언을 들을 만한 이로 떠올린 사람이 바로 프루엘레였다.
프루엘레는 대귀족의 첫째 아들이었고 원한다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임에도 몹시 소박하고 친절했다. 그는 마병단에 와서 적응하는 동안 출신을 느끼게 하는 태도로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귀하게 자란 이에게는 불편할 법도 한 단체 생활에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임시 단원으로 머물렀던 레블린조차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은 귀한 생활 양식을 버리느라 몇 번 고생한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프루엘레는 서부에서 임무를 함께 하기도 했던 에버에게는 더더욱 친밀감을 느끼는지 간혹 궁금한 것이 생길 때면 늘 그녀에게 질문을 하러 오고는 했다. 덕분에 에버도 그와의 대화에 상당히 익숙해져 반대로 도움을 구해야 할 상황에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4구역에 귀족을 추적하러 가야 하는데 정보가 필요하시다고요? 음… 그곳에 아무 이유 없이 방문하는 평민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혹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는 곳에 방문하는 것으로 위장해서 추적하는 건 어떨까요? 저와 같은 입장인 레블린을 끼워 넣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그래도 될까 고민했지만 별장에 와 보니 과연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이상으로 적절한 장소는 없었다.
“그런데… 호수에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습니까?”
핀과 힌에게 양쪽 팔을 하나씩 잡힌 채 괴롭힘인지, 친밀함의 표시인지 모를 것을 받으며 먼 곳을 내다보던 가케인이 약간 힘들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에 답한 건 레블린이 먼저였다.
“어… 아니요. 호수는 숲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곳이에요. 사람이 없다 해도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 정말로 없네요?”
“우리가 쫓아야 할 그 자작이 호수의 사람들을 다 물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어?”
힌 엘더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상한 상황은 맞기 때문이었다.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텅 빈 호숫가를 보던 프루엘레가 새끼 고양이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나가서 알아보고 오죠.”
“혼자서요? 괜찮으시겠어요?”
“제 능력을 쓰면 됩니다. 잠깐이면 될 테니 기다려 주세요.”
프루엘레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뭉개졌다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그건 그들이 모르는 젊은 귀족의 모습이었다. 그가 변신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실제로 쓰는 건 처음 본 이들이 감탄의 눈길을 흘렸다. 프루엘레는 싱긋 웃고는 인사를 했다.
“제 친척 중 한 사람의 모습을 잠깐 빌렸습니다. 그럼 다녀오지요.”
밖으로 나간 그는 자신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들이 바랐던 답과 함께였다.
“호수 주변에 들어갈 수 없도록 기사들이 막고 있더군요. 디아카 가의 기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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