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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35화 (735/805)

735화

키시아르가 겉옷을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리자 지렁이가 기어간 듯 길고 검은 자국이 보였다. 몬스터의 다리에 스친 부분이 그대로 옷과 피부를 녹인 흔적이었다. 불에 탄 재처럼 새카맣게 변한 피부는 갈라진 부분을 억지로 봉합해 덮은 것처럼 융기된 모양새로 부어 있었다.

피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은 것도 아닌 기이한 모양새였다.

‘저게 신성력으로 응급 처치를 한 흔적인가.’

갈레암이라 이름을 밝힌 사제가 그 흔적을 보고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사제인 그녀는 그게 신성력의 흔적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을 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에 다른 사제가 이미 존재하리라 짐작하여 왜 또 자신을 불러들였는지 의아해할 만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갈레암은 숨만 한번 길게 내쉬었을 뿐 침묵을 지켰다.

과연 마이라 1공녀가 자신 있게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고 추천할 만한 이였다.

“몬스터의 공격에 스쳤네. 독성이 약간 있는 것 같더군.”

“예. 신성력을 쏟는 동안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실 수 있으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갈레암은 눈앞에 있는 금발 적안의 미남자가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서 곧바로 신성력을 끌어 일으키기 시작했다. 손안에서 충분히 모인 흰빛이 잠시 후 상처 부위 위쪽으로 쏟아져 나와 주변을 희게 밝혔다.

키시아르는 상처가 흐물흐물하게 변하며 다시 새 살이 차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플 거라던 말이 무색하게도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전부 끝났습니다. 겉보기에는 깨끗해 보여도 실제로는 막 재생되어 몹시 약해진 상태이니 며칠간은 절대 무리하지 마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실력이 몹시 훌륭하군, 고맙네.”

키시아르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짤막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말대로 갈레암의 신성력은 수도에 있을 루산 사제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러면 이제 이쪽도 봐 주겠나? 전투 도중 오른손에 무리가 간 것 같더군.”

팔을 몇 번 움직여 본 키시아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유더의 손을 잡아끌어 갈레암의 앞에 내놓았다. 키시아르가 치료를 모두 받은 뒤이므로 유더는 얌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 장갑을 낀 유더의 손을 본 갈레암은 조금 망설이다 질문을 했다.

“장갑으로 가려져 있으면 상태를 확실하게 확인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혹 이대로 치료받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상대에게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먼저 고려해 준다는 측면에서도 갈레암은 매우 훌륭한 사제였다.

‘어떻게 할까.’

유더가 잠시 망설이자 마이라가 눈치 빠르게도 몸을 일으켰다.

“제가 데리고 온 이들에게 뒷수습에 협조하라는 말을 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갈레암 사제의 뒤를 따라온 다른 사제들에게 따로 부탁할 말도 있었으니 잠시 나갔다 오지요.”

아무래도 유더가 장갑을 벗지 않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 때문이라 판단한 듯, 그녀는 뒤를 지키던 두 명의 기사까지 데리고 사라졌다.

검붉은 핏줄이 돋아난 손을 남들에게 설명하기 어렵고 귀찮아 가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저렇게까지 해 주는데 굳이 불편하게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갈레암 같은 성격의 사제라면 굳이 손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정보가 어이없이 새어 나갈 걱정을 할 일도 없을 듯했기에 유더는 천천히 장갑 끝을 잡아당겨 벗었다.

손등에서부터 소매 안쪽까지 울룩불룩 잔가지처럼 뻗친 검붉은 선을 본 갈레암은 예상대로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피부가 아니라 손목 관절 부분을 봐 주십시오.”

무기를 든 상태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꺾어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에 갈레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주변이 확실히 많이 부었군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유더의 손목 주변을 몇 번 눌러 보며 상태를 파악한 뒤 신성력을 부어 주었다. 화하고 시원한 기분이 스치고 지나간 뒤, 유더는 시큰거리던 손목의 붓기가 확연히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손목을 몇 번 돌려 보아도 아무런 불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갈레암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샬로인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워 주신 분들께 저야말로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갈로암 사제의 도움은 분명히 기억해 두겠네. 추후 반드시 사례하도록 하지.”

키시아르의 말에 갈레암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해 주기를 바라서 온 게 아니니 괜찮다는 말도 덧붙였다.

“치료는 끝나셨을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라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뒤를 따르던 기사들조차 없는 혼자의 몸이었다.

“갈로암. 당신을 따라온 다른 사제 분들께 이곳의 다른 부상자 치료를 부탁했어요. 큰 부상자는 없지만 탈진한 사람들이 많다더군요. 괜찮다면 오늘 하루 동안은 그 일을 계속 도와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1공녀님. 신을 따르는 이라면 부탁 없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갈로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린 마이라가 한결 편안한 태도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드디어 보는 눈 없이 조금 더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네요. 대체 아까 헤어진 뒤로 마병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말하자면 조금 기네.”

키시아르는 돌아가던 도중 습격당한 이야기와 그들을 상대하던 중 갑작스레 지부 건물 위에 발생한 이상 균열, 그리고 거기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에 대해 설명했다.

요약했음에도 충분히 상황 규모를 짐작 가능한 엄청난 이야기에 묘해지던 마이라의 표정은 키시아르가 ‘콘체 남작가를 우리 쪽에서도 살펴보기 위해 사람을 보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 죽지 않은 2공자의 말과 하인, 그리고 수상한 이들을 잡는 데 성공했다’는 부분에서 어안이 벙벙하게 변했다.

“말과 하인도 찾은 데다 전부 잡아 두기까지 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리 빨리…….”

“들어 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다더군.”

“…….”

그 말이 맞기는 한데, 이렇게 들으니 자신이 상당히 이상한 자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유더는 묵묵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사이 이야기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인 나그란의 별과 남국인 상인들로 흘러갔다.

“나그란의 별이란 각성자 단체에서 마병단 지원 모집에 끼어들어 간자를 심으려 했네. 이전부터 그들의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벌인 일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아. 일 처리 또한 우리 쪽에서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공녀 쪽에서는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없을 것 같군. 하지만 남국인 상인들 쪽은 조금 다르겠어.”

키시아르는 타인 공작 재판에 대해 언급하며 남국인 상인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마이라 또한 타인 공작이 자신을 현혹한 남국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자들이 설마 여기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 동생 2공자를 죽인 진짜 배후로 의심된다는 말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말씀은, 그 남국인들이 콘체 남작가와 손을 잡고 헤른의 후계자 구도를 흔들려 했다는 말씀입니까?”

“1년 전 콘체 남작가의 소개를 통해 2공자의 하인으로 잠입하여 신뢰를 얻은 뒤 오늘과 같은 일을 벌인 걸 보면 정황상 그리 생각하는 쪽이 가장 들어맞겠지.”

그들이 하인으로서 2공자에게 접근한 시간만 쳤을 때 1년일 뿐, 콘체 남작가와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잡았을지 알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그 시간까지 따지면 타인 공작에게 손을 댄 시기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지 몰랐다.

마이라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 표정이 딱딱해졌다.

“콘체 남작이 그런 멍청하고도 무서운 흉심을 품을 수 있는 자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우리가 어지간히 우습게 느껴졌나 보군요. 아쉴라브 다음은 아마 저였겠지요?”

그 멍청하고도 무서운 흉심을 이전 생의 마이라는 아마 아주 나중에서야 알아차리게 되었을 터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영리한 머리로 금세 적들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기 시작한 마이라는 그자들이 노리는 목표가 아쉴라브 2공자만으로 끝이 아니었을 것임을 빠르게 추측해 냈다.

이를 악문 공녀의 눈빛이 날카로운 칼처럼 예리해졌다.

“그렇다면 저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겠습니다. 그 배신자들을 감사하게도 현장에서 잡아 주셨으니 바로 콘체 남작가로 이동해야 할 것 같네요.”

“괜찮겠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떤 일은 아무리 어려워도 미뤄서는 안 되는 법이죠. 그자들은 헤른 가를 배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칫 잘못했다면 샬로인 전체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를 위험에 손을 보탰어요. 그들이 저지른 죄와 그 결과를 모든 이에게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려면 지금 가야 합니다.”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은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뜻은 알겠네. 무척 마음에 드는 말이기도 하군. 그렇다면 마병단원과 제국군 특수부대원들을 몇 명 지원해 주도록 하겠네.”

“이곳도 일손이 바쁘신 걸 아는데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바쁜 건 바쁜 것이고 협력자의 안전도 뒷수습 못지않게 중요하지. 만약 1공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더 이상 1공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그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군.”

“…….”

마이라는 이제 혼자다. 아쉴라브 2공자가 죽었으니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면 무난히 후계자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후계자가 되기 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위험성을 키시아르가 찌르자 마이라 또한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1공녀 쪽에서도 사제와 기사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으니 우리도 이 정도는 해야겠지. 어려워 말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인사했다.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더는 사방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키시아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졌는지, 다른 데는 문제가 없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들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북부 지부로 가 보는 건 아무래도 이번 2차 지원 시험이 끝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남국인 상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군.”

“북부에는 제 쪽에서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자들을 상대하고 조사하려면 아무래도 여기 있는 인원만으로는 부족할 테니,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자고 말하려 했겠지.”

“네.”

키시아르는 유더가 하려던 말을 이미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유더는 수도에 있을 이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칸나는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남부 출신인 이들도 몇 정도 더 부르면 좋을 겁니다.”

“일이 길어진다면 약사를 부르는 것도 좋겠군. 그는 방대한 지식을 가졌으니 서부 때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네. 그리고…….”

“아, 잠깐. 전서조가 왔군.”

손을 들어 말을 잠시 멈춘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전서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다리에 묶인 통이 평소보다 크다 싶더니, 가지고 온 편지의 양이 두 배는 되는 듯했다.

겉면을 확인한 키시아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본부에서 온 보고인가. 이건 바로 확인해 봐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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