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34화 (734/805)

734화

“나단. 유더를 데리고 안으로 먼저 들어가 오른손의 상태를 살피게 하도록.”

나단 주커만이 봤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제 뜻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과연 오래된 부관답게 키시아르의 속내를 읽는 능력이 남다르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나단 주커만이 저 명령을 따르도록 놔둘 생각 따윈 없다. 유더는 곧장 입을 열었다.

“제 손은 멀쩡합니다. 그보다는 단장님의 팔을 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미 임시 처치를 끝내 두었어.”

키시아르가 한 손으로 손짓을 하여 마병단원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면서 여상히 대꾸했다.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유더와 나단 주커만 모두 키시아르가 신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신성력을 지닌 이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건 임시 봉합에 불과하다. 피를 멎게 하는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스스로 지닌 힘과 기력이 떨어지면 그것도 끝이었다.

“잘되셨군요. 그대로 사제나 의원에게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될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을 써서 당장 수습해야 할 일은 이리 많으니 당장 급한 이부터 치료를 받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아니요. 남은 수습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모시는 분보다 먼저 치료를 받으려 하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가능할 텐데.”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웃으며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부상을 입은 마병단원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살펴 주면서 지부에서 가지고 나온 붕대를 감는 중이었다. 개중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이들은 부축하여 옮기는 걸 보니 그들의 치료를 우선시하라고 명한 것도 방금 키시아르의 지시에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더가 이렇게 나올 거란 걸 예상한 듯 실로 용의주도한 행태였다.

‘…….’

조금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재차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나단 주커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으나 거기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까…….”

유더가 재차 무어라 입을 열려 했던 찰나, 큰 손이 그의 어깨를 무심히 잡아 가로막았다. 앞으로 나선 이는 나단 주커만이었다.

“듣다 보니 간단한 해결 방법을 두고 계속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더군요.”

“다른 방책이 있으십니까.”

“네. 방금 포위망 바깥을 살짝 보고 오니 공작님이 만나 보셔야 할 만한 손님이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이쪽 수습은 제가 하고 있을 테니 아일 경이 공작님을 모시고 그쪽에 다녀오시는 김에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문제가 간단히 해결됩니다.”

나단 주커만은 그렇게 말한 뒤 유더가 하고 있을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마병단 소속은 아니지만 몬스터 발생 이후의 수습은 펠레타에서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이곳이라고 딱히 다른 방법을 필요로 하진 않을 것 같군요. 그 외의 시급한 용건이라면 이미 주군께서 명을 내려 두셨을 테고, 나머지는 다른 분들과 손발을 맞추면 될 일입니다.”

나단 주커만은 그간 펠레타 기사단의 대표이자 키시아르의 부관으로서 많은 일을 함께 해 왔다. 때문에 여기 있는 마병단원들과도 모두 안면이 있었다.

놀랍지만 그 또한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인재라는 건 반박의 여지 없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단 주커만이 부상을 입은 키시아르를 두고 혼자 남는다고? 이런 상황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같은데, 생각해 보니 저 기사는 이미 아까도 같은 선택을 한 적이 있었다.

‘…나를 먼저 보냈음에도 키시아르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정말 화가 나지 않았단 말인가?’

나단 주커만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그러리라곤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면……. 유더의 표정이 미세하게 묘해지던 순간,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시간을 아끼면서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방법이구나 나단. 현명한 조언이야.”

“예. 게다가 저는 부상 당한 곳 하나 없이 멀쩡하기까지 하지요.”

“알겠다. 네 말을 따르지.”

그리하여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가게 되었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국군이 아직 유지 중인 포위망 바깥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나그란의 별 때문에 대피했던 사람들, 치안 관리대 옷을 입은 병사와 기사 약간, 구경하러 온 것 같은 소수의 정신 나간 이들, 그 외에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려 하는 이들까지 합해 정신이 없었다.

‘뭐, 예상했던 일이기는 한데.’

유더는 난리를 부리는 이들 뒤쪽에 멈춰 있는 마차 한 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헤른 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낯익었다.

‘과연. 저걸 알아보고 나단 주커만이 그런 말을 했던 거군.’

그의 시선을 알아챈 것처럼 문이 열리고 헤른 1공녀, 마이라 엘 헤른이 내렸다. 그녀는 이전처럼 얼굴을 가리는 로브를 쓰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의 걸음이 덩달아 빨라졌다.

남부에서 헤른 가의 영향력은 서부의 타인 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단한 편이다. 귀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걸 알아차린 이들이 슬금슬금 물러나 만들어진 길을 따라 다가온 마이라가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사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하늘에서 큰 몬스터가 떨어지는 광경을 봤어요. 곧장 이곳으로 마차 방향을 틀었는데 위험하다는 이유로 들여보내 주지 않더군요.”

“그랬군. 미안하게 되었네. 전투가 벌어지던 중이라 주변의 접근을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거든.”

키시아르가 대답했다.

마이라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엉망이 된 유더의 차림새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만만치 않게 상태가 엉망인 키시아르를 보았다. 궁금한 게 많아 보였지만 그래도 타인의 시선이 많은 이곳에서 이 이상의 대화를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듯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주변의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딱 한 가지 질문만을 더 했다.

“그렇다면 이제 안쪽 상태는, 괜찮은 건가요? 몬스터는 모두 처리되었나요?”

“그래. 모두 처리했네. 지금은 사체를 수습 중이지. 크게 파괴된 곳이 없으니 현장 수습만 끝나면 모두 들어갈 수 있게 될 거야.”

“다행이군요.”

키시아르와 마이라의 대화를 들은 이들이 웅성거렸다.

“들었어? 파괴된 곳이 없대!”

“그렇게 큰 몬스터가 엄청나게 떨어졌는데?”

“정말로 피해가 없다고 했단 말이야?…….”

“그 이번에 격투장에서도 마병단이……!”

“마병단…….”

마병단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며 시끄러워진 틈을 타 그들은 지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저기 움푹 파인 땅과 조각난 사체, 검은 체액이 가득한 광경을 본 마이라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정말로… 저걸 전부 마병단이 죽인 거군요. 저렇게 크고 많은 걸 이리 빨리…….”

전부 처리했다는 말만 들었을 때와 실제 전투 현장을 보는 건 역시 체감이 다르긴 할 터다. 놀란 건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듯, 어깨에 오만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이들이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키시아르가 조용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사실 도와 드리기 위해 기사들과 함께 왔던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었군요.”

“도움은 지금도 필요해. 뒷수습을 할 손이 좀 부족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제가 데려온 이들을 쓰세요. 혹 사제는 필요 없으신가요?”

“사제도 데려왔나?”

“달려오던 도중 불러 두었으니 곧 올 거예요.”

“우리가 부르는 이들보다 빨리 오겠군.”

“더불어 믿고 치료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입도 무거운 이들이죠. 헤른 가가 아니라 저와 연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황후 폐하께서도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는 이가 적은 외지에서는 이런 도움이 가장 유용했다. 부상을 입어도 믿고 치료를 맡길 이를 찾는 건 해당 지역의 토박이나 세력가가 없을 때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키시아르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듯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거 참 좋은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 도움, 고맙게 받겠네.”

“마병단이 저 끔찍한 몬스터들을 이리 빠르게 처리해 주셨기에 샬로인이 아무런 피해 없이 평화로울 수 있었어요. 따지자면 저 또한 도움을 받은 셈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방금 동생의 시신을 보고 난 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단한 태도였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보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남부의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이런 사람이 헤른 공작이 되었다면 적어도 이전 생의 남부 대지진이 그렇게 큰 피해로 이어지진 않았으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마이라가 불렀다는 사제가 나타났다. 사제복을 걸친 중년의 여성은 지부 내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면면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샬로인 마타로아 마을 지부의 사제, 갈레암입니다. 제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어느 분이실지요?”

“여기 계신 분이십니다.”

유더는 두말없이 키시아르를 가리켰다. 키시아르가 한발 늦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그래도 치료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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