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화
“…이전 게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몬스터가 떨어지며 부서지는 건물이나 길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비명 사이에서도 그 목소리만은 아주 분명하게 유더의 귀로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차갑게 식었던 피가 키시아르의 존재감을 느낀 순간 다시금 약간의 온기를 되찾았다. 유더는 작지만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쉰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긴 그렇겠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진작 경고해 주었을 테니까.”
그 말이 맞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확신했다면 서부의 페투아멧 때처럼 혼자서라도 뛰쳐나가 모든 일을 막으려 했을 테니까. 하지만 유더는 지금의 상황과 상당히 비슷했던 재앙을 하나 알고 있기는 했다.
유더의 주변에 공기의 흐름을 흐트러뜨리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키시아르 외에 누구도 듣지 못할 말을 낮고 빠르게 읊조렸다.
“이런 식으로 나타난 몬스터들은 처음 봅니다만, 사실 균열을 보았을 때까지는 제가 기억하는 어떤 사건의 징조와 몹시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지?”
“이전 게임에서 제국의 첫 재앙으로 기록된 사건인 남부 대지진입니다.”
본래대로라면 남부 대지진은 몇 년 뒤에나 일어날 사건이다.
한 번의 지진, 수십 일의 여진, 그 여파로 세 지역을 덮친 거대한 파도.
그 사건으로 인해 남부의 도시에 세워진 건물 대부분이 손상을 입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유적을 비롯한 문화유산 또한 셀 수도 없이 유실되었다.
보통은 그 정도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주변 자연환경의 변화를 통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란 징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부 대지진은 그렇지 않았기에 더욱 피해가 컸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 사실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진은 자연재해이고, 보통 자연재해가 갑자기 일어나는 걸 두고 어떤 특별하고도 이상한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지는 않는 법이었다.
당시의 유더는 한창 구시대 귀족들의 기를 누르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중이었던 카치안 황제의 비밀 무기 노릇에다 비협조적이고 적대적인 귀족들 상대, 거기에 더해 재해 뒤처리까지 돕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뿐인가? 당시의 마병단 남부 지부는 피해가 컸던 지역에서 다소 벗어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도 일찍 도우러 갈 수가 없었는데, 그것을 이유로 들어 마병단이 쓸모없다는 무용론이 한차례 제국 정계를 휩쓸기도 했다.
그것은 당연히도 카치안 황제와 한창 기 싸움 중이던 구 귀족들이 황제의 검인 유더와 마병단의 팔이라도 잘라 보고자 일으킨 짓이었다. 물론 황제가 유더를 비호했기에 그 공격들은 마병단에 그리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자연 속성을 다루어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인재인 유더가 남부로 내려가 지휘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건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싸움 탓에 남부 대지진의 피해 복구와 실태 파악이 늦어져 피해가 더 커진 셈이나 그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때도 저런 균열이 목격되긴 했으나 몬스터가 나타난 적은 없었단 거야. 시기도, 과정도 지금과 달라.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건이라 하기에는…….’
이 이상한 일을 일으킨 원인이 남국인 상인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연관이 전혀 없다고 잘라 버릴 수는 없었다.
유더는 여기까지의 정보를 짧게 저며 내어 키시아르에게 전했다.
“그때도 이런 균열이 몇 차례 목격된 뒤 남부 전체에 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몬스터가 나타난 적은 없었고 시기도 지금이 훨씬 빠르지만 저 균열과 남국인 상인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아주 관련이 없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도 원인이 같은 놈들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거군.”
“예.”
이전 생에는 남국 측 인물들과 제대로 접한 적이 없으니 그들의 손이 어디까지 뻗쳐 있었는지 짐작할 길이 없다. 카치안 황제의 충실한 검으로 살며 그가 바라는 대로 주어진 정보 이상에는 일부러라도 눈을 돌리지 않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저 마병단을 견고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주어진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겼던 그 시간들이 새삼스레 아쉬웠다.
그렇지만 유더는 지금 벌어진 예상치 못한 일들을 실패라 생각지는 않았다.
이상한 균열이 나타난 시기가 빨라졌지만 그 덕에 이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그리고 남국인 상인들의 연관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몬스터가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고 있다지만 그 범위는 아직 마병단 남부 지부 주변에 불과했다. 이미 일반 제국민들을 모두 대피시킨 지 오래라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마병단을 홀로 지탱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유더는 키시아르의 아래서 온전히 저 몬스터들을 해결하고 곧 닥칠지 모를 재앙과 관련된 조사 쪽에만 전념해도 되는 입장이었다.
키시아르가 여기에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사실만을 머릿속에 남긴 뒤 유더는 품 속에서 아까 시체들의 소지품을 뒤져 찾아냈던 검은 돌들을 꺼냈다.
“죽은 남국인 상인들이 지니고 있던 물건입니다. 저로서는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이 일이 끝난 뒤 세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키시아르의 시선이 몬스터에게 깔려 흔적조차 희미해진 남국인 상인들의 시체 쪽으로 살짝 향했다.
“알겠네. 그 와중에 다행히 잘 수거했군.”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저는 그들의 자결을 막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모든 일을 생각한 대로 완벽하게만 처리할 수는 없어. 나 또한 그들이 암살자처럼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유형의 인간들은 아니리라 짐작했었으니 그렇게 따지자면 내 탓도 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단장님은 멀리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 일은 어디까지나 제 책임으로 해 주십시오.”
유더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 짓기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미소에 유더가 멈칫하자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들이 죽은 건 아까운 일이나 어차피 네가 오기 전 잡아 둔 아톤이란 자가 남아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그걸 알면서도 굳이 책임 소재를 자신에게만 돌리는 건 너를 도운 나머지 네 명과 내게 이 몬스터 출현 사건과 관련된 책임이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겠지?”
“…….”
“안 되지. 혼자서만 책임지는 건.”
“그게 아니라…….”
역시 키시아르 라 오르.
속내를 제대로 읽힌 기분이었으나 유더는 일단 반박하려 노력은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키시아르의 말 한마디에 막히고 말았다.
“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 중 하나가 책임지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듯 어루만졌다.
“알고 있겠지만 책임의 무게는 아주 무거워. 하지만 결국은 그 무게조차 질 수 있다고 판단되는 이에게만 지우는 법이야. 그리고 그건 아주 아쉽게도 내가 여태 크게 기대받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하지.”
궤변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 기회에 내가 어디까지 견뎌 낼 수 있는지,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다가 그걸 내 보좌도 지켜봐 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주 두근거리는걸. 나쁘지 않아.”
어떻게 그런 좋은 기회를 혼자 가져가려 하느냐는 우스운 농담 같은 말에 맞춰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게 정말 좋은 기회일 리 있겠는가? 하지만 저 얼굴만 보면 정말 그렇게 들렸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두들겨 대는 큰 박동 속에서 키시아르가 움켜쥔 검 자루를 유려하게 한 바퀴 돌려 바로 세웠다.
“자. 나머지 이야기는 이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하도록 하고, 일단 같이 가도록 할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검을 높이 들었다가는 그대로 휘둘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완벽한 검의 궤도가 유더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검 끝이 은빛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마자 그들의 지척에 다가와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몬스터의 몸이 푸른 빛을 내는 힘에 휩싸여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
유더는 제 머리 위에서 깔끔하게 찢긴 몬스터가 스르르 미끄러져 양방향으로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뼈도, 살도 마치 매끈한 유리처럼 깨끗한 단면으로 갈라진 모습이 실로 비현실적이었다.
- 쿵……. 쿵.
인간의 머리로 파악할 수 없는 끔찍한 괴성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만한 기관조차 이미 둘로 나뉘어 버린 탓이었다. 유더는 고개를 돌려 단 한 번의 검으로 절명한 몬스터의 거대한 시체를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숨이 멎지는 않았는지 꿈틀거리고 있기는 했으나, 놀랍게도 쏟아진 체액은 단 한 방울도 유더에게 닿지 않았다.
신기에 가까운 검술.
소드 마스터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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