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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28화 (728/805)

728화

“…….”

그제야 처음으로 여자가 눈을 깜박이며 반응했다. 남국인 특유의 짙은 눈동자 속에 약간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걸, 누가 말해 주었지?”

아톤 놈보다 훨씬 딱딱한 제국어였다. 억양이 낯설어 처음에는 알아듣기 힘들 뻔했지만 그래도 제국말은 맞았으니 반응을 불러내려던 목적은 이루었다. 유더는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려 웃음 아닌 웃음을 흘렸다.

“너희보다 먼저 내게 실컷 두들겨 맞은 네놈들 대장이.”

“……아톤 님?”

“그래.”

“말도 안 돼.”

“왜 안 되지? 너희도 결국 나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하고 졌는데.”

그 말에는 과연 할 말이 없었는지 남국인 상인이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새카만 어둠과 같은 눈을 마주한 여자의 눈이 거북한 듯 떨렸다.

“불균형의 여파를 얹어 검은 달의 땅으로 만든다는 게 무슨 뜻이냐. 너희 늑대의 눈 부족은 대체 무얼 바라 움직이는 거고, 저 균열은 대체 무슨 결과를 불러내는 건지 말해.”

“…….”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버텼다. 아톤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욱 비밀을 잘 지키는 것 같았다. 유더가 다른 쪽 상인을 찾아가 볼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곁을 지키던 예르긴이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유더, 바빠 보이는 와중에 미안한데 잠깐 이것 좀 봐 줄래? 저 사람한테 뺏은 소지품을 살피는데 뭔가 좀 이상한 게 있는 것 같아서.”

유더는 멱살을 놓아 남국인 상인을 도로 구덩이 안으로 넣어 버린 뒤 돌아섰다. 예르긴이 건넨 것은 낡은 천 주머니였다. 끈이 풀려 있는 주머니 안에는 사각형 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주먹만 한 크기에 불과하여 그리 대단한 물건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유더는 그 상자를 꺼내 열어 보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열린 상자 안에는 하얀 가루를 뭉쳐 담은 또 다른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썩은 냄새가 퀴퀴하게 풍기는 그것의 정체를 유더는 곧바로 깨달았다.

‘이거……. 서부에서 우리가 바꿔치기했던 그 가짜 마약 같은데.’

썩은 마약을 왜 들고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도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간만에 그것을 발견하니 조금 웃기기는 해서, 유더는 그것을 제 주머니에 옮겨 담았다.

빈 상자를 도로 닫으려던 그때, 유더의 눈가가 문득 움찔 움직였다.

‘……상자 내부의 모양새가 왠지 좀 익숙한데.’

“그 가루 정체가 뭔 것 같아? 상자가 닫힌 상태에서는 하나도 냄새가 안 났었는데 여니까 정말 지독한 냄새가 나서 깜짝 놀랐다고. 그게 이자들의 무기 아닐까?”

유더가 빈 상자 내부를 들여다보며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는 사이 예르긴이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유더는 무기가 아니라 그냥 썩어 버린 불법 마약이라는 설명으로 동료를 실망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고개만 작게 저었다.

‘…아니, 잠깐.’

상자가 닫힌 상태에서는 하나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 별안간 유더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는 상자를 닫았다가 다시 열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가, 또 열었다.

‘역시 이건… 보통 상자가 아니군.’

유더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작은 상자를 들고 귓가에 가져다 댄 뒤 흔들기 시작하자 예르긴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새로운 훈련법이라도 떠오른 건 아니지?”

“아니야.”

상자를 흔들어 대는 훈련 같은 걸 할 리가 있겠는가?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상자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한 건 그녀의 덕이 컸다. 유더는 다시 상자를 열며 짧게 감사를 표했다.

“네 덕에 찾았다.”

“뭘?”

“상자에 숨겨진 이중 바닥.”

“이중… 뭐?”

유더는 설명 대신 열린 상자의 안쪽 부분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밋밋해 보였지만 안쪽 손가락으로 만지자 걸리는 부분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상자의 바닥 아래,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새로운 공간을 여는 열쇠 부분이었다.

유더는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이러한 비밀 상자를 이전에 타이누에서 키시아르의 애인 노릇을 할 때 본 적이 있었다. 수상한 놈들을 살필 겸, 선물을 준답시고 희귀 물품을 파는 상단이 즐비한 거리를 다니던 도중 딱 이 구조와 똑같은 청옥 코담뱃갑을 선물 받았던 덕이었다.

그런 상자는 쓸 일이 없을 거라 거절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유더는 그 안에 키시아르가 사탕 종이로 접어 주었던 꽃을 넣어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하려 하니 거기밖에 적절한 곳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상자를 몇 번 열었다 닫아 본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상자의 비밀 공간을 알아차리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형태와 재질은 달라도 열고 닫는 구조는 비슷해서 다행이었다.

유더는 손끝에 만져진 부분을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바닥이 열리며 숨겨진 빈 공간과 그 속에 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르긴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와! 대단한데. 과연 아일 남작님이네!”

예르긴과 이렇다 할 친분은 크게 없었지만, 그녀가 아주 훌륭하게 간이 비대해진 마병단원 중 한 사람이란 사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유더는 적당히 해 두라는 뜻으로 찌푸린 시선을 보낸 뒤 숨겨져 있던 물건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안 돼. 감히!”

구덩이 속에서 유더가 무얼 하는지 본 남국인 상인이 몸부림치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그따위 말에 정말 그만할 사람은 여기 없었다.

“그게 숨겨져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썩는 냄새가 밀폐될 정도의 상자라면 겉보기보다 훨씬 비싼 물건일 텐데, 그런 물건 안에 고작 썩은 가루 하나만 넣어 두는 건 이상하니까. 흔들어 보니 뭔가 흔들리는 소리도 났고.”

“야, 그걸 생각 못 했네. 좋은 거 배워 갈게.”

유더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집어 든 물건을 허공으로 들어 지그시 살펴보았다.

‘……보석? 아니. 마정석인가?’

그것은 불투명한 검은색을 띤 돌이었다. 보석 원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미약한 기운이 어른대는 듯도 해 마정석 같기도 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분명 이것을 조사해 보면 뭔가 나올 터다.

‘키시아르 쪽에 보내야겠군.’

유더가 그것을 도로 상자 안에 넣으려던 찰나, 구덩이에서 큰 고함이 들려왔다.

“너흰 그게 뭔지 절대 알 수 없다. 사막 위의 어리석은 자들이여!”

“…….”

“너희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균형의 추는 더욱 거세게 비틀릴 뿐, 돌이킬 수 없다. 너희는 졌어.”

유더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거기까지였다. 남국어가 뒤섞인 말로 무어라 중얼대던 여자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완전한 남국말을 외쳤다.

“이니아! 크타 이니아!”

외침을 끝낸 뒤, 손쓸 새도 없이 여자의 입 안쪽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엇……!”

당혹한 예르긴이 구덩이 안으로 파고 들어갔으나 그녀는 이내 기가 막혀 아연해진 표정으로 다시 빠져나왔다.

“세상에. 자결했어!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이렇게 쉽게 자결을…….”

“엇, 유더……!”

“유더!”

그때, 주변에서도 일제히 유더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 다 남국인 상인들을 하나씩 가두어 두고 있던 단원들의 부름이었다.

“빨리 와 줘! 여기 이자가 자결하려고……!”

“아니, 왜 이래? 갑자기 미친 것처럼…!”

유더는 진작 그놈들에게 재갈을 물려 두라고 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며 힘을 끌어모았다. 서둘러 땅의 힘과 바람의 힘을 강화하여 사용해 보았으나 나머지 남국인 상인들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순식간에 네 구의 시체가 유더의 앞에 모였다. 유더는 안색이 창백해진 단원들 대신 시체에게서 나온 소지품과 무기를 모두 살폈다. 그들은 모두 제일 먼저 죽은 여자가 가지고 있던 비밀스러운 상자와 똑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비밀리에 감추어 놓았던 상자 밑바닥에서도 비슷하게 생긴 돌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는 신분을 특정할 만한 물건이 없었고 무기도 하나같이 평범했다.

‘대체 이자들은 이걸로 무얼 하려 한 걸까.’

유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머지 단원들은 나그란의 별을 거의 모두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그 어떤 아군의 피해도 없이 주변 건물 하나 상하지 않고 일이 마무리되리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아직 남국인 상인들이 죽었음을 모르는 이들이 각자의 희비 속에서 끝나 가는 전투를 마무리하고 있던 그때.

“……유더!”

시체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유더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외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키시아르?’

그러자마자 곧 허공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며 4구의 시체를 완전히 깔아뭉개 버렸다. 그가 고개를 적시에 들지 않았더라면 스쳤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충격이 땅을 진동시키며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유더는 뒤로 나뒹굴면서도 습관적으로 몸에 바람의 힘을 둘러 충격을 상쇄하고 빠르게 일어나 앞을 보았다.

“뭐, 야 저거!”

“몬스터……! 몬스터다!”

깔아뭉갠 시체 위로 음울하게 꾸물거리는 형체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얇고 가느다란 다리들과 비대하게 부풀어 있는 몸,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도 단단해 보이는 날개.

그것은 몸집이 마차 정도나 될까 싶을 만큼 거대한 몬스터였다.

그것이 고개를 쳐들고 뻥 뚫린 눈구멍을 움직이기 시작한 찰나, 하늘 위에서 똑같은 형체들이 줄줄이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 쿵, 쿵. 쿵……!

상상도 못 한 상황. 마치 악몽 같은 풍경 앞에서 마병단원들조차 당황하여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어어… 어…….”

“…….”

유더는 마치 비처럼 내리는 몬스터를 보며 빠르게 검을 뽑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며 몬스터 전투라면 이골이 난 이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이의 향도 순식간에 훅 가까워져 그의 몸을 감쌌다.

언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모를 키시아르가 검을 든 채 웃음기 없는 눈으로 몬스터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전 게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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