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화
아무리 베어 내도 사라지지 않고 울창해지기만 하는 삼림 내부에서 그저 존재하기만 하다 사라졌던 기이한 균열.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홀로 놀라지 않고 심각하게 응시하던 유더 아일의 모습.
꺼질 듯 지친 목소리로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던 유더의 목소리가 키시아르의 머릿속을 두드렸다.
‘이전에 서부에서, 몬스터들이 이상 발생을 할 때 나타났던 기묘한 균열을 보셨을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비슷한 것들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습니다…….’
유더는 그것이 고작해야 시작일 뿐이라 말했다.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재해와 고난이 닥쳐오기 전의 신호탄, 폭풍의 전야와 같은 고요한 반짝임일 뿐이라고.
키시아르는 그 이야기를 하던 유더의 표정이 어떠했었는지 기억한다.
언제나 무표정하기로 유명한 그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감정 표현이 제법 다양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차가워 보여도 그 속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뜨거운 불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 표정은.
거기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인간답게 만들던 모든 것이 거세된 듯 텅 비어 버린 버석한 눈동자 속에 그저 해묵은 먼지와 시린 한기만이 희미하게 비쳤다. 키시아르가 아는, 혹은 알았다고 여겼던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끔찍하게 오랜 시간을 홀로 버텨 오느라 모래알처럼 닳아 버린 누군가가 허무한 목소리를 울리는 듯했다.
오직 죽음의 앞에 서 본 사람만이 그 공허의 무게를 느낄 수 있기에 키시아르는 머리가 아닌 그보다 깊은 무언가로 그것을 이해했다.
누구보다도 선명히 스스로를 불사르며 빛나던 이의 가장 깊은 내면에 꽁꽁 숨겨져 있던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불타고 남은 자리에 새카맣게 남겨진 잿가루와도 같았다.
자신의 목표가 ‘세상에 닥쳐올 재앙을 다시 한번 막는 것’이라고 밝히던 그 엄청난 순간에도 유더의 눈빛은 키시아르조차 자신을 믿지 않을 가능성을 아주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억울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설득하려는 의지조차 내보이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향한 불신에 익숙한 얼굴로 진실을 말하던 텅 빈 얼굴은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 있던 모습보다도 어떤 의미로는 더욱 처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키시아르의 깊은 곳 어딘가가 고통으로 길게 신음했다…….
“……단장님?”
유더는 한창 중요한 부분을 말하다 말고 갑자기 제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키시아르를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웃음이 사라진 눈이 어쩐지 어두워 보여 몹시 신경이 쓰였다.
‘뭐지. 그때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혹시나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무언가의 흔적을 외부에서 찾아내려는 듯 집요하면서도 염려에 찬 시선을 마주한 키시아르가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미안하네. 생각하니 새삼 보좌가 시기적절하게 여기로 와 준 게 마치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예? 갑자기 무슨…….”
낯간지럽고도 의도를 알기 힘든 한마디로 유더의 미간에 주름을 잡게 만든 사내가 낮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균열이 생겨나자 모두가 몬스터가 곧 나올 거라 생각해 몹시 당혹했네. 저들은 그 틈을 타 빠져나가려 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이쪽은 예전에 서부에서 같은 균열을 본 기억을 떠올린 덕에 휘말리지 않고 막을 수 있었어.”
키시아르는 대삼림에서 보았던 균열과 유더의 말을 떠올린 즉시 놀라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향해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을 테니 우선 적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라’고 단호하게 외쳤다. 그의 말이 없었더라면 로브를 뒤집어쓴 남국인 상인들이 막 뒤로 빠져나가려 했던 것을 놓쳤을 터였다.
키시아르의 확언을 듣고 정신을 차린 건 마병단이나 제국군뿐만이 아니라 나그란의 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릴 두고 지금 당신들만 빠져나가려고 한 건가요?! 길을 열겠다는 게 이 뜻이었어? 대체 저 이상한 균열은 뭐냐고!’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설명하기 어려우나 저희를 믿고…….’
‘대체 뭐야, 세라. 너희가 여기 있는 건 그분의 명이야? 내가 알기로는 아닐 텐데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온 거지? 너희 남부는 오늘 돌아가기로 한 것 아니었나? 저 수상한 자들은 또 뭐고!’
저들만 빠져나가려 했던 남국인 상인들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세라가 대치 상황조차 잊고 큰 소리를 냈다. 남국인 상인들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번에는 세라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중부 거점의 각성자 대표가 끼어들었다.
한번 던져진 불신의 씨앗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그란의 별 측 각성자들 사이에 싸늘함이 맴돌며 점차 가까운 자들끼리 뭉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중부 거점은 중부 거점끼리, 남부 거점은 남부 거점끼리, 상인들은 상인들끼리 가까이 모여 눈빛과 말을 교환했다.
먼 거리였지만 키시아르는 소드 마스터 특유의 예민한 오감을 이용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자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수상한 자들과 수상한 짓을 벌이는 남부 거점을 믿을 수 없게 된 중부 거점의 각성자들.
남국인 상인들과 함께 움직였으나 배신당한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길이 마땅치 않아 그들을 완전히 추궁하지 못하는 남부 거점의 각성자들.
그리고 침묵을 지키는 남국인 상인들.
각자의 목적과 이득이 같은 듯 다른 이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니 전투 또한 자연히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치 상태에 머물렀다.
뭔가가 터질 듯하면서도 터지지 못한 채 부글거리기만 하는 상황.
유더가 하늘에서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 된 거라네.”
드디어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유더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갔던 쪽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키시아르 쪽은 더했다. 그가 홀로 마차를 타고 마병단으로 돌아가는 짧은 사이 습격당한 데다 알 수 없는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신검까지 사용했다는 말을 듣는 동안에는 지나치게 긴장하여 근육이 다 뻣뻣해졌을 정도였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다친 곳 없이 사태를 이쪽에 유리하도록 뒤집는 데 성공했으니 다행이었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키시아르는 누구보다 강한 능력을 지녔으나 그것을 사용해 본 경험이 많지 않고, 건강해진 지금도 항시 그릇 문제를 신경 써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그가 뛰어난 전략가이자 나뭇가지로도 벽을 가를 수 있는 소드 마스터임을 알아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 대 다수 전투는 극도로 위험했다. 게다가 남부에 온 뒤 평소보다 힘을 많이 사용하여 지치기도 하지 않았던가.
유더와의 접촉으로 도움을 받아 나아졌다고는 해도 오늘 이런 식으로 또다시 힘을 사용했으니 겉보기엔 괜찮아 보여도 또다시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을 터였다.
그래도 뻔뻔하게 웃고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만 보면 방금까지 혼자서 십수 명을 상대하다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가 평소의 키시아르 라 오르다워 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별일 없었던 것과 별개로 습격한 놈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테지만.’
유더의 싸늘한 시선이 남부 거점의 각성자들과 로브를 뒤집어쓴 남국인 상인들 쪽을 훑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자신에게 남은 힘을 가늠해 보았다. 아톤을 두들겨 팰 때 예상보다 많은 힘을 사용하느라 완벽하게 여유로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기 있는 놈들의 뒤통수 정도는 확실하게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균열은 아직도 그저 존재할 뿐,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대삼림에서는 저 균열이 사라진 뒤 몬스터가 다발적으로 나타났었지만 유더의 기억에 의하면 남부에서는 그랬던 적이 없었다.
‘이전 생의 남부에서는 저런 조용한 균열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열 번 이상 목격된 뒤 대지진이 일어났었어. 몬스터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고 했지. 만약 이게 그 시작이라면 이번에도 똑같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대삼림에서는 저 균열이 나타난 뒤 몬스터가 대폭 늘었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
이전 생 남부의 대지진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에 일어났던 일이다. 모든 일이 지나간 뒤에야 그런 균열을 목격했던 이들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정보를 찾기가 아주 어려웠다.
하지만 사실은 그때도 이런 식으로 균열이 생겨났던 것일까?
균열이란 것이 사람의 힘으로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아톤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다니며 계속해서 의문을 자아냈다.
‘확실한 건 답을 찾으려면 반드시 저 남국인 상인들을 붙잡아야만 한다는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키시아르를 습격한 건으로 반쯤 죽여 줄 생각이었는데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는 목적이 더해지니 없던 힘도 솟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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