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24화 (724/805)

724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사냥감은 분명 마병단이었을 텐데 몰이를 당한 건 그들 같다.

설마 마병단이 그들의 계획을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의 머리는 그럴 리 없다고 외쳤으나 마음은 달랐다. 그들은 혼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도무지 마병단의 포위를 뿌리치고 모두가 달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남국인 상인들은 그저 조용히 끼어만 있을 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다치고 쓰러지는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을 보면서도 이전처럼 친절히 돕지 않는 그들의 눈빛은 어쩐지 지극히 냉정해 보였다.

자신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아까 펠레타 공작의 손에 잡혀 위험할 뻔했음에도 마땅히 가져야 할 복수심 대신 뭔가에 정신이 팔리기라도 한 모습.

무언가를 가늠하거나 기다리는 듯 보이는 그들이 대체 무얼 바라는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라는 부디 그것이 약속했던 탈출의 기회이기를 바랐기에 약속대로 상인들을 최선을 다하여 지켰다.

그리고 부하들과 합류한 뒤로 어렵지 않게 승기를 잡아 가는 듯 보였던 펠레타 공작 또한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리는 와중에도 그런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단장님. 지부 주변의 건물들을 보호할 단원들의 배치 및 일반인들의 대피를 거의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능력을 써서 제압에 들어가도 될까요?’

‘본래대로라면 그래야 하는데… 좀 망설여지는군.’

‘예?’

‘느끼지 못했나? 저들 중 거의 힘을 쓰지 않고 교묘하게 끼어만 있는 자들이 있거든.’

아마도 서부에서 놓쳤던 남국인 상인들로 추정되는 자들.

그들이 아까 시도했던 기이한 마력 공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일까? 원인을 아직 확실하게 알아내지 못했는데 두 번 시도하지 않고 얌전히 웅크리고만 있는 교묘한 태도가 어쩐지 키시아르의 신경 한구석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키시아르가 보기에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 두 번째로 공격을 터트려 마병단에 피해를 입히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 탈출할 기회?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

처음은 불발시켰다지만 같은 공격을 두 번 한다면 그때도 시기 좋게 불발시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 마력의 흐름이 제대로 된 형태를 이루었을 때 무슨 결과를 이룰지는 키시아르조차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좀 더 훌륭하고 경험 많은 마법사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아까의 공격 시도와 불발된 흔적만으로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 자리엔 안타깝게도 그런 이가 없었다.

그들이 그 기이한 마력 공격을 다시 한번 터트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키시아르는 마병단을 함부로 나서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마력의 흐름을 키시아르만큼 확실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없을 테니 자칫하면 대응이 늦어 엄청난 피해를 입을 터였다.

때문에 그는 지부 주변의 대피와 대응 준비를 끝내는 즉시 본격적으로 제압을 시작하려 했던 계획을 잠시 보류하는 한편, 남국인 상인들의 주변을 끈질기게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최대한 안전하게 대응하고 피해를 줄이면서 저들의 속셈을 빠르게 드러내도록 만들 방법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바라 이런 짓을 했을까.

키시아르 라 오르의 머릿속에서 그려 낸 둥근 판 위로 수없이 많은 패와 말이 오고 가며 수십 개의 예상 전술과 결과를 그려 냈다.

그 끝에, 마침내 최선이라 판단할 만한 결론이 나왔다.

“-그들이 무슨 수를 두려 하는지는 파악이 어려웠으나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분명했지. 마병단을 상대할 셈이라면 나 외에도 한 사람의 행방을 필연적으로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점.”

키시아르가 그게 누구인지 당연히 짐작할 거라 믿는다는 듯 유더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물론 그건 바로 키시아르의 보좌, 유더 아일이었다.

적들이 급습했을 때 키시아르는 혼자였다.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할 나단 주커만과 유더 아일이 없다는 사실은 키시아르가 혼자 있었을 땐 신경 쓸 필요 없는 부분이었으나 그가 부하들과 합류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장점이었던 머릿수도 밀린 상황인데 마병단의 최대 전력으로 알려진 유더 아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적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놈들이라면 펠레타 공작이 혼자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님을 깨달은 순간 당연히 유더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물론 나단 주커만 또한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지만 그의 진짜 실력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리 생각하자 해야 할 일이 분명하게 보였다.

적의 목적을 모른다면 그들이 노리고 있을 기회를 만들어 주면 된다.

물론 그건 기회처럼 보이는 함정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려면 내가 방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최선이겠다 싶더군. 그래서… 그렇게 했지.”

“그건…….”

얌전히 듣고 있던 유더는 그 순간 찌푸린 얼굴로 무어라 말하다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열 명이 넘는 놈들을 상대로도 무기를 들지 않았던 이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 판단하여 신검까지 뽑을 정도의 공격이었다면서… 놈들 앞에서 일부러 방심을 꾀했다고?’

이해는 되지만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다. 평소의 키시아르가 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도리어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일지 확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간해선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의 수를 두려 하는 키시아르가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남국인 상인들의 목적을 파악하려 했다면 그만큼 그때의 공격이 제대로 먹혔을 때 엄청나게 위험할 거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가 안전을 지향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는 상황에서는 스스로의 피를 흘리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감수하는 사람임을 이전 생을 통해 이미 깨달은 바 있지 않던가.

거대한 페투아멧 앞에 맨몸으로 나서 스스로를 파괴하듯 내던졌던 그때의 키시아르가 잠시 머릿속에 어른거리며 손이 차가워졌으나 유더는 입술을 깨물어 그 기억을 멀리 날려 보냈다.

‘아니. 지금 다치지 않은 걸 보면 방심이라곤 해도 딱히 위험한 방식으로 진행한 건 아니었겠지. 일단 계속 들어 보자.’

그래도 무언가를 억지로 참듯 움찔거리는 눈썹과 차가운 냉기를 풍기는 표정은 유더가 느끼는 감정을 완벽하게는 숨기지 못했다.

“방심이라면, 어떤 식으로… 말씀입니까.”

“뭐, 뻔하지 않나? 병약하기 그지없는 몸으로 힘을 많이 써서 피곤하다고 큰소리로 외친 뒤에 뒷일은 심부름 보낸 보좌와 부관이 오면 맡기라고 하고서 술 마시러 안으로 들어가는 척을 했네. 열심히 싸우고 나면 목이 마른 법이니까.”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지.”

키시아르가 빙긋 웃었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주변의 단원들을 보았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끄덕이는 고개에서 저 말이 진짜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로?’

유더는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 물었다.

“그들이… 믿었습니까?”

“믿던데.”

대체 얼마나 제대로 된 진짜 연기력을 선보여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정말로 그 말을 믿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힘을 지녔을 서부의 영웅, 유더 아일이 자리를 비운 게 확실하며 알 수 없는 능력을 선보이던 단장 키시아르마저 지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적들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내가 방심하여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마력 공격의 징조가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네. 다만…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말이야.”

각성자의 능력을 사용하여 언제든 밖으로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키시아르는 징조가 느껴지자마자 신검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 띈 건 공격을 막아 내려 하는 단원들도, 적들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위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키시아르 또한 공격의 징조라 느꼈던 거대한 힘의 흐름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응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 속에서 하늘을 종이처럼 찢으며 드러난 새카만 균열이 음울하고도 불길한 모습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저 균열이었다는 겁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래.”

보는 것만으로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균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든 이들이 당혹했다. 공간을 찢고 나타나는 균열은 곧 그 안에서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이런 곳에서?!’

‘대체 뭐야. 도시인데 어떻게 균열이 생길 수가 있지?’

몬스터가 나타나는 균열은 생기는 시기도, 지역도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자주 나타나는 지역과 훨씬 덜 나타나는 지역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균열이 자주 나타나는 곳을 피하여 집을 짓고 살았다. 도시일수록 균열이 훨씬 덜 나타나는 지역이었고, 제국의 수도는 대마법사 루마의 가호가 어린 마법에 힘입어 천 년간 단 한 번도 균열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별안간 이런 도시 한복판에, 그것도 마병단 지부 위에 생겨난 균열이라니.

단원들은 단원들대로, 그리고 나그란의 별은 그들대로 곧 몬스터가 나타나리라 예상하여 허둥거렸으나 키시아르는 그들 중 가장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아니. 아니야. 저 균열은 몬스터가 나타나는 평범한 균열과 다르다.’

보통의 균열은 나타나는 즉시 몬스터를 뱉고서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저것은 그저 위에 떠 있기만 할 뿐 몇 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기묘한 균열을 그는 이전에 이미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서부의 사라인 대삼림에서였다.

아무리 베어 내도 사라지지 않고 울창해지기만 하는 삼림 내부에서 그저 존재하기만 하다 사라졌던 기이한 균열.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홀로 놀라지 않고 심각하게 응시하던 유더 아일의 모습.

꺼질 듯 지친 목소리로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던 유더의 목소리가 키시아르의 머릿속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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