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화
여태까지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여유롭게 적을 상대한 키시아르가 검을 뽑아 든 건 본능이 울린 경고에 반응한 판단이었다. 그는 보통 본능이 아니라 철저한 이성적 판단으로 행동하는 이였기에 이런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판단은 정확하게 들어맞아서, 신검을 쥐자마자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의 품속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마력 감응력을 지닌 마법사이기도 한 키시아르는 그 파동의 예상 흐름과 위험도를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예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접할 수 있는 보통의 공기와도 같은 마력이 아니었다. 마력이 점차 희미하게 소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는 보기 드문, 그 자체만으로도 온갖 신비한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짙고 순수한 힘의 흐름에 전신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형체를 이루지 않고도 충분히 위협적인 그 흐름을 맨몸으로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나 다행히도 키시아르는 각성자이자 기사였고 가끔은 마법사나 사제 노릇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 순간 ‘밀어내는 힘’으로 붙잡고 있던 로브 차림의 사내를 밀쳐내면서 동시에 검집 속에 잠들어 있던 검을 ‘끌어당기는 힘’으로 뽑았다. 겉보기엔 평범하다 못해 허름해 보이는 천으로 감싸인 검이었으나 그것은 바로 신검 오르였다.
펠레타 공작이 신검 오르의 새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에 대해 이미 아는 자들도 그 검이 설마 진짜 신검이리라 생각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는 설마 그 고귀한 신검을 그런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함부로 들고 다닐 리 없다는 강렬한 편견, 둘째는 그가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 전 검집에 부착해 둔 인식 저하 마도구 덕이었다. 사람의 외모를 흐릿하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그 마도구는 귀족가에서 종종 도둑의 눈을 피해야 하는 보물에 부착해 보호하는 데 쓰기도 했다.
후대에 덕지덕지 붙여진 보석이나 장식만 빼면 사실 그 검 자체는 몹시 시리도록 날카로운 은빛 날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외에는 그다지 특이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검은 신검.
명성에 비해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 그 검은 실체를 가진 적을 베는 날카로움만큼이나 ‘힘’을 베는 쪽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력이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소용돌이치며 뿜어져 나오던 바로 그 순간, 키시아르는 신검을 쥔 팔을 휘둘렀다.
유더가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불필요한 궤도를 그리지 않는 움직임 속에 실린 거대한 힘과 그 가치를 알아보았겠지만, 그는 이곳에 없었다.
일순 세상이 극도로 느려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은빛 검날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베어 내는’ 기이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다소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으나 키시아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검이 움직이는 궤도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침내 발해져 날아가려 하는 마력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벤 뒤에야 키시아르는 비로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제야 한없이 느려졌던 세상이 기다렸다는 듯 도로 돌아가며 본래의 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마력이 훅 하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고작해야 눈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기운이 폭발했다 여기며 쓰러져 뒹굴었을 뿐이었다.
쓰러진 자들은 몰랐으나 키시아르가 빠른 판단으로 검을 뽑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바람에 쓰러져 뒹구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한 마력의 흐름에 휩쓸려 끔찍한 일을 당했을 터였다.
같은 소드 마스터라 해도 여간해선 시도조차 못 할 일을 해내고도 키시아르는 그저 담담했다. 그는 자신이 그간 머리로만 알았을 뿐 실제로는 처음 써 본 신검의 힘과 그것이 자아낸 결과를 지켜보며 냉정히 결과를 파악하였을 뿐이었다.
‘이런. 피가 조금 묻었군.’
마력의 흐름을 베어 내기 위해 붙잡았던 자를 밀쳐내던 순간에 그자의 피가 옷자락에 묻은 듯했다. 키시아르는 뜻하던 바가 어긋나 당황한 듯한 그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뒤집어진 로브 사이로 남국인 특유의 붉은 피부색이 보였다. 피부가 보이지 않도록 로브를 쓴 이들은 알고 보니 전부 남국인이었던 듯했다.
이런 곳에서 하필 수상한 마력을 쏘아 보내려 한 남국인. 그리고 각성자. 짚이는 정체는 하나뿐이었다.
검을 쓰는 동안 사라졌던 웃음이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재차 스르르 떠올랐다.
‘찾기도 전에 먼저 와 주다니. 소중한 보좌와 부관을 보낸 보람이 없군. 그건 그렇고 이리 수상한 마력의 흐름이라…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세라와 그녀의 동료 각성자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그들은 도무지 펠레타 공작의 능력이 무엇인지, 방금 검으로 뭘 한 것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상대를 알 수 없다는 무지는 곧 공포가 되는 법이었다.
세라는 이 이상 남국인 상인들을 돕기 위해 여기서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은 마병단 남부 지부 근처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일단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젠장… 다들 빨리 일어나!’
‘으… 으으…….’
‘흐음. 벌써 가려고?’
펠레타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검을 든 손을 늘어뜨리고서 진심으로 궁금해하듯 묻는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는 오싹하게 비쳤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매복 중이던 이들이 공격한 마차에서 홀로 뛰어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황하거나 여유 없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제정신을 지닌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의 소문 중 많은 부분이 사실 거짓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작자란 소문만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몰아쉬는 세라의 근처에서 남국인 상인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펠레타 공작이 혼자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본래 몸을 피해 갈 예정이었던 곳에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군요.’
‘그게 무슨 소리죠?’
‘지금 우리를 도와줄 이들이 머무는 곳, 그리고 여기. 두 곳에서 동시에 엄청난 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펠레타 공작이 지닌 힘을 과소평가한 저희의 판단 실패입니다.’
세라는 남국인 상인들 중 한 명이 힘의 흐름을 몹시 예민하게 알아볼 수 있는 능력자임을 기억해 냈다. 그 능력으로 거점 근처로 다가오는 몬스터의 움직임을 금방 파악해 준 덕에 남부 거점이 상당한 도움을 받았었다.
이제 보니 몬스터만 알아보는 게 아니라 사람의 힘도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건가요? 당신들이 길을 열 수 있다면서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길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만 당신들이 시간을 좀 더 끌어 주어야…….’
바삐 말을 이으려던 남국인 상인이 별안간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마자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공작님께서 저기 계신다!’
‘…….’
다급히 뛰어오고 있는 자들은 마병단이 아니었지만 제국군 군복을 입고 있어 누가 보아도 키시아르 측 지원군이 맞았다. 왜 마병단이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부가 기어이 마병단에 제대로 도착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키시아르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계속 싸울 셈인가? 가능하면 이쯤에서 투항하길 바라고 있는데 말이지.’
‘…….’
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어이 지원군이 와 버렸다. 완전히 모든 게 망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국인 상인들은 상대적으로 침착해 보였고, 아직 뭔가 남은 한 수가 있는 게 분명했으므로 세라는 그들을 믿고 아직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뭐가 되었든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면야 도울 수 있었다.
‘모두 정신 차려! 먼저 공격해야 살 수 있어!’
그녀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동료들이 하나둘 일어나 재차 펠레타 공작과 다가오는 지원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떻게든 펠레타 공작 한 명만 물고 늘어지다 물러날 생각이었음에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은 어느새 지원군과 펠레타 공작 사이에 낀 듯한 형상으로 마병단 남부 지부 앞에 거의 가까워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에는 오늘 마병단에 가짜 지원을 할 예정이었던 나그란의 별 중부 거점 놈들이 마병단과 대치 중이기까지 했다. 증오스러운 마병단 놈들은 멀쩡히 귀환한 단장을 보자 사기가 오른 듯 환호를 외쳤다.
‘단장님!’
‘이야기는 대충 제국군에게 들었네. 갑작스런 상황에 고생이 많았겠어.’
기뻐하는 마병단 측과 달리 나그란의 별 측은 소리 없는 충격으로 가득했다.
중부 거점에서 남부까지 내려와 마병단 잠입 준비를 하는 동안 세라에게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그녀와 남부 거점의 각성자들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도무지 서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들이 오고 갔으나 정신없는 대치 상황 때문에 제대로 말을 나눌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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