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설마 옷에 묻은 피도 그때의 흔적입니까.”
“그런 셈이지.”
키시아르는 자신의 옷에 묻어난 핏자국을 그제야 새삼 인식한 듯 짧게 훑었다. 그에게는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겠지만 유더는 그 자국을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심장의 거센 고동이 아직도 선명했다.
유더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하게 가라앉는 동안 키시아르는 미소를 지으며 간략히 제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보좌를 보내고 지부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마차가 방향을 잃고 정신없이 흔들리더니 화살이 날아들지 않겠나? 밖으로 나가 보니 처음 보는 이들이 달려들더군.”
타고 가던 마차에 별안간 눈먼 화살이 꽂히는 일이 익숙하다고 말한다면 참 이상해 보이겠지만, 키시아르는 실제로 그런 일에 익숙한 이였다. 선황이 서거한 이후 케일루사 황제와 그에게 암살 시도는 거의 일상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펠레타에서 눈에 띄지 않고 사는 동안에도 잊을 만하면 교묘한 암살 시도가 그의 목숨을 노렸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을 몸이라 알려졌음에도 기왕이면 확실하게 먼저 숨을 끊고 싶어 하는 자들이 어디에나 있었던 탓이다.
키시아르는 정신없이 뒤흔들리는 마차 속에서도 홀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균형을 잃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밀고 당기는 힘을 섬세하게 운용한 덕이었으나 눈을 의심케 할 만큼 비현실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펠레타 공작 전하! 괜찮으신지요?’
그때, 마차 내부와 이어진 작은 문을 연 마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큰 목소리로 위험을 알렸다. 공격을 받아 멈추어야 하는데도 말이 미친 것처럼 명을 듣지 않으니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장애물이 없는 지점에서 뛰어내려야 할 것 같다는 그의 말에 키시아르는 놀라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군.’
‘죄송합니다! 저는 최대한 말을 멈추어 보려 노력할 테니…….’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내가 먼저 내려서 적들을 상대하면 자연히 이쪽에는 제대로 신경 쓰지 않게 될 테니, 그 틈을 타 그냥 이대로 계속 달리는 게 좋을 거야.’
‘예?’
마부가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몸을 움직이면서도 귀를 의심하며 외쳤다. 그는 작은 문을 연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화살이 그들이 탄 마차에 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도 모두 밀어내는 힘을 응용한 덕이었으나 키시아르는 그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말을 갑자기 멈추게 하는 건 말에게도, 자네에게도 지나치게 위험하지. 잃지 않아도 될 목숨을 굳이 여기서 버릴 필요가 있겠나?’
‘예?! 하,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마병단 지부야. 틈이 벌어지는 대로 그곳으로 직진해 지원을 불러오게. 뭐, 두어 명 정도는 뒤를 따라붙겠지만… 자네가 내 말을 믿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지원이라니? 키시아르 혼자 도망치라는 뜻으로 뛰어내리라 말했는데 정작 돌아온 답이 뭔가 이상하다. 마부가 당황했지만 키시아르는 두 번 설명하지 않았다.
마차 문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별안간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바람에 위험하게 덜걱거리는 문을 보면서도 키시아르는 미동 없이 일어나 곧 편안하게 내리려는 사람처럼 바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지금은 안 됩니…… 전하!’
아직 문을 열 때가 아니라 판단했던 마부가 그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며 놀라 비명을 질렀으나 키시아르는 놀랍게도 아무런 충격 없이 사뿐하게 땅을 밟았다. 제 눈을 의심하는 마부의 경악 속에서, 마차를 공격하던 화살비가 뚝 그치고 정체 모를 이들이 속속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차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신기할 정도로 앞길이 텅 비었다.
모든 것이 키시아르가 말했던 대로라는 걸 깨달은 마부는 펠레타 공작을 노리고 다가가는 괴한들의 모습만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채 이를 악물고 미친 듯 내달리는 말고삐를 잡고서 남부 지부 방향으로 힘껏 방향을 틀었다.
사라져 가는 마차를 확인한 키시아르는 뜻을 알기 어려운 미소와 함께 자신을 둘러싼 자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들의 머릿수는 총 열다섯 정도. 암살을 하러 왔다기엔 대단히 기척을 감출 줄 모르는 자들이었고 차림새 또한 전투에 최적화된 옷이 아니라 평범한 평민들의 옷가지를 입고 있었다. 중간에 낀 몇몇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로브를 걸치고 있기는 했어도 묻혀서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대부분 각성자로 보였다.
무기를 겨눈 채 흥분과 떨림으로 빛나는 눈빛들. 그러나 그 속에는 이 상황에 익숙지 않은 자들다운 염려와 공포도 숨길 수 없이 엿보였다. 키시아르를 둘러싸 놓고도 그의 외모와 흔들림 없는 미소에 기가 눌린 듯 차마 바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키시아르는 친절히 먼저 물었다.
‘이런 곳에서 맞이하기에는 손님이 참 많군. 어디서 온 이들인지는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대답하지 마. 펠레타 공작 또한 각성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했잖아! 뒤로 물러나!’
‘세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질문에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 뻔한 것을 어떤 여자가 막았다. 이 집단 내의 리더 격 인물이 그녀인 듯했다. 키시아르는 찔끔한 이들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이름을 못 들은 척하면서도 잘 기억해 두었다.
시선과 관심은 다른 데 두는 듯 보이면서도 귀를 항시 열어 두고 필요한 것들을 기억하는 건 그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이들은 이미 키시아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알고서 뒤쫓아와 공격했다는 건 이 일이 운이 좋아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대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키시아르조차 알지 못했던 헤른 2공자의 죽음과 그로 인해 그가 자리를 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예상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저들이 헤른 2공자를 죽인 배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라라는 이가 그 정도로 노련하고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데, 과연 이 집단을 진짜로 움직이는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 키시아르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눈동자 너머로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할 추측력을 발휘하여 거의 정답에 가까운 판단을 도출해 냈다.
그러나 그가 저 집단 내에 있을 ‘진짜’ 리더를 찾아내기 전, 적들 또한 이 이상 머뭇거려선 안 된다고 판단한 듯 재차 달려들었다.
‘너희 셋은 마차를 뒤쫓아! 나머지는 예정했던 대로 움직인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
마차를 쫓는 이가 셋이라. 마부가 키시아르의 명을 잘 기억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중이기를 바라야 할 듯했다.
세라의 명이 떨어지자 제법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문 암살자들에 비하면 노련함이 전혀 없고 마병단원들에 비해도 힘을 다루는 섬세함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각성자는 각성자다. 그들은 경험의 부족을 기상천외한 능력으로 어떻게든 메꿀 줄 알았다.
훈련을 해 본 티는 난다. 다만 그게 정석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키시아르는 밀고 당기는 힘을 이용하여 몸을 아주 빠르게 움직이면서 공격을 피했다. 실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음에도 적절한 조절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듯 보이게 만들자 적들은 바짝 약이 올랐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피하는 거야!’
‘내 화살이 닿지 않아!’
‘바보들아. 저게 공작의 능력일 거라고. 말려들지 마! 계속 공격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라의 얼굴 또한 예상외의 상황에 일그러졌다.
펠레타 공작은 오만하게도 혼자였으며 허리에 찬 검조차 꺼내지 않았다. 병약하다던 소문과 달리 대단한 장신에 체구도 단단해 보여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그래 봤자라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그가 가진 능력의 전부라면 그리 위협이 될 수준도 아닌데, 어쩐지 이상하게도 공격을 맞출 수가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그들은 빠르게 허를 찔러 펠레타 공작을 비롯한 마병단의 핵심을 공격하고 물러나야 했다. 외곽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도시 내에서 전투로 시간을 오래 끄는 건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젠장.’
세라의 곁에서 동료 한 사람이 거세게 쏘아 보낸 짧은 나뭇가지가 비수처럼 날아들어 펠레타 공작을 노렸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동시에 급소 여러 곳을 노린 그 공격 또한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펄럭이는 옷자락이 날카로운 공격에 스쳐 찢어지는 광경이 쓸데없이 유려했다.
어떻게 열 명이 넘는 적의 공격을 동시에 피하면서 저리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키시아르 쪽이 그들 개개인의 공격을 점차 잘 파악해 나가는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사실 그 생각은 사실이었고, 키시아르는 정말로 일부러 그들의 공격을 지켜보며 정보를 파악 중이었으나 세라의 상식으로는 거기까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더 지나면 오히려 그들이 펠레타 공작에게 밀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세라는 초조함에 사로잡힌 채 저도 모르게 이 공격을 제안하고 정보와 틈을 알려 준 협력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전신을 로브로 감싼 채 공격을 돕고 있던 남국인 상인 중 한 사람이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펠레타 공작의 허를 찌르고 나면 틈을 타 남국인 상인들이 도망치기 쉽도록 어떤 방법을 써서 길을 내줄 거라고 했었다.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그 방법을 지금 쓰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세라의 눈빛을 받은 그는 아직은 물러나선 안 된다는 듯 분명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라가 입술을 꽉 깨물고 공격 패턴을 바꾸라고 명령하려 했던 그때, 그녀는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럴 리 없음에도 일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꿰뚫린 듯한 느낌에 그녀가 움찔한 순간, 키시아르는 유쾌한 기분으로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찾았다. 역시 그쪽이 이들을 이끌고 온 진짜 ‘머리’군.’
지목당한 남국인 상인이 일순 흠칫 몸을 굳혔다.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피하기만 하던 것을 멈추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의 움직임은 무엇이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순식간에 목을 잡힌 남국인 상인이 발버둥 치며 무기를 휘둘렀다.
또 다른 남국인 상인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외치며 품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 키시아르 쪽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폭발하며 엄청난 압력으로 그들 모두를 뒤로 밀어냈다.
세라와 동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져 뒹굴었다.
‘으아악!’
‘무, 이게 무슨……!’
그들은 흙먼지를 뱉어 내며 어지러운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먼지 속에서 은빛 검을 쥔 펠레타 공작의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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