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나그란의 별 중부 거점에서 왔다는 놈들은 바라던 대로 마병단에 잠입하기도 전에 정체와 목적을 탈탈 털리고 놀라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나그란의 별은 한 집단 소속이라도 같은 거점 출신이 아니라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 내분이 한참 물밑에서 진행 중인 데다 마병단의 새 단원 모집 소식으로 한창 뒤흔들리는 중이니 일을 하려 해도 손발이 맞을 리가.’
이전 생의 기억을 통해 그들이 내분으로 망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예상한 건 유더였고, 조건 없는 대대적인 2기 단원 모집 소식과 마병단의 협력자 명단을 퍼트려 현자와 나한의 힘을 뺄 계획을 짠 건 키시아르였다.
그리고 지금, 그 예상과 계획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유더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연신 실실 웃는 동료들과 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의 얼굴을 훑었다.
현자가 제 본거지가 있는 남부 쪽에서 본격적으로 손을 쓰리란 건 이미 서부에서부터 짐작했던 바다. 그래서 본래는 남부를 떠나기 전에 대대적으로 한 번 지원자들을 솎아 내고 주변 청소를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일이 처리될 줄은 몰랐다. 기분이 제법 생경했다. 심지어 솎아 낸 방법이 연기라니. 그건 유더가 여기 있었어도 생각하지 못했을 방식이었다.
남부 지부의 단원들과 전 나그란의 별 합격자들이 연합하여 벌인 연기는 사실 아주 간단했다.
우선 합격자들은 중부 거점의 각성자들 근처를 얼쩡대며 같은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음을 눈치챌 만한 대화를 흘렸다. 그 뒤 단원들이 현재 마병단의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은 듯 가장하면서 간자라면 알고 싶어 할 만한 가짜 정보를 슬쩍 내비쳤고, 합격자들과 함께 내부 정보 이야기를 나누는 척 심각하게 굴었다.
중부 거점의 각성자들이 보기에는 합격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온 이들이며 이미 마병단에 들어가 정보 수집을 어느 정도 끝낸 상황이라 착각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결국 애가 탄 그들은 먼저 합격자들을 찾아와 자신들의 정체와 목적을 드러냈다. 마병단원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쉽게 그들을 모조리 색출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라면 그냥 지원자들 전체를 상대로 힘을 써서 빠르게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었겠지. 이전 생의 마병단이라도 나와 똑같이 했을 테고.’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이 전혀 다른 연기라는 방법을 택한 건 아마도 서부에서 이미 한번 비슷한 경험을 해 봤으며 그것이 의외로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경험을 그들에게 선사해 준 이가 누구였던가. 바로 눈앞의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보고 배우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그간 마병단원들을 지켜보며 몇 번쯤 느낀 바 있었으나 그것이 유더에게 오늘만큼 확연하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래. 훌륭한 방법으로 적들의 정체를 밝혀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들을 잡아들이기 전에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더 일어났네. 사실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진짜 원인이기도 하지.”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한결 침착함을 되찾은 유더의 안색을 확인한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한 덩어리로 뭉쳐 혼란스러워하는 적들과 그 사이에 끼어 전신을 가린 수상한 자들을 훑었다.
“모두 색출했다 생각했던 간자들 사이에 합격자들이 목격했다던 남부 출신 각성자가 없었네. 아까 들었을 테니 그게 누구인지는 알겠지?”
“남부 거점의 임시 지도자라던 그 사람 말입니까.”
이름이 세라라고 했던가. 유더는 낯선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그래. 그자는 놀랍게도 간자들이 활동하던 시각에 이 지부를 노리지 않고 다른 쪽을 노렸거든. 어디인지 짐작이 되는가?”
유더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재크를 비롯한 아이들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분명 여기에 어떤 목적이 있어서 왔을 것이다. 현자가 없을 때 거점을 책임지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이가 마병단원으로 잠입하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이니 지부 쪽으로 오지 않은 게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잠입이 목적이 아니라면 남부가 익숙지 않을 중부 거점 소속 각성자들을 뒤에서 돕거나 안내하는 역할 정도를 맡겼을 거라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오히려 동 시간대에 다른 곳을 노렸다?
그렇다면 왜, 무슨 이유로, 과연 어디를 노렸을까.
추측 가능한 다른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 사람은 남국인 상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이번 헤른 2공자의 사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놈들의 뒤에 있는 건 바로 그놈들이다. 그자들의 목적이 헤른을 뒤집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병단에게 뒤집어씌워 해를 입히는 곳까지 뻗쳐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유더가 방금 두들겨 패 기절시키고 온 아톤이 언급했던 ‘자신들 외에 마병단을 노리는 자’가 현자와 나그란의 별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걸 염두에 두고 거꾸로 되짚어 보면 이 사태가 상당히 새롭게 보였다.
남국인 상인들이 협력 관계로 얽힌 세라를 통해 현자가 남부에서 무엇을 준비하려 하는지 미리 접할 수 있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당연히 자신들이 벌이려 하는 짓에 현자의 계획까지 슬쩍 얹어 겸사겸사 마병단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 머리를 썼을 터다.
‘한번 얽힌 협력 관계는 충분히 두 번, 세 번도 얽힐 수 있지.’
협력이란 단어는 상호 보완적이다. 남국인 상인들이 세라와 남부 거점을 도왔다면 세라 또한 남국인 상인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똑같이 도와야만 했을 거란 뜻이다.
유더의 머릿속에 남국인 상인들이 이전처럼 세라와 남부 거점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여 이 계획에 교묘하게 끼어드는 광경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내분으로 인해 거점을 비우는 게 극도로 위험해진 상황이었을 테니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이상했으리라.
현자가 남국인 상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론적으로 세라가 그들과 함께 움직인 건 확실해 보였다.
남국인 상인들은 나그란의 별이 어떻게 움직일지, 그리고 헤른 2공자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이미 알고 있었을 터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음에 노릴 만한 건 하나뿐이었다.
‘자신들이 죽인 헤른 2공자 때문에 조사를 하러 마병단 지부를 잠시 떠난 사람들.’
그중에서도 정확히는… 마병단의 중심인 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
그는 각성자이지만 지닌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신검의 주인이기는 하나 그 사실조차 제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들이 많다. 몸은 병약하고 머리는 나쁘며 멍청하고 놀기 좋아하는 자라 알려졌으니 이보다 만만하면서도 타격감이 좋을 목표가 또 있을까.
게다가 키시아르는 헤른 2공자의 시신 조사를 끝낸 뒤 부관 나단 주커만조차 어디론가 먼저 보내고 유더만 데리고서 마차에 타기까지 했다.
유더의 명성이 서부 사건을 해결한 이후로 상당히 높아졌다지만 이전 생처럼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포를 안겨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였고 서부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내보인 채 남국인 상인들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애송이 하나 정도만 붙어 있다고 여겼다면, 세라를 비롯한 남부 거점 쪽의 힘까지 빌려 수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자신들 쪽이 유리하다 판단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심지어… 그 유더조차 중간에 몰래 내리지 않았던가.
키시아르는 지부에 돌아갈 때까지 혼자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유더의 전신에 전율과 비슷한 소름이 끼쳤다. 그의 눈이 깊이 침잠하며 메마른 입술 사이로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설마, 단장님이 탄 마차라도 노렸습니까?”
말은 ‘라도’라고 했으나 심증은 거의 확고했다.
그리고 유더의 생각이 맞다는 듯 키시아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야.”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이없는 감정과 분노가 뱃속 깊은 곳에서 부글거렸다.
키시아르의 진정한 실력을 알고 있으니 그가 갑작스런 공격 따위에 당해 주지 않을 사람임은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다만 그 자리에 자신이 없었다는 게 화가 났다.
유더는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물었다.
“……설마 옷에 묻은 피도 그때의 흔적입니까.”
“그런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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