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엮인 사람이 아주 많고 자칫 잘못하면 책임 소재가 끝도 없이 번질지도 모르는 건이라면 더더욱 입을 다물고 사는 쪽이 낫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저희가 지원할 때부터 단체로 함께 온 사람들이라는 건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요. 전에는 겁이 나 어디서 왔는지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사실 저희들은… 각성자만 모여 지내는 어떤 집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입니다.’
‘각성자만 모여 지내는 집단? 그런 게 있습니까?’
서부에서 나그란의 별과 얽혀 본 마병단원들은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조용해졌으나 제국군 특수부대원들은 아무것도 몰랐기에 어리둥절했다. 제국군 한 사람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묻자 재크를 비롯한 이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대표격 각성자, 다곤이란 이름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성한 뒤 고향에서 핍박받다 도망친 이들이 알음알음 모여 만들어진 곳이지요. 몇 개의 거점 마을이 있고 나름의 규칙이 존재합니다. 한때는 괜찮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곳도 아주 안전하게 여겨지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뜻을 함께하는 이들끼리 모여 몰래 이곳까지 왔다. 때마침 마병단에서 새로운 단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한 뒤, 다곤은 한결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지냈던 곳에는 저희처럼 그저 외부와 상관없이 조용하게 살고 싶은 이들도 많았습니다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힘으로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 완벽한 안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기껏 강해졌으니 그 힘으로 비각성자들… 그러니까, 음, 귀족들의 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죠.’
실로 위험한 발언에 모든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 다곤 또한 그런 반응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면 그가 이 발언을 얼마나 어려운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짐작되었다.
‘아무튼 저희가 왜 저 아이들이 보았다고 말한 사람들 때문에 놀랐는가 하면,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집단을 떠날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마병단 지부 근처에서 목격되다니… 절대 믿지 못할 얘기죠. 뭔가 좋지 않은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단 판단이 들 정도로요. 특히 세라… 그녀는 한 거점을 이끄는 임시 지도자였어요. 그런 이가 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다곤을 비롯한 남부 거점 탈출자들이 그곳에서 빠져나오기로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는 현자가 없는 사이 거점을 맡아 이끌던 세라가 남국인 상인들과 지나치게 긴밀해졌기 때문이었다.
세라는 본디 걱정이 많은 성격으로, 수도로 간 현자 측에서 연락이 잘 오지 않자 만약의 사태에 남부 거점을 지킬 방법이 없을까 봐 불안해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그때는 집단 내의 불온분자와 같던 나한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거점을 떠난 상황이었다.
나한을 따라가진 않았지만 그의 사상에 동조하던 이들과 현자를 따르는 이들 사이의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했던 시기. 세라는 현자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숭배하는 성향이었기에 내분을 제대로 중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곪아 들어갔다.
바로 그때 나타난 이들이 때마침 마을에 방문한 남국인 상인들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나한을 보기 위해 찾아온 듯했으나 그가 떠났다는 걸 안 뒤에도 어쩐지 거점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머물렀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나그란의 별에서는 같은 각성자라면 누구든 일단 받아들여 주는 게 관례였기에 그들의 행동을 묵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중이었기에 그들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보이기가 어렵기도 했다.
내분이 계속되자 기어이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중립을 지키며 그저 온건하게 살기를 원하던 각성자들은 그 상황에 큰 위협을 느꼈다. 소리 없이 마을을 떠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곤은 아직 마을을 떠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 마을이 위험에 처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힘을 합치면 금방 해결할 수 있었을 문제였는데… 세라는 서로를 믿지 못한단 이유로 외부의 힘을 빌리기 시작했죠.’
현자를 따르던 세라는 몬스터의 위협 속에서 나한을 따르는 이들과 힘을 합치는 게 몹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제대로 싸우지 않고 배신하거나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한을 따르는 이들 대신 남국인 상인들과 손을 잡기로 했다. 그리고 무사히 몬스터를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현자 파와 나한 파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현자 파는 나한 파가 없이도 마을을 지킬 수 있다는 걸 확인했고, 나한 파는 자신들이 배제된 상황에 격렬히 분노했다.
남국인 상인들은 이후 세라와 급속도로 긴밀해지며 자신들의 동료까지 마을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이루어진 일에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나왔으나 그런 이들은 나한 파로 몰려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 심지어는 거점의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집에 갇힌 이도 있었다.
본래 남부 거점에서 지내던 이들은 몰라도, 다곤을 비롯한 서부 거점 출신들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으며 남국인 상인들 또한 찝찝하다 여겼다.
그런 때에 그들에게 날아든 전 동료, 로벨이 보내 준 마병단원 모집 정보 편지는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외부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던 정보와 달리 로벨은 마병단에서 일을 도우며 머무는 자답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결국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다곤은 이 이야기에서 나한이나 현자 같은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외에는 그럭저럭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이제 저희가 왜 놀라고 수상하다 여겼는지 대충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세라는 평소 마병단이 저희를 핍박한다고 말하며 싫어하던 사람입니다. 저희의 행방을 뒤쫓아 잡으러 온 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목적일지 짐작되지 않아요. 적어도 마병단에게 호의적인 목적은 아닐 겁니다.’
‘일리가 있군요. 중부 거점이란 쪽도 마찬가지일까요?’
마병단원 중 한 사람이 심각하게 물었다. 다곤이 고개를 조금 흔들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들 중에도 어쩌면 저희처럼 몰래 빠져나와 마병단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수도로 가는 쪽이 훨씬 빠를 텐데 왜 이 먼 곳까지 왔을까요? 저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다곤의 말대로 중부에 위치한 곳에서 사는 이들이라면 수도로 가는 쪽이 훨씬 빠르다.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여 마병단에 지원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굳이 남부로 오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다곤은 이 점을 지적한 뒤 조금 더 망설이다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쩌면 저희 꼬마 녀석들이 사람을 잘못 봤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마병단 전체가 의심받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다무는 건 안 될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을 찾아 목적을 확인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예의 바르게 말해 본 경험이 적어 말투가 아주 어색해지긴 했지만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만은 분명했다. 다곤의 곁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다른 일행들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마병단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심각하게 마주 보았다. 마병단장도, 유더도, 그들이 없을 때 단원들을 이끌었던 쿠르가도 없으니 이젠 그들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정체와 진의를 의심해야 하는가.
단장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확인해 보는 쪽이 좋을까.
“-어려운 결정이었겠지. 하지만 결국 모두 그 이야기를 그냥 넘기지 않기로 결정하고 지원자들을 보러 갔다더군.”
여기까지 있었던 일을 전달해 준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모두 참 장하지 않나? 마병단이 위험에 처했다 판단되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스스로 움직일 만큼 다들 성장했다는 게 말이야.”
“다, 단장님…….”
키시아르의 칭찬에 주변에 있던 단원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사고를 쳐 혼날 줄 알았다가 칭찬받은 강아지들 같은 반응이었다.
‘뭐… 확실히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력이긴 하군.’
윗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게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머리가 되는 윗선의 명령을 따르는 게 존재 의의이자 최선인 일반 병사들과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마병단은 요구되는 행동 방침부터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유더는 동료들을 흘긋 돌아본 뒤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확인 결과 지원자들 사이에 처음 알아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나그란의 별 중부 거점 소속 각성자들이 있었다고 하네.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척하며 가명을 사용하여 지원한 상태였지. 처음엔 아닌 척했으나 단원들과 합격자들이 연합하여 연기를 하자 속아 넘어가 목적을 밝혔다더군.”
그런 일까지 해냈다고? 유더는 다시 한번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그사이에 쏙쏙 고개를 내밀고 있던 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이 유더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몹시 쑥스러워했다.
“……함정을 제대로 파다니, 대단한 일을 했군요.”
“그렇지?”
키시아르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들의 목적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마병단에 잠입하는 것이었네. 누구의 지시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뭐. 곧 알아낼 수 있겠지.”
나그란의 별에서 마병단에 잠입하라는 지시를 내릴 만한 놈이 또 누가 있겠는가.
유더는 현자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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