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9화
‘키시아르.’
살아만 있다면, 목숨만 붙어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제가 처리할 수 있다고 수없이 되뇌며 달려왔다. 그 바람 덕인지는 알 수 없으나 키시아르는 분명히 살아 있었으며 스스로의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을 만큼은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이전과 같은 상태였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키시아르의 구김 하나 없던 옷자락은 얼룩과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부분에는 희미하게 붉은 핏자국도 비쳤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기보다는 어디선가 뿌려진 흔적처럼 보였지만 그가 검을 뽑아 든 채 피를 묻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더는 가슴이 새카맣게 가라앉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머리가 차가워지며 심장이 빠르고도 불온하게 뛰어 댔다.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키시아르의 전신을 훑어 확인한 유더처럼 키시아르 또한 먼 곳에서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도 유더의 더러워진 뺨과 전투의 흔적으로 찢어진 옷자락 등을 분명하게 확인했으나 유더처럼 감정이 표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유더!”
“어디?”
“저기, 지붕 위에 유더가 왔어!”
그때, 키시아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여 고개를 돌렸던 주변의 사람들이 유더를 발견하고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쳤다. 유더는 그제야 이곳에 키시아르만 있는 게 아니라 몹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병단 남부 지부 앞이니 사람이 많은 게 당연한 일인데도 키시아르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스스로를 향한 어이없는 감정과 더불어 이성이 겨우 고개를 쳐들었다.
“후…….”
유더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날카롭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래를 조금 더 면밀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훑기 시작했다.
키시아르 주변의 수많은 이들 중 일부는 마병단 단복을 입었고, 일부는 제국군 군복을 입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능한데, 그들 주변에 평상복을 입은 채 무기를 든 이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지부 내에서 평상복을 입은 이들은 대부분 아직 정식 입단을 하지 않은 마병단 지원자거나 합격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가 저렇게까지 많진 않았을 텐데?’
평상복을 입은 이들 중 마병단과 제국군 내에 섞여 있지 않은 나머지 대부분은 키시아르의 맞은편에 마치 대치라도 하듯이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건 대치 중인 이들끼리도 애매하게 두 집단으로 나뉜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뭐지?’
전투가 일어났던 것 같기는 한데 분위기가 영 어수선하다. 유더는 더 이상 살펴보아도 의미가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바람을 밟고서 뛰어내렸다. 바람이 머리칼과 옷자락을 마구 뒤흔드는 가운데, 그는 허공을 찢듯이 꿈틀거리는 새카만 균열을 조용히 응시하며 착지했다.
“어어!”
유더가 이토록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걸 처음 본 듯한 이들이 제각기 경악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유더는 자신의 다리 상태를 걱정하듯 흘끔대는 이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냉랭한지 그를 부르며 다가가려던 사람들조차 감히 끼어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가 향한 곳에는 당연히도 키시아르가 있었다.
“…….”
달려오는 동안 그토록 수많은 생각과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약동하는 감정들을 느꼈음에도 정작 그를 마주하자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없었다. 헤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을 텐데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찾아들었다.
무사하여 다행이라거나, 마도구가 갑자기 작동하여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는 등의 말 대신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건 결국 단 한 마디뿐이었다.
“…단장님.”
한숨 같은 작은 부름을 들은 키시아르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유더는 그에게 딱히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시아르는 이미 유더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마도구의 이상 작동 때문에 돌아왔나?”
“…예.”
“그래. 많이 놀랐겠군. 이쪽에서 예기치 못한 뜻밖의 일이 일어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마도구 일부가 멋대로 반응했거든. 보시다시피 아직까지는 별일 없었네.”
역시 마도구의 작동은 구조 신호가 아니었다. 나단 주커만의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이 유더에게 안정을 선사했다.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날 선 칼과 같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씩 고요해졌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쥐고 있는 검에 시선을 주었다. 수도를 떠난 이래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던 그것은 천으로 손잡이를 감싼 신검 오르였다. 그가 신검을 꺼내야 할 만큼 이곳의 상황이 급박했던 것일까?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 전에, 다치지 않겠다고 약조하고 떠났던 이의 꼴이 엉망이 된 이유부터 듣고 싶은데 말이지.”
키시아르가 눈짓으로 유더의 찢긴 옷자락을 가리켰다.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부드럽게 웃고는 있으나 눈빛을 보니 이 사항에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화제로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다.
“……그건.”
향했던 곳에서 남국인 상인들을 만나 싸우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걸 대체 어떻게 해야 키시아르가 불편하지 않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와중에 그가 주었던 사탕들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까지 다시 떠오르자 이미 기절할 때까지 패고 온 놈들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 뻔했다.
‘떠올리지 말자. 지금 상황에서 더 생각해 보았자 도움 될 일이 없으니.’
유더는 사탕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안쪽 깊은 곳으로 꾹 밀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콘체 남작가에서 헤른 2공자의 사라진 하인과 말, 그리고… 저희가 쫓던 남국인 상인들을 찾았습니다. 역시 모두 한통속이더군요.”
보기만 하고 돌아오는 것보다는 빠른 제압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상대하던 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아톤이란 놈이 지껄인 심상치 않은 소리와 갑자기 이상 작동한 마도구 때문에 급히 돌아왔다. 지극히 객관적이면서도 짧고 간결한 유더의 설명을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그러면 뒷정리는 나단이?”
“예. 주커만 경은 곧 따라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나단이라면 믿을 수 있지. 우리 쪽에서 일어난 일과 그들이 연관이 있다는 게 이로써 확실해지겠군.”
대답한 키시아르가 잠시 유더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거기서 그들을 살펴만 보지 않고 증거와 증인을 확보한 건 훌륭한 결정이었네. 물론 약간 무모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 일이 끝나고 찬찬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키시아르라면 역시 유더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바로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다치지 말라는 명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것도 맞으니 유더는 두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예.”
“그래도 지금은 이쪽에도 이상한 일이 생겨 두 사람을 걱정하던 참에 마치 마음을 읽힌 것처럼 다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더욱 기쁘군.”
키시아르가 작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혹시라도 키시아르와 유더가 나누는 대화가 심각하게 번질까 우려하며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던 주변의 분위기가 그의 부드러운 웃음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유더가 어딜 가서 안 오나 했더니 단장님이 보낸 거였구나.”
“아무튼 우리 마병단 최고의 성질이 와 줬으니 이제 저놈들도 다 끝이다!”
유더는 주변에서 들끓는 호전적인 목소리들을 들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앞쪽에 대치하듯 서 있는 평범한 옷차림의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전부 각성자들인가.’
그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뛰어내린 유더의 등장에 몹시 당혹한 듯 보였다. 언뜻 보아서는 차이를 알기 어려웠으나 유더는 아까 위에서 그들 사이에 두 소집단이 존재함을 확인하였기에 분위기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첫 번째 집단은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불안으로 뒤덮인 눈빛 사이로 낮은 욕설과 신호 같은 대화들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집단은 대체로 아주 조용했다. 그들은 경계와 침묵 속에서 여차하면 달려들 듯 무기나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유독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철저하게 가린 자들도 몇 명 낀 상태였다.
‘저놈들이 아톤이 말한 그… 우리를 노린다던 자들인가. 일부만 그런 건지 전부 다를 지칭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군.’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 키시아르가 적절한 타이밍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저자들은 오늘 새벽같이 가장 먼저 지부로 들어와 있던 오늘분의 1, 2차 시험 지원자들이네. 아니, ‘이었다’고 해야겠지.”
헤른 2공자의 사망 소식으로 마병단 남부 지부에 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마병단 내에는 이미 지원자들이 여럿 와 있었다. 기사들이 내부를 수색할 때 그들 쪽도 물론 살피긴 했으나 그들을 지나치게 수색하거나 캐묻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지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헤른 2공자와 그의 하인, 그리고 말의 흔적을 찾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고, 한편으로는 이 사건의 범인이 헤른 2공자가 누군지도 모를 평민 외지인 놈들 중에 있을 가능성은 무척 낮다 여긴 탓이었다.
키시아르와 유더가 기사들과 함께 헤른 2공자의 시신을 보러 떠난 뒤, 마병단 지부에서 진행하던 모든 업무는 잠시 중단되었다. 지원과 시험을 감독하던 단원들은 단장이 돌아올 때까지 일을 중단하고 지원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표했다.
모든 이들이 갑작스레 강제로 쉬게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삼삼오오 모여 이 흉흉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평소라면 마병단은 마병단끼리, 지원자는 지원자끼리, 제국군은 제국군끼리 모여 익숙한 얼굴들 속에서 떠들었겠지만 살인 사건이라는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원인 앞에서는 소속을 가리는 게 무의미했다. 조사 때문에 지부 내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밖에 나와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뒤섞여 한마음으로 걱정과 추측을 이야기했다. 혹시 수상한 걸 본 적은 없는지, 어제부터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도 머리를 맞대고 끙끙대며 토론했다. 그중에는 바로 어제 마병단의 전설 유더 아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유더 아일과 대결할 뻔했다가 겨우 목숨을 구한 소년 재크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어, 그러고 보니…… 그제 길을 걷다가 좀… 여기 있어선 안 될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해요. 수상한 사람이라고 하면 전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여기 있어선 안 될 사람?’
‘근데 제 착각일지도 몰라요. 진짜 말도 안 돼서…….’
‘그게 누군데, 재크?’
재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망설이다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 세라…… 누나요.’
‘뭐? 세라가?’
‘말도 안 돼!’
재크와 함께 나그란의 별 남부 거점을 탈출했던 이들이 일제히 그 말에 반박했다. 그러자 그날 재크와 함께 지하 격투장 신청서를 내러 갔던 어린 각성자 한 사람이 주눅 든 목소리로 손을 들었다.
‘저도 봤어요. 저도 처음엔 잘못 본 줄 알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재크도 봤다면 맞는 것 같아요.’
‘…진짜란 말야? 세상에.’
‘설마 우릴 쫓아온 건가…….’
‘그, 그런데 전 사실 세라 누나보단 다른 쪽이 더 신경이 쓰여서…….’
‘다른 쪽? 너 또 누굴 봤어?’
말할지 말지 망설이던 어린 각성자 소년이 결국 큰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저, 여러분과 처음 만나기 전에는… 중부에도 잠깐 있었거든요.’
뭉뚱그려 말했지만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이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깨달았다. 아이가 남부 거점, 서부 거점을 거치기 전 중부 거점에도 잠시 머물렀었다는 뜻이었다.
‘그때… 거기서 봤던 분들을 아까… 아침에 잠깐 밖에 나갔을 때 본 것 같아요. 저기, 지원자 중에서…….’
‘뭐? 정말로?’
‘아니,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남부? 중부? 세라? 그게 다 무슨 얘기요? 우리가 모르는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건가요?’
그들이 어디 출신인지 모르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해 갸웃거리자 저들만 아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던 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이 잠시 눈치를 보았다.
이전이었다면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마병단에게 밝힐 생각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비밀 격투장에서 죽을 뻔했던 아이들이 멀쩡히 돌아오고, 마병단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서 살길을 열어 준 상황은 그들의 가슴속에 각기 믿음을 싹틔우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어제 나눈 대화를 기억해 낸 이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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