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18화 (718/805)

718화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말해.”

나단 주커만이 주저 없이 아톤의 어깨에 검을 찔러 넣으며 물었다. 피가 튀며 땅이 검붉게 젖어 들었다. 아톤의 몸이 본능적으로 고통에 뒤틀렸으나, 그는 비명 대신 오싹한 눈빛만을 두 사람에게 되돌려주었다.

“이곳은 한없이 불균형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품은 땅……. 너희를 노리는 자는 우리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한 일은 그들과 함께 언젠가 일어났을 불균형의 여파를 조금 더 얹어 준 것뿐. 모든 조건이 완비되어 검은 달의 땅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 바로 오늘이었으니, 궁금하다면 직접 가서 무슨 꼴이 되었을지 확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톤의 머리가 누군가에게 짓밟히듯 땅에 푹 처박히며 부들부들 떨렸다. 범인은 당연히도 바람의 힘을 손에 휘감은 유더였다.

“크으으윽……!”

아톤은 흙에 처박힌 고개를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손발을 짚고 아무리 힘을 주어도 보이지 않는 바람의 압력이 너무나 강해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거인의 발에 깔린 듯한 기분에 숨이 막혔다. 흙이 얼굴을 뭉개며 코와 입을 메우는 감각은 어깨뼈를 비트는 검날의 고통과 비교해 조금도 약하지 않았다. 정신이 절로 아득해졌다.

“흐……!”

잠시 후 아톤은 겨우 뒤통수를 짓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났다. 압박으로 인해 코뼈가 무너지고 안구를 다쳐 피를 흘리는 그의 흐릿한 시야에 빛을 내는 반지를 낀 채 서 있는 유더 아일이 들어왔다.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유더는 무표정했다.

엄청난 힘을 발휘한 직후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쓰고 있으면서도 이마에는 땀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무표정 속에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미가 없어 못 들어 주겠군. 넌 앞으로 그따위 언변으로 누군가를 꾈 생각은 하지 마라. 나라면 절대 안 넘어갈 테니까.”

퍽. 또다시 거대한 압력이 아톤의 전신을 짓눌렀다. 아톤은 팔다리가 으스러지는 감각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늘어진 아톤을 확인한 유더의 곁에서 나단 주커만이 입을 열었다.

“방금 팔찌를 비틀어 이쪽에서도 신호를 보냈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변화는 없습니다만, 아일 경도 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유더는 반지를 빼냈다. 아톤의 헛소리를 들어 주는 동안 진동이 가라앉은 반지는 아까의 반응이 꿈이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그는 잠시 안쪽에 그려진 미세한 마법진을 응시하다 안쪽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그러자 반지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스르르 금빛이 일어났다가는 곧 사그라졌다. 유더가 하는 양을 지켜본 나단 주커만이 기절한 아톤을 추스르며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주군께서는 바란다면 충분히 저희 둘보다 더한 힘을 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저희가 가진 두 개의 마도구가 동시에 반응했다 해서 지나친 지레짐작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전히 심장이 불안한 감정을 띠고 크게 뛰고 있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유더는 키시아르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구조의 의미로 반지를 쓰라고 말했다 해서 그 또한 반드시 그런 의미로 쓴다는 법은 없다.

“마병단 지부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해 보이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저희 쪽에도 같은 위험이 닥쳤을지 모른다 판단하여 이쪽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했을지도 모르지요.”

유더의 반지 외에도 나단 주커만의 팔찌까지 두 개의 마도구가 동시에 반응했다는 점이 그 추측을 높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나단 주커만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혹은 마법을 사용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도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소량의 선천적인 마력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기에, 마력에 몹시 민감합니다. 대량의 마력이 펼쳐진 현장에서 마도구들이 이상 작동을 일으키는 건 상당히 흔한 일이라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까지는 몰랐습니다만…….”

“그러면 이들은 제가 정리 후 뒤따라가겠습니다. 아일 경은 먼저 가십시오.”

유더는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병단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일 경이 가는 쪽이 더 나을 겁니다.”

나단 주커만 또한 곧바로 키시아르가 있는 곳을 찾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터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건 냉정한 상황 판단 이전에 분명한 배려의 뜻을 더 띠고 있었다.

어쩌면 키시아르가, 그의 주군이 위험할지 모를 일임에도 유더가 먼저 갈 수 있도록 그가 한발 물러나 주었다. 그 의미가 너무나 강렬하고 생경하게 다가왔다.

“…….”

동료들과 주고받는 신뢰와는 분명 달랐다. 하지만 키시아르와 관련된 선택이란 점에서는 더욱 무겁고도 깊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유더는 바람을 밟고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높이 뛰어오른 몸이 고작 두세 번의 도약 만에 콘체 남작가의 담을 넘어 먼 지붕 위로 사라졌다. 나단 주커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숨도 쉬지 않고 공중을 두 번 뛰어올라 신전 첨탑을 박찬다.

앞을 가로막는 굴뚝은 몸을 날려 뛰어넘고,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누군가의 비명도 무시했다. 반쯤 부서진 지붕 끄트머리 널빤지에 실수로 발끝이 닿아 미끄러질 뻔한 순간에도 유더는 오로지 앞만 보았다.

콘체 남작가에 올 때 마차를 탔기에 남작가에서 마병단 지부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명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미친 듯 바람을 밟고 달리기 시작한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앞이 밝아지며 그 언젠가처럼 가느다란 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유더 아일이 키시아르 라 오르를 찾길 원하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던 그것.

유더의 몸을 휘감고서 먼 어딘가로 뻗어 나가고 있는 실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호흡에도 끊어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하지만 예전에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오히려 좀 더 선명해졌고, 게다가 한 가닥이 아니라 여러 가닥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이 실이 존재한다는 건, 키시아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따라간 끝에는 분명 그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든, 거기에 있기만 하다면…… 내가 처리할 수 있어.’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판단하려는 머리와 달리 가슴은 계속해서 불안하게 뛰어 대기를 멈추지 못했다. 한없이 날카로워지는 신경이 머리를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유더는 달리는 동안 아톤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곳이 불균형한 땅이라고 했지. 우리를 노리는 자들은 자신들뿐만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언젠가 일어났을 불균형의 여파를 조금 더 얹어 준 것뿐이라고.’

거기에 이어 언급한 ‘검은 달의 땅’.

남국인들은 태양신에게 쫓겨났다는 검은 달 신앙을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직접적으로 그 이름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균형……. 애초에 불균형한 땅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여파를 얹어 주었다는 건 본래도 불균형한 땅을 더 불균형하게 만들었다는 건가? 그러면 뭐가 어떻게 되기에?’

드디어 멀지 않은 곳에 마병단 남부 지부 특유의 낡은 지붕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더는 자신을 이끄는 것처럼 흔들거리는 실을 따라 더욱 빠르게 뛰다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저건…….’

마병단 지부 근처에서 들려오는 폭음 같은 건 아무렇지 않았다.

몰려들어 있는 듯한 사람들도, 도망치는 이들의 모습도 괜찮았다. 인간을 상대하는 거라면야 크게 두려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저 새카만 선은 무엇인가.

마치 금이 간 그릇처럼 쩍쩍 갈라진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입을 벌리고 있는 그것.

그것을 유더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균열.’

서부의 사라인 대삼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과 흡사한 균열이 마병단 지부 앞에 떠 있었다.

이전 생에 균열은 커다란 재앙이 닥치기 직전 목격되고는 했다. 그리고 유더의 기억 속에서 가장 먼저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인지되었던 건…….

‘남부 대지진.’

언젠가 일어났을 불균형의 여파라던 아톤의 말이 불현듯 유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순 소름이 끼치며 전신의 피가 식는 듯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유더는 잠시 멈칫했던 다리를 움직여 재차 뛰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빠르게, 그리고 더욱더 강하게 발휘되기를 원한 마음에 반응한 힘이 거의 작은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쳤다.

발밑을 밀어 올리는 회오리바람에 힘입어 유더는 마침내 마병단 지부 꼭대기 근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가까이에서 본 균열은 한층 더 거대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

그토록 찾아 달렸던 바로 그 상대가 거기에 있었다.

긴 검을 쥔 금빛 머리칼의 사내가 유더의 기척을 알아차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정확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유더를 인도한 실들이 그의 붉은 눈동자 위에서 비로소 끝이 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18)============================================================

외전 2

<시작 이전의 날>

“이들은 제가 정리 후 뒤따라가겠습니다. 아일 경은 먼저 가십시오.”

그 말을 내뱉었을 때, 나단 주커만은 상당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건 예전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충성의 목표이자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주군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다급한 상황이다.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남을 먼저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나단 주커만이란 인간에 대해 아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그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 말에는 분명한 이성적 판단과 믿음, 그리고 드러내지 않을 뜻이 모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눈앞의 검은 머리 남자도 나단 주커만의 말이 지닌 의미를,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무게를 알까. 아주 잠깐 그리 생각했지만 나단 주커만은 이내 그런 생각조차 쓸데없는 짓이었음을 금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태까지 적을 상대하며 단 한 번도 당황하거나 놀란 적이 없던 그 사내, 유더 아일이 처음으로 멈칫 움직임을 굳혔다.

이윽고 유더 아일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신중하게 나단 주커만의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 반문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거나, 나단 주커만의 기분을 고려하고 걱정스러워하여 나온 결과물이 아니었다.

전투의 흔적으로 조금 더러워진 창백한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표정은 마치 나단 주커만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믿기지 않는 결정인지를 그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고, 무엇을 중시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반문.

그 안에 담긴 것은 가까우면서도 먼 묘한 존중과 신뢰다.

눈앞의 남자는 나단 주커만이 중요시하는 요소를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게 이해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단 주커만은 잠시 느꼈던 묘한 기분을 완전히 갈무리할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은 담담함을 되찾은 시선 속에 유더 아일의 얼굴이 담겼다.

“저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병단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일 경이 가는 쪽이 더 나을 겁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나단 주커만이 아무리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체 능력과 검 실력을 지녔다 한들, 바람을 밟고 뛰어올라 하늘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이보다 빨리 이동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실력으로 말하자면, 유더는 소드 마스터인 나단 주커만조차 쉽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기 어려운 세상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을 이유가 하나 더 존재한다.

키시아르 라 오르와 유더 아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였다.

나단 주커만의 하나뿐인 주군은 눈앞의 검은 머리 남자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지극하게 여겼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단 주커만만큼 잘 알 이가 또 있을까?

나단 주커만은 얼마 전 유더 아일의 갑작스러운 발정기 때 보았던 광경을 기억했다. 그때 주군은 마치 이성이 사라진 짐승처럼 그르렁대던 유더를 아프지 않도록, 그러나 품속에서 나갈 수 없도록 끌어안고서 바위 틈새의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열에 들떠 힘겨워하는 이를 다정하게 어르면서도 못내 안타까워하던 그 눈빛.

그러면서도 유더의 모습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의 모습은 이렇다 할 말 없이도 유더가 키시아르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나단 주커만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유더 아일은 키시아르의 유일한 예외가 되었고,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존재였다.

그러나 그건 키시아르만의 일방적인 감정과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유더 아일에게도 키시아르는 유일한 존재였다. 발정기 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납게 키시아르를 갈구하던 그의 태도는 애초에 없던 곳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다. 차가워 보이는 고요한 태도가 한 꺼풀 덮어 가리고 있었을 뿐, 나단 주커만이 보기에 그의 맹수 같은 눈동자 속에는 언제나 비슷한 불길이 언뜻언뜻 엿보였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내보인 적이 없는 그 밀도 높은 날것의 불꽃. 아주 잠깐 목격한 나단 주커만마저 멈칫할 정도였던 그것을 그의 주군은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였다.

평소의 모습들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만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만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끝을 다 파악할 수 없는 아주 많은 것들이 두 사람 사이에 바다처럼 넘실대는 듯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알겠습니다.”

침묵 속에서 나단 주커만을 지그시 바라보던 유더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아니라 나단의 선택에 따른 명백한 감사의 표시였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누군가는 남아서 이곳의 뒤처리를 해야 한다. 유더보다는 자신이 확실히 이쪽 경험이 많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도 이 선택은 최선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망설임 없이 바람을 밟고 훌쩍 사라지는 유더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문득 펠레타에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시시각각 닥쳐오는 죽음의 앞에 서 있던 키시아르에 대해서였다.

‘나단. 성내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밖으로 나가라. 명령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날이 좋지 않았다. 불길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평소보다 끈적거리는 바람이 불쾌하게 피부를 짓눌렀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금이 간 그릇이 선사하는 끔찍한 고통이 부쩍 심해져 침상에 누워 있던 키시아르의 얼굴은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초췌한 상태였다.

수십 일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은 충혈되어 깊이 파였고, 한 점의 살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라 버린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감돌았다. 며칠 내내 기침과 함께 토해 낸 썩은 피 냄새는 몸에 너무나 깊이 배어 무슨 짓을 해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게 다행일 지경으로 상태가 엉망인데도 모두가 칭송했던 미모만은 그 상황에서도 소름이 끼칠 만큼 빛을 발하니 마치 꺼지기 직전 타오르는 촛불을 보는 듯했다.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눈을 힘겹게 움직여 간신히 나단 주커만을 바라보면서, 키시아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가쁜 호흡 사이로 피가 끓는 소리가 났다.

‘나가서… 이전에, 말했던 대로. 쿨럭……. 쿨럭.’

‘공작님.’

‘……가! 곧 시작될 것 같으니…….’

말하던 도중 기어이 코와 눈에서도 피가 터져 나왔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키시아르는 다가오려 하는 나단 주커만을 손을 뻗어 저지한 뒤 한참 동안 죽을 듯 기침을 했다. 그건 어떻게든 고통에 질린 비명을 삼켜 인간다운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이의 몸부림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여태 단 한 번도 그의 명을 한 번에 바로 듣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만은 처음으로 명에 따르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 망설임의 이유를 모두 읽어 낸 듯 고개를 쳐들고 분명하게 외쳤다.

‘아직 안 가고 뭘 하는 거지? …네 마지막 임무는 내 곁을 지키는 게 아닐 텐데! 대답은 필요 없다. 가!’

나를 실망시킬 셈이냐는 선연한 눈빛에 나단 주커만은 결국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주군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키시아르는 죽음의 순간이 오면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이전의 황족들의 경우를 참고해 보았을 때, 본디 지닌 힘이 강한 이일수록 더욱 끔찍하고 강한 후폭풍을 일으키는 결말을 맞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례없이 강한, 그리고 다양한 힘을 지닌 그의 그릇이 완전히 깨져 죽게 된다면 적어도 펠레타 성 하나 정도는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때문에 그는 나단 주커만에게 미리 그때가 오면 해야 할 일들을 지시해 두었다. 나단 주커만은 성에 남아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바깥으로 나갔다. 그 뒤에는 공작을 걱정하여 성문 밖에 모여 있을 이들을 피신시키고, 혹시 모를 후폭풍을 대비해 기사단을 이끌고 주변을 지켜야만 했다.

‘나가십시오. 공작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아…….’

성에 남은 이들은 살림을 꾸리기 위해 필수적으로 남겨야 했던 하인과 하녀, 그리고 펠레타 기사단의 핵심 인물들과 가신 몇 명 정도뿐이었다. 그들은 키시아르에게 지극히 충성스러웠으나 그럼에도 젊은 공작이 대체 무슨 연유로 이리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이 나을 수 없는 아주 위험한 병이겠거니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키시아르는 그가 죽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성에 남은 이들에게 명이 떨어지는 순간 밖으로 나갈 것을 명해두었다. 덕분에 대부분은 협조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의 임종을 누구도 지키지 못한다니…….’

미리 준비해 왔었음에도 정작 시기가 닥쳐오니 누구도 침착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 중, 유일하게 이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키시아르가 펠레타에 올 때부터 함께했던 마법사 헬렘이었다. 그녀는 나가야 한다는 말에 ‘결국 이리 되는가…….’ 하고 탄식하고는, 침착한 태도로 나단 주커만을 도왔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마 시간이 훨씬 지체되었으리라.

충직한 기사는 다른 이들의 의문도, 비통함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이처럼 묵묵히 성문을 닫으면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더욱 짙어진 하늘은 때로 번개가 치려는 듯 우르릉대며 번쩍이는 빛을 뿌렸다. 그 빛이 가끔 불길한 검붉은 색처럼 보여 사람들은 더더욱 깊은 불안과 슬픔에 사로잡혔다. 억눌린 흐느낌 사이로 끔찍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럼에도 다시 문을 열고 성으로 들어가자고 주장하는 이는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키시아르가 허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온몸을 비처럼 때리는 고통 속에서 묵묵히 펠레타 성을 올려다보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마지막까지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으로 기억에 남은 채로 죽기 위해 자신다운 선택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주군의 선택을 뒤집기 위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며, 그런다 한들 키시아르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을까.

설령 그때 황제와 황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성문을 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더 아일이라면 어떨까.

그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과연 성문을 열 수 있었을까.

나단 주커만은 멀리 사라져 가는 유더 아일의 조그만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답을 내렸다.

‘열었겠지.’

그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었을 것이다. 그건 그간 유더 아일을 지켜보며 내린 확신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나단 주커만은 양보를 택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을 마무리한 뒤 뒤를 쫓아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또다시 확인해 볼 예정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