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화
나단 주커만의 손길이 엎어져 있는 아톤의 어깨를 잡으려던 순간, 아톤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기색이 그의 눈에 감돌았다.
“주커만… 주커만이라. 흔한 성은 아니군. 내 기억대로라면 분명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이 거둔 ‘마쿠나타’ 시종이 그런 성이었는데.”
그 어느 때든 침착함을 잃지 않던 나단 주커만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서로를 마주한 시선 속에서 아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마쿠나타가 시종에서 기사가 되었다는 정보는 들었으나 그가 마병단의 영웅이 스스로 물러나 적의 제압을 맡길 정도의 실력자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당신이 추적하여 쓰러트린 나의 부하 또한 그리 손쉽게 잡힐 만큼 만만한 자가 아닌데도… 당신에겐 변변한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군.”
“…….”
“이전에 타이누의 비밀 창고에서 정체 모를 세 사람을 상대했을 때, 각성자의 힘이 실리지도, 검기를 싣지도 않은 순수한 검만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사라진 자가 하나 있었지. 이후 타이누를 빠져나가던 도중 마주쳐 잠시 협력한 어떤 각성자 또한 경고하기를, 우릴 추격하는 펠레타의 기사들 중 검의 극의에 다다른 자가 존재한다더군. 그것이 당신인가?”
잠시 협력했다는 그 각성자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나단 주커만에게 당해 도망쳤던 나한일 터였다.
“…….”
나단 주커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톤은 대답을 들은 것처럼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아깝군. 엄청난 재능을 지닌 마쿠나타가 달의 자식으로 살지 않고 이런 곳에서 제 삶을 낭비하다니.”
달의 자식들. 유더는 남국인들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그렇게 말한다던 설명을 이전에 나단 주커만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실제로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나단 주커만이 반문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당신의 혈육들이 아직 사막 아래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그들을 찾지 않지? 마쿠나타라면 당연히 죽지 않은 이상 사막을 건너 돌아오길 바랐을 텐데.”
그러니까, 아톤은 나단 주커만에게 같은 남국인으로서 왜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의 편에 서 있느냐는 말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가 귀하디귀한 소드 마스터임에도 그 사실을 숨긴 채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저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 아니라도 순식간에 온갖 음모론을 떠올려 보았을 만했다.
‘아마 이쪽에서 나단 주커만에게 강제로 정체를 숨기게 한 채 부려 먹고 있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사실이라면 찔러봐서 나쁠 게 없으니까.’
마쿠나타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단 주커만의 부모가 남국의 전사였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했으니 그것과 관련된 의미이리라 짐작했다.
아톤의 태도는 나단 주커만이 정말 강제로 정체를 숨긴 채 살고 있던 사육당한 맹수 같은 존재였다면 제법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만큼 진정성이 넘쳤다. 저건 진심으로 상대를 아까워하기에 분노하는 눈빛이었다.
“강은 아래에서 위로 흐를 수 없다. 별들은 함께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빛날 수 있어. 만약 사막을 건너 돌아오길 바란다면 우리가 도와주겠다. 진정한 검의 동료를 환영하지 않을 달의 자식들은 없어. 나 또한 그렇고.”
“…….”
유더는 묵묵히 아톤을 내려다보는 나단 주커만을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정보를 새삼스레 되짚어 보았다.
이전 생의 유더가 나단 주커만의 실력을 알게 된 건 그와 한판 붙다가 실수처럼 흘러나온 오러를 접했을 때였다. 그때는 키시아르도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나단 주커만이 굳이 정체를 숨기고 계속해서 부관으로 일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도 없기는 했지.’
키시아르 하나만으로도 이미 생각하기 싫은 일이 한가득이었는데, 그 아래서 일하는 나단 주커만의 사정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그저 언젠가는 저놈도 단번에 꺾어 주겠다는 생각 정도나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키시아르의 진짜 실력도,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숨겨 온 이유도 모두 알고 있다. 나단 주커만의 진실한 충성심을 생각해 보면 주군이 대의를 위하여 힘은 물론이요 존재 자체를 모조리 거짓으로 숨기고 살아가는 상황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저 소리에 설마 나단 주커만이 반응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의 삶을 다 알지 못하는 이상 혹시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며 유더는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단 주커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제안이군.”
“뭐?”
“어차피 이쪽이 그걸 받아들이리란 생각은 당신 쪽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굳이 떠들며 시간을 끄는 건 왜지? 구하러 올 이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가?”
“…….”
아톤의 표정이 변했다.
나단 주커만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굳이 대답해 주자면… 나는 그렇지 않으나, 나의 부모는 달의 자식이었다. 때문에 스스로를 달의 자식이라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사막 아래의 땅에서 태어나 첫울음을 터트린 자들만 해당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 그 증거로 당신도 나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계속 마쿠나타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떨어진 별의 파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흔적과 같은 쓰레기.”
아톤이 침묵했다. 유더는 마쿠나타란 단어의 뜻이 생각보다 더 별로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부모님과 같은 피를 이은 사람들이 세상에 더 있다 한들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 따윈 전혀 없다. 내가 있을 곳은 이미 스스로 정한 지 오래이니까.”
유더는 확신을 가지고 그 말을 내뱉는 나단 주커만의 짙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하고 있는 그의 기분을 어쩐지 이상하게도 몹시 확연하게 알 것 같았다.
다음에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또한.
“내 이름은 마쿠나타가 아니라 나단 주커만이다. 너를 따라가면 마쿠나타라는 이름의 잡종 쓰레기가 되겠지만, 이곳에서는 나를 그 이름에 걸맞은 뜻으로 여겨 주는 주군을 명예롭게 따를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단 주커만의 눈빛은 한없이 침착하고 담담했다. 그 어떤 흔들림과 두려움도 비치지 않는 눈빛에서 이미 오래전에 제 갈 길을 모두 정한 사람다운 확신이 비쳤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아톤 또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안타깝게도 단단히 세뇌당한 모양이군.”
“…….”
“재주가 아까워 제안하였으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알겠다.”
“주커만 경.”
유더가 낮은 목소리로 나단 주커만을 불렀다. 아톤의 지나치게 침착해 보이는 태도에서 어쩐지 수상한 느낌이 찾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너희의 짐작대로 나라고 아무 대비 없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래, 확실히 시간을 끈 게 맞기는 하지.”
유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톤이 입을 열었다. 순순한 인정에 나단 주커만이 반문했다.
“몇 명의 구원군이 더 온다 해도 널 구할 수는 없을 텐데?”
“그래. 그 말도 맞아. 너희가 그만한 자만심을 가질 만한 실력자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인정하겠다.”
‘…이놈.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구원군을 기다리고 있다기에는 주변이 영 조용했다. 잡히는 기척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붙잡혀 제압당한 상황에서는 힘을 쓸 수도 없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유더는 언제든 힘을 발할 수 있도록 전신의 감각을 끌어 올리며 손에 낀 반지를 보았다. 신호를 보내는 즉시 키시아르가 낀 다른 한 쌍의 반지가 반응할 터였다.
“너희가 우리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야. 그러나 우리가 몇 년 전부터 타인 공작과 이곳에서 만나 거래를 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 이유까지는 완전히 짐작지 못한 것 같군.”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즉시 목을 날리겠다.”
나단 주커만이 검 손잡이를 쥔 채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는 그 말을 언제든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이였다. 아톤도 그 사실을 알 텐데, 그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럴 수 없을 거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으니까.”
‘……무슨 시간?’
“무슨 뜻이냐.”
나단 주커만이 유더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을 하며 검날을 아톤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피가 주륵 배어 나왔으나 아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너희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나? 헤른의 2공자가 하필 지금 죽은 이유를.”
“…죄를 저질러 마병단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헤른의 후계 구도를 뒤흔들기 위해서가 아닌가?”
유더가 대답했다. 시선을 돌린 아톤이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그래. 잘 알고 있군.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덕에 마병단의 발은 묶이고, 단장을 포함하여 너희 같은 실력자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거야. 누명을 벗고 조사를 하기 위해 당연한 행동이지. 설마 단번에 여기까지 치고 올 줄은 몰랐지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유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막 놈을 기절시키려 손을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들어 올린 손가락에서 갑자기 기이한 진동이 느껴졌다.
“…….”
유더는 제 손가락에 낀 반지가 빛나며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나단 주커만 또한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에 묶은 팔찌를 보는 중이었다. 그의 팔찌 또한 유더의 것과 비슷하게 떨리며 빛나고 있었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마도구는 서로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이쪽에서 연락을 취하지 않았으니… 연락을 한 건 당연히 반대쪽일 터였다.
‘…키시아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던 심장이 일순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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