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화
“……그건.”
유더가 대답할 말을 찾기 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국인 검사가 정신을 차렸다.
‘…따지고 보면 다 저놈 때문이지.’
유더의 눈에서 불길이 훅 일었다. 그는 버르적거리며 꿈틀대는 남국인 검사, 아톤의 곁으로 다가가 발끝을 등 밑에 넣어 차듯이 몸을 뒤집으면서 무기를 빼내고 적의 찢어진 옷소매 조각을 순식간에 이리저리 꼬아 손발을 묶었다.
보는 이를 감탄케 하는 능란한 솜씨와는 별개로 불유쾌한 감정이 몹시 들어간 거친 손길에 아톤이 낮게 신음했다.
“윽…….”
눈을 뜬 사내는 유더의 얼굴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여 검을 찾았다. 하지만 그 검은 이미 유더가 빼앗은 뒤였기에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손가락을 움찔대는 것뿐이었다.
그제야 제가 묶인 상태라는 걸 깨달은 아톤의 눈빛이 조금씩 명확해졌다. 그와 동시에 제일 먼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의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죽지 않은 거지?”
“숨구멍을 뚫은 채로 파묻었으니까.”
유더의 대답에 아톤이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다는 산 증인이 바로 네놈이 아니냐.
아톤은 말을 자르며 대답하는 유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능력을 쓰고 있지 않아 어느새 금빛이 가라앉은 눈동자에 그의 시선이 박혔다.
“너는… 인간인가?”
“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렇겠지.”
자신이 이기지 못하면 무조건 상대를 반칙이나 규격 외 존재로 몰아가려는 시도쯤은 이전 생에 지겹도록 겪은 바다. 수년간 제국을 몰래 뒤흔들어 온 대담한 남국인이라도 거기서 달라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유더는 차갑게 빈정대며 아톤의 멱살을 쥐었다.
“여기서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너와 사이좋게 토론할 시간 따윈 없어. 진실은 내가 이겼고, 너는 졌다는 것뿐이야. 그러니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자고. ‘아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전투 도중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아는 척을 하면서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서 이러는 것인지 파악하려는 반문이군. 유더는 사내의 태도 속에 숨겨진 속내를 짚어 내며 짐짓 모른 척 대답했다.
“그리 난리를 치며 다녀 놓고 우리가 언제까지 모를 거라 생각했지? 타인 공작에 이어 헤른 2공자까지 골고루 발을 걸쳐 놓은 모양이던데.”
“난리라…….”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하는 태도로 아톤이 중얼거렸다.
“타인 공작의 죄는 우리의 잘못이라 볼 수 없다. 모든 일은 그자가 선택했고 우리는 그저 주어진 명에 따르다 우리까지 위험에 빠질 것 같아 자리를 피했을 뿐이니까. 헤른의 공자가 죽은 것 또한 마찬가지야. 무엇을 근거로 그 모든 일이 우리의 죄가 되는가? 우리는 상단의 일원으로 콘체 남작가와 거래를 위해 와 있었을 따름인데.”
일단 잡혔으니 그다음은 시치미를 떼겠다는 전략인가. 법정에서야 통할 말일지 몰라도 유더에게는 아니었다.
“그래? 그러면 2공자의 말과 하인이 여기 있었던 것도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거겠지?”
유더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향하여 고개를 돌린 아톤은 콧김을 뿜는 백마와 등에 쌓인 남국인 네 명을, 그중에서도 가장 밑에 깔린 자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모르는 일이다. 내가 알기로 저자는 콘체 남작가의 하인이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인물이야.”
“그럼 그가 왜 말과 함께 여기 있었을까?”
“그건 내가 아니라 콘체 남작가 쪽에 물어야겠지. 알고 싶다면 우리가 아니라 그들을 잡으러 가라. 타인 공작 쪽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를까, 그 외엔 답할 이유가 없을 듯하군.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이제 나를 치안대에 넘겨라.”
“재미있군.”
유더는 전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나는 헤른 2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넌 외부에 아직 발표되지 않은 소식을 잘도 알고 있으면서 전부 모르는 일이라고만 잡아떼는군.”
그 말에 아톤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유더는 고개를 좀 더 숙여 멱살을 더욱 꽉 움켜쥐고 그와 시선을 가까이 맞추었다.
낮고 느린 목소리가 땅을 긁듯이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너희가 저지른 짓 일부만 안 채로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온 것 같나?”
“…….”
“잡혔으니 어쩔 수 없다. 눈에 뻔히 보이긴 하지만 모른 척하면서 최대한 빨리 치안대로 넘어간 뒤, 죄는 대충 다른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우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일단 벗어나기만 하면 도망치기는 쉬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
“-안수마 메흐트. 늑대의 눈 부족.”
유더의 말에 아톤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름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 이름을 어디서 알아냈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어디서 알아내기는.’
마병단 최고의 악동 중 하나, 핀 엘더와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조사한 가케인 볼룬발트가 알아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답을 알려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유더는 대답하지 않고 한쪽 입술 끝만을 희미하게 올렸다.
“어디서 알아냈을 것 같은데.”
“……간자인가?”
상식적으로 입수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정보가 적 측에서 나오면 당연히 제일 먼저 그 생각부터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었다.
유더는 그가 오해할 시간을 주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타인 공작에게서 원한 건 금품이나 작은 이권 따위가 아니겠지. 너희의 존재를 숨겨 줄 이름값과 전 제국에 뻗칠 수 있는 유통망을 바란 게 아닌가? 콘체 남작가와 거래한 품목 또한 사소한 물건이 아니라 차기 공작위라는 아주 큰 선물이었을 테고.”
“…….”
“이것도 아니라고 잡아떼어 보지 그래.”
아톤의 눈빛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주변의 기절한 남국인들을 빠르게 훑었다.
주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저 본채 안에 콘체 남작가의 사람이 몇 명 정도는 숨죽이고 있겠지. 너와 대면시킨 뒤 확인해 보고 나서 그토록 바라던 치안대로 가 주마. 물론 그다음에는 각성자인 네놈을 조사할 권한을 지닌 마병단으로 다시 와야겠지만.”
유더는 아톤이 이쯤에서 무언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없던 사내가 내보인 반응은 웃음이었다.
“하……. 하하.”
‘이게 미쳤나?’
“정말 대단하군.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바로 마병단의 영웅이라 불리는 그자겠군. 유더 아일.”
“그런데.”
“우릴 상대로는 두 가지 속성밖에 쓰지 않기에 미처 확신하지 못했다. 아까 확신했더라면 옷을 찢는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죽여 버렸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어.”
지금 잡혀 있는 게 누군데 죽인다 만다 하는가? 뭘 믿고 저리 방자한지 알 수가 없는 와중, 또다시 찢어진 옷이 언급되는 바람에 억눌렀던 감정이 울컥 샘솟았다.
‘저 자식…….’
대화 주제와 상관없는 분노의 감정으로 인하여 유더의 왼쪽 눈이 또다시 금빛으로 물들어 가려던 순간, 갑자기 끼어든 큰 손이 얼굴 앞을 턱 막았다.
“기다려 주십시오.”
“…뭐 하시는 겁니까?”
유더가 움직임을 멈춘 채 물었다. 마병단 동료들이라면 눈이 마주치자마자 겁을 먹었을 법한 시선이었으나 나단 주커만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유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적과 그 이상 가까운 접촉은 돌발 상황이 생길 확률을 키운다고 판단하기에 권장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지나치게 가까운 접촉입니까?”
“그렇습니다. 특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에 비해 감정이 지나치게 격해진 듯 보이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군요. 같이 움직이는 상황이니 혹시 모를 위험 가능성은 차단하자는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
“주군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겠지요.”
그제야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돌발 행동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그가 없는 사이 아톤을 향해 크게 자라난 유더의 사적인 유감을 눈치채고, 지나치게 화난 상태로 적을 상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설명하려면 키시아르에게 사탕을 받은 경위까지 말해야 한다. 유더는 받은 사탕이 모조리 부서져 화가 났다는 말을 제 입으로 하느니, 그냥 나단 주커만의 염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쓸데없이 접촉해 보았자 한 대 더 후려치고 싶기만 할 뿐이지. 어차피 이긴 건 우리 쪽이고, 놈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는 이미 치르게 해 주었으니까.’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말대로 같은 발언을 하는 키시아르를 떠올려 보았다.
잠시 후 놀랄 만큼 빠르게 감정이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유더는 아톤의 멱살을 쥔 손을 풀고 물러났다.
“그러면 대신 저놈을 끌고 본채까지 가는 건 주커만 경이 해 주십시오.”
“그러죠.”
나단 주커만이 손길이 엎어져 있는 아톤의 어깨를 잡으려던 순간, 아톤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기색이 그의 눈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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