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후우…….”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발을 딛고 선 땅을 돌아보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귀족가의 정원이었던 그곳은 이제 누가 봐도 ‘정원’이라 생각하기는 힘들 법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메말라 있기는 했어도 제법 값나가는 꽃나무와 조경용 바위를 들여 꾸며 놓았던 곳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초토화되어 평평했다. 간혹 갈색 흙 사이로 비죽 고개를 내민 나뭇가지 정도만이 겨우 이전의 정체를 소심하게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한 일이었지만 유더의 표정은 조금도 시원하거나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까지 힘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하나밖에 먹지 않은 키시아르의 사탕을 전부 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적당히 제압하려던 계획 따위는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병단장 시절에도 여간해선 잘 쓰지 않았던 방식으로 상대를 가차 없이 굴리고 파묻어 제압한 뒤에야 유더는 제가 사실 몹시 좌절하고 분노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좌절과 분노라니. 이토록 어리고 유치한 감정이 제게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싶었으나 눈앞의 결과를 보면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래도 정원의 범위를 초과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으니 다행이지.’
전력을 다하여 적을 굴리는 와중에도 유더의 힘은 결코 이 정원 밖까지 뻗어 나가지 않았다. 평화롭고 조용하기 그지없는 외부를 보면 바깥을 지나는 사람들은 아마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유더는 콘체 남작가 본채 건물도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뒤 어두운 눈빛으로 찢어진 겉옷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들여다보아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
스산하게 가라앉은 왼쪽 눈동자에서 또다시 금빛이 불길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일 경.”
백마의 고삐를 쥔 나단 주커만의 모습은 아까 적을 쫓아가던 때와 조금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차림새도 상당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말 등에 쌓인 인간의 수가 하나 더 늘어난 걸 보면 결국 그가 이겼다는 뜻일 터다. 다친 것 같진 않으니 되었다 싶었다.
“이 정원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적들은…….”
“땅의 힘을 좀 썼고, 제가 이겼습니다.”
“좀…… 말입니까?”
나단 주커만의 시선이 완전히 갈아엎어진 정원을 훑었다.
“이곳을 이렇게 만들 정도의 힘이라면 아무리 보아도 보통 수준의 힘을 사용한 게 아닐 거라 짐작됩니다만.”
“평소보다 많이 쓰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만큼 무리한 건 아닙니다.”
“무리의 기준이 궁금해지는 말씀이군요.”
“방금 같은 짓을 한 번 더 하기는 어렵겠지만 아직 몇 명 더 때려눕힐 정도의 힘이 남아 있으면 무리했다 볼 정도는 아니죠.”
“그렇군요. 그런 기준입니까.”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발휘한 것도 아니고, 기운이 상당히 빠지긴 했지만 움직이기 힘들 수준은 아니다. 지금 당장 적 몇 명이 더 나타난다 해도 몸을 지키면서 빠져나갈 정도의 기력은 있으니 무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유더의 판단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그 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약간 복잡한 표정으로 정원을 다시 한번 죽 둘러본 나단 주커만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래서… 쓰러트린 적들은 지금 어디에 두셨습니까? 보이질 않는군요.”
유더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아 땅을 응시했다. 나단 주커만이 유더를 따라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갈색 흙으로 뒤덮인 평평한 땅이었다.
“저기 있습니다.”
“……죽었다는 뜻입니까?”
“아뇨.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묻어 놨을 뿐입니다.”
유더는 성의 없이 손으로 허공을 헤치듯 휙 움직였다. 그러자 땅이 미약하게 진동하며 스르르 열려 안에 묻힌 두 사람의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투성이라 시체 같아 보였지만 잘 보면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 유더가 그들을 파묻을 때 친절하게 숨구멍을 작게 내 준 덕이었다.
아무리 부서진 사탕 때문에 깊은 좌절을 느꼈다 해도 저 정도 되는 놈들을 함부로 죽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특히 여기 있는 남국인들의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던 검사는 더욱 그러했다.
‘분명 다른 한 놈이 저놈을 아톤이라고 불렀어.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 이름을 지닌 놈이 바로 타인 공작가를 말아먹은 주범이었을 텐데.’
유더는 기억을 짜내 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게 틀리지 않다면 두 번 정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서부 임무가 마무리되고 타인 공작이 재판정에 섰던 때다. 유더는 재판을 참관하고 온 프루엘레에게서 타인 공작가를 좌지우지했던 남국인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라 불러 주기도 싫은 그 작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톤이란 인물이 그간 남국인 상단을 대표해 타인 가의 재산과 온갖 권한을 포함한 모든 걸 받아 간 주범인 모양이야. 이번에 서부에 남국인 상인들을 보낼 때도 그자를 통해 명령했었다고 해.’
두 번째는 이전에 유더가 타이누에 있었을 당시 타인 공작을 감시하기 위하여 도박장에 위장 취업을 했던 스티버와 데브란의 보고서였다. 요리사라서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던 불행한 스티버와 달리 서빙을 하며 손님들을 상대적으로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많았던 데브란은 타인 공작이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심각한 의존성을 보이던 정체 모를 남국인을 보았다.
그때는 그자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저 쫓아가다 놓쳤다는 부분만 자세히 써서 보고했다지만, 어쨌든 아톤이란 이름을 들었다는 사실도 거기에 얼핏 끼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던 건 그저 이름뿐. 그자의 외모에 대한 정보는 얻는 게 영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자가 타인 공작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외견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나온 말에 의하면 타인 공작은 남국인 상인들이 외모를 철저하게 감추든 말든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알아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 주니 좋다고 생각했다는데, 그 탓에 재판장에 서고 나서도 그자의 외모 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 쪽이 오히려 남국인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펄펄 뛰며 죄를 떠넘기려 해도 그자가 어떻게 생긴 이인지, 이름 외의 인적 사항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 지경이 되어서도 타인 공작이 남국인 상인들의 존재를 일부러 숨겨 주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니 그야말로 키올레도 울고 갈 희대의 멍청이라 할 만했다.
타인 공작이 남국인 상인들의 외모를 조금만 더 궁금해하거나 신중하게 확인했더라면 유더는 서부에서 자신이 마주쳤던 남국인 중 아톤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구였는지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년간 타인 공작을 그렇게 잘 갖고 논 걸 보면 신중한 성정일 테니, 서부에는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동료들만 보냈을 가능성도 있겠다 싶었는데… 아니었군.’
유더는 엎어져 기절해 있는 아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타인 공작의 묘사로는 제 입 안의 혀처럼 비위를 잘도 맞춰 주었던 인물이라기에 무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리라 짐작했는데…….’
기절한 와중에도 움켜쥔 검을 놓지 않은 모습이나 두 번의 전투에서 보았던 실력을 보면 놈은 상인보다는 무인에 훨씬 더 가까운 자였다. 제 실력에 대단한 자신감이 있어 보이던데 어떻게 그 성질을 누르고 타인 공작의 비위를 다년간 맞춰 주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아까 아일 경이 결과를 만들면 무단 침입도 상관없어진다고 했을 때는 상당히 무모하다 생각했었습니다만… 결국 말대로 이루어지기는 했군요.”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말에 생각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남국인 기사는 다소 복잡하면서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닌 듯한 표정으로 유더를 보고 있었다.
“제가 그럴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역시 다음에는 말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입니까.”
“제가 곁에 있었음에도 아일 경의 옷과 피부가 상한 것을 보면 주군께서 상당히 걱정하실 것 같으니까요.”
그건 예상치 못한 지적이었으나 동시에 그 어떤 것보다도 유더를 멈칫하게 만들 만한 힘을 지닌 말이기도 했다. 유더는 잠시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구르던 도중 피부가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피를 본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옷과 사탕에 대해서라면… 그건 확실히 이쪽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그건.”
유더가 대답할 말을 찾기 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국인 검사가 정신을 차렸다.
‘…따지고 보면 다 저놈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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