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유더는 이곳으로 달려오는 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단 주커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들이 또 깨어난 거라 판단하고 방심한 채로 올 겁니다. 전투가 일어날 테니 말에게 피해가 없도록 물러나 계십시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구간 문이 열렸다. 들어선 이는 유더가 아까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때도 제일 먼저 왔던 남국인 사내였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욕이 분명한 남국의 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상황이 몹시 달갑지 않은 건 분명했다.
내부를 제대로 훑지도 않은 그가 난동을 부리는 말들을 향해 손을 뻗고 힘을 발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머리 위에서 문득 바람 한 줄기가 스르르 불며 사내의 앞머리칼을 간지럽게 쓸었다.
바람이 불 리가 없는 실내인데. 어쩐지 묘한 느낌에 이마를 긁으며 사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를 노려 마구간 천장 들보 위에 기척 없이 앉아 있던 유더가 그의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뭐……!”
쿵. 남자는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유더의 발에 맞아 그대로 나자빠졌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신을 쏙 빼 놓기엔 충분했던 한 번의 공격 직후 이어진 신속한 제압과 결박까지 끝낸 뒤 유더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말끔한 얼굴로 일어났다.
“일단 한 놈.”
“웁… 으으으……!”
순식간에 묶여 버린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부림을 쳤다. 백마의 고삐를 잡은 채 기둥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나단 주커만이 태연히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또 올 것 같습니까?”
“아뇨. 두 번째 놈이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내 생각대로 말이다. 유더는 뒷말을 삼키며 자신이 제압한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유더가 ‘콘체 남작가’란 이름이 미래의 새로운 헤른 공작이 된다는 걸 기억해 낸 덕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미래를 살다 다시 돌아온 정도의 요행이 아니라면 이자들이 여기에 있는 걸 추측할 길이 마땅치 않았으리란 뜻이기도 했다.
‘그래. 보통의 경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조심성 많은 놈들이라도 마구간에서 말들이 시끄럽게 구는 정도의 사소한 일로 두 번 이상 나오는 건 몹시 지나친 짓으로 느껴지지 않겠어?’
콘체 남작가에 몸을 숨긴 남국인 상인들과 죽었다고 오해받는 중인 2공자의 하인은 바깥에 나오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몸이다. 아까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이미 별일 아니었다는 걸 확인한 상황이니 더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유더는 그 생각을 꿰뚫어 보고 어렵지 않게 상대를 제압하여 심문할 시간을 얻었다. 혹 뒤이어 다른 놈들이 연속으로 뛰어들어 온다 해도 그리 아쉽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쪽보다는 이쪽이 더 호재였다.
“…….”
제압당한 남국인 청년은 코로 숨을 씨근거리면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얼굴을 살피니 이전에 서부에서 본 놈은 확실히 아니었다. 처음엔 놀라서 읍읍대며 소리를 지르더니 순식간에 조용해진 모습으로 보아 역시 평범한 놈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능력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훈련을 상당히 받은 놈이다. 칼 잡은 티가 나는 손만 봐도 그건 분명해 보이는군.’
호신용 검술이나 조금 배우며 곱게 자랐을 공작가의 도련님이나 하인들이야 저 몸과 손이 단순히 잡일로 다져진 굳은살의 결과라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는 두 사람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유더는 사내의 곁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얼굴을 가까이 했다. 유독 색이 짙어 초점을 읽기 힘든 그의 어둠 같은 눈을 마주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겁에 질리거나 내심 꺼림칙함을 느낀다. 겉으로는 무반응을 가장 중인 남국인 사내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너, 어젯밤 헤른 가의 2공자를 수행한 놈이지.”
“…….”
남국인 사내가 조용히 침묵했다. 유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물었다.
“2공자는 네가 죽였나?”
“…….”
그래. 여기까지는 답하지 않을 줄 알았다. 무응답이 곧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음까지도 그럴까? 유더는 일부러 잠깐 시간을 둔 뒤 느리게, 그리고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목적은, ‘너희’가 다음 헤른 공작의 자리에 콘체 남작가를 올리도록 돕기 위함이고?”
“…….”
2공자를 죽였냐는 말까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놈이 그 질문을 들은 순간 아주 미세하게 동요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자의 반응이었다.
‘당연하지. 이건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니까.’
여러 단계의 다리를 거쳐 겹겹이 감쌌다 믿고 있을 자신들의 정체와 목적을 갑자기 푹 찔린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알아낸 건 모두 미래에서 아무도 음모의 배후를 모른 채 지나갔을 때 일어날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유더가 건넨 약간의 정보만으로도 아무도 유추해 내지 못한 진실을 꿰뚫는 능력을 보유한 키시아르 라 오르의 뛰어난 두뇌가 낸 답 또한.
키시아르는 아까 말했었다.
‘이번에 확실히 그들의 수작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이전 게임에서도 그들이 똑같은 수를 썼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오직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단 주커만과 자신을 둘 다 여기로 보냈다. 그리고 유더는 그게 맞았다는 걸 바로 지금 이 순간 확신하게 된 참이었다.
물론 눈앞의 상대에게 그걸 친절히 알려 줄 생각 따윈, 당연하지만 조금도 없었다.
유더는 혼란스레 흔들리던 남자의 눈이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꽉 감기는 모습을 보았다. 경험상 자폭이나 자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하려는 놈들이 저런 행동을 하곤 했다.
‘어딜.’
그는 망설이지 않고 힘을 사용했다. 바람이 순식간에 남자의 남은 숨구멍까지 틀어막음과 동시에 손날이 급소를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남자는 곧바로 기절했다.
그가 기절한 뒤 유더는 방금보다 더욱 꼼꼼히 놈을 다시 묶어 발로 밀었다. 나단 주커만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방금 한 말은 주군의 말씀이십니까?”
나단 주커만은 유더가 키시아르와 함께 마차에 올라 미래의 정보를 토대로 남국인 상인들에 대한 정보를 추측하기 전에 먼저 이곳으로 왔다. 그러니 해당 부분은 그도 지금에서야 처음 들었을 터였다.
“예.”
“타인에 이어 헤른이라……. 분명한 목적성이 느껴지는군요.”
“내부에서부터 파고들어 교묘하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고, 재산을 빨아먹고, 불법 마약을 유통하려 한 걸 보면 확실히 일관성이 있지요.”
“어쩐지, 주군께서 어제 갑자기 헤른 가의 작위 승계권과 관련된 가문들을 조사하라 하시더니…….”
“…….”
그걸 누가 조사했나 했더니, 나단 주커만이 얽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각한 눈빛을 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단 주커만이 문득 바깥을 기민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바깥에서 남국어가 들리는군요. 금방 끝날 일인데 왜 오지 않는지 화를 내고 있습니다. 기절한 자를 찾는 모양이군요. 준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혹시 몇 사람인지도 파악되십니까?”
유더도 오감이 남들보다 예민한 편이며 바람의 힘을 빌리면 소리를 증폭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의 기민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유용한 게 있으면 써먹어야 마땅한 법이었다.
나단 주커만은 어렵지 않다는 듯 눈을 감고 땅의 진동에 집중했다.
“…둘입니다. 하나 이상은 분명 검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검집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알겠습니다.”
“도와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말이나 잘 지키십시오.”
유더는 다시 들보 위로 올라갔다. 숨을 삼키고 기척을 죽이자마자 나직하게 남국어로 떠드는 두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꺾은 채 쓰러져 있는 동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테마쉬!”
“자스위 켈!”
음… 남국의 언어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전자는 이름이고 후자는 경계 태세란 건 알겠다. 그리고 나단 주커만의 말대로 한 놈이 확실하게 검을 차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확도가 거의 투시 능력 부럽지 않을 정도군.’
유더는 그들이 위를 올려다보기 전 훌쩍 뛰어내리며 바람의 힘으로 문을 쿵 닫았다.
두 사내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그는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놀란 남국인이 검을 뽑아 들며 어렵사리 유더의 공격을 막았다.
“큭……!”
그러나 본래 싸움이란 먼저 치는 놈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법이다. 하물며 어떤 놈들이 어떻게 오리란 걸 이미 알고서 대비해 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유더가 검을 맞대며 상대를 밀어 버린 곳은 마구간 내에 찍힌 말발굽 자국 때문에 바닥이 조금 움푹 파인 땅이 위치한 장소였다. 그렇지 않아도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휘청이며 물러난 사내가 울퉁불퉁한 땅을 밟자마자 뒤로 넘어가 굴렀다.
유더는 즉시 그의 급소를 아낌없이 후려갈겨 준 뒤, 남은 한 놈을 향해 쇄도했다. 남은 놈은 각성자였는지 황급히 손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으나, 그런 얼마 안 되는 물 따위는 유더에게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곧 그자 또한 사이좋게 동료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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