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몰래 들어선 콘체 남작가의 정원은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똑같이 고요했다.
겉보기엔 제법 멀쩡해 보이는 귀족가의 저택이었지만 내부로 들어서니 확실히 지나치게 을씨년스럽다는 게 느껴졌다. 꽃과 나무는 관리된 지 한참 지나 잡초가 무성하고, 창문은 단 하나도 열려 있지 않은 데다 커튼까지 단단하게 쳐 두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물론 그건 유더와 나단 주커만에게는 몹시 고마운 일이었다.
‘남국인들이 몸을 숨기느라 저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덕분에 편하게 살피기 좋군.’
유더는 위에서 파악했던 정원 구석의 쓰레기 더미로 다가가 불탄 안장을 찾아냈다.
“이게 2공자의 것이 맞다면 분명 어딘가에 주인을 뜻하는 문장이나 표식이 있을 겁니다.”
“제가 살피겠습니다.”
바로 나선 나단 주커만이 반쯤 부서진 안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재를 대충 털어 내고 안쪽을 뒤집어 보며 꼼꼼히 살핀 끝에 그는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여기 이것인 것 같군요. 4줄기의 파도와 창. 헤른 가의 문장입니다.”
상대적으로 파손도가 덜한 안쪽 부분에 헤른 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4개의 모서리에서 출렁이는 파도 무늬와 한가운데 그것을 꿰뚫고 있는 날개 달린 창을 살핀 유더는 제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콘체 남작가가 아무리 헤른 공작가의 친척이라 해도 가문의 문장까지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이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니 바로 불태우려 한 거겠지만.’
나단 주커만은 큰 안장을 한 손으로 번쩍 들더니 업듯이 등에 대고 어디선가 꺼낸 끈으로 단단히 교차하여 묶었다. 양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물건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게 만드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안장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고정한 나단이 불탄 쓰레기 더미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더 살펴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2공자와 관련된 물건이 더 있을 수도 있으니 찾아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자신이 있다면 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기사는 바로 몸을 숙여 검은 덩어리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마구간에 다녀오죠.”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신호하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답하는 나단 주커만의 뒷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유더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남과 일을 하면서 뭔가 더 지시할 게 없다니, 어쩐지 신선하군.’
키시아르와 내기 격투장에 갔을 때도 그렇기는 했으나 그때와 지금은 다소 느낌이 달랐다. 유더는 낯설고도 쾌적한 기분을 느끼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 내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맨 안쪽에 있던 백마가 조금 흥분한 듯 투레질을 하며 발을 따각따각 굴렸다.
난리라도 피우면 곤란해질 테니 여차하면 잠재울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럴 정도는 아니었다. 유더는 이곳에 총 5마리의 말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천천히 안쪽을 향해 걸었다.
‘이 녀석들. 지금 잠들어 있는 건가?’
말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갈색 말로 다가가 예민한 귀와 눈 부분을 두드려 보아도 반응이 없는 모습을 보니 잠든 상태와는 뭔가 좀 다르게 느껴졌다.
그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며 유더는 말들이 소란을 피웠을 때 제일 먼저 들어갔던 남국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들어간 뒤 뭔가 행동을 취할 만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말들은 곧바로 조용해졌다. 먹이통이 비어 있는 걸 보면 뭔가를 먹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짚이는 건 하나다.
‘2공자의 늙은 하인이 말하길 실종된 하인은 유독 말을 잘 다뤘다고 했었지. 그자가 아까 본 그 사람이 맞고 우리가 쫓던 남국인 상인들과 관련이 있거나 동료라고 짐작한다면… 그자도 각성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이전 생의 마병단에도 동물을 잘 다루는 각성자가 제법 많았다. 다룰 수 있는 동물의 종류나 효과에는 차이가 존재했으나, 불안에 빠진 동물을 얌전하게 만드는 정도는 몹시 쉬운 편이었다.
유더는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는 가장 안쪽의 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섯 마리의 말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백마는 유더를 의심스럽고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발을 몇 번 굴렀다.
‘숨소리도 그렇고, 상당히 흥분한 상태군.’
녀석은 다른 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방금 관리받은 듯 털에 윤기도 자르르 흘렀다. 털이 푸석하고 마른 티가 나는 다른 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딱 바깥에서 찾아낸 비싼 안장을 올려 두기에 좋을 만한 녀석이었다.
근육이 단단히 들어찬 다리나 갈기의 상태로 미루어 봤을 때 한눈에 봐도 귀하신 몸이 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유더는 녀석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 다리 부근을 살폈다. 녀석의 다리털에는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털이 흰 덕에 자국이 아주 눈에 잘 띄었다.
‘…여기까진 그렇다 쳐도…….’
유더의 시선이 바닥에 깔아 둔 건초 더미를 훑었다. 말이 흥분하여 여러 차례 발을 구르고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돌아다니느라 남은 여러 개의 발굽 자국 안에, 희미한 붉은 흔적이 있었다.
“…….”
유더는 그 붉은 흔적을 유심히 응시하다 천천히 그 자국을 따라 백마의 발끝으로 눈길을 옮겼다.
‘오른쪽 뒷발에서부터 시작된 거군.’
저것은 분명 피다. 그러나 말에게서 나온 피는 결코 아니었다.
정확히는 말이 피를 밟았기에 배어든 자국이었다.
유더는 이 말이 바로 바깥에서 불태워진 안장의 주인임을 확신했다.
‘역시 말도 살아 있었어. 놈들이 아직 안 죽인 덕분에 찾았군.’
“가자.”
유더는 울타리를 열고 말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말은 고삐를 당겨도 따라오지 않고 머리를 저으며 투레질을 했다.
‘이 녀석에게도 분명 얌전히 만드는 능력을 썼을 텐데 혼자만 깨어 있는 데다 이 정도로 저항이 심하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흥분 상태였고, 각성자 쪽의 능력이 강하지 않았던 탓이겠지.’
말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인이 죽고 갑자기 낯선 곳으로 끌려온 셈이니 경계할 만하다. 진정시키는 능력을 썼다 해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할 만도 했다.
어떻게 할까. 잠재우고 데려가기엔 덩치가 너무 큰 녀석이었다.
유더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등 뒤에서 나단 주커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안 나오고 뭘 하십니까.”
“쓰레기 더미에선 쓸 만한 걸 찾아내셨습니까?”
“좀 멀쩡해 보이는 손수건과 피 묻은 옷조각을 찾은 참입니다. 2공자의 물건은 아닌 것 같지만 살해자의 물건이라면 쓸 만하겠지요.”
“좋군요. 저는 2공자의 말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 녀석입니까?”
“네. 그런데 두려움과 저항이 심해 나오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유더는 자신의 추측을 간략히 설명했다. 2공자의 실종된 하인이 말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각성자였을 수 있다는 말에 나단 주커만이 눈썹을 살짝 모았다.
“마병단 분들을 보았을 때부터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온갖 능력이 다 있군요.”
“혹시 이런 상태의 말을 진정시키거나 다루는 방법을 아십니까.”
“아일 경의 힘으로는 안 됩니까?”
“제 능력은 주로 살상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킨 다음 싣고 가는 것보다는 말을 저보다 더 많이 다루어 보셨을 주커만 경의 의견을 먼저 구해 보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단 주커만은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유더를 응시하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안 되지요. 잠깐 나와 보십시오.”
유더가 옆으로 비켜서자 나단 주커만이 나섰다. 그는 말의 머리와 곳곳을 쓰다듬으며 귀에 짧은 휘파람 소리를 몇 번 내었는데, 놀랍게도 그러자 말이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이 어느 정도 그의 손길에 익숙해질 때까지 쓰다듬다가 등을 돌렸다. 말이 나단 주커만의 등 뒤에 묶인 부서진 안장을 발견했다. 고개를 쭉 뻗어 새카맣게 탄 안장의 냄새를 몇 번 맡던 녀석이 이윽고 몸을 떨며 투레질을 했다.
“오히려 말을 더 흥분시키고 계신 것 아닙니까?”
“말은 생각보다 훨씬 똑똑합니다. 자신의 주인도, 사용하던 안장이나 물건도 모두 알아보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흥분한 건 자신의 안장을 알아보고 제게 일어난 일을 떠올렸기 때문일 겁니다.”
대답한 나단 주커만이 다시 몸을 돌려 말을 마주했다.
“네 집으로 가게 해 주려는 거다. 안장과 함께 가는 거니 안심해도 좋아.”
그렇게 말하며 기사는 천천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아까 유더가 당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항하듯 얌전히 서 있었으나, 잠시 후 거짓말처럼 걸음을 옮겨 천천히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보고도 믿기 힘든 해결이었다.
“대단하시군요.”
유더는 솔직하게 그를 칭찬했다. 나단 주커만은 아주 조금 머쓱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말고삐를 놓치지 말고 잘 잡고 계십시오. 말들을 자극하여 깨울 겁니다.”
“예?”
유더는 그 즉시 능력을 사용했다. 땅이 우르릉거리며 울림과 동시에 잠든 듯 조용했던 나머지 말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히히힝!”
그와 동시에 본채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유더는 이곳으로 달려오는 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단 주커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들이 또 깨어난 거라 판단하고 방심한 채로 올 겁니다. 전투가 일어날 테니 말에게 피해가 없도록 물러나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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