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화
“내 추측이 얼마나 진실일지는 아직 몰라. 하지만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아.”
칸나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죽은 걸로 발표해 달라고 한 거야. 그게 바로 혀를 깨물라고 명한 자가 바란 것일 테니까.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 숨어 있는 곳에서 빠져나오지 않겠어?”
“어쩐지, 그래서였구나.”
랭바튼과 엘라가 혀를 깨물고 나서 겨우 살아난 뒤, 마병단은 그 사건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다만 내용은 진실과 조금 달리 그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가케인은 그 발표 사항을 정하기 전 부단장 세 사람과 태양궁 사이에 몇 번 연락이 오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가케인은 마병단에서 실력으로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단원 중 하나지만 부단장은 아니다. 이런 큰 현안에 대한 결정권이나 의견을 낼 권한까지는 없어 왜 사실과 다른 발표가 나왔는지 과정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뭐, 우리 부단장들이 다 생각이 있을 거라 여기긴 했으니까.’
칸나도, 에버도, 스티버도 처음 부단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달리 이제는 어엿한 책임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무언가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판단했기에 세 부단장과 더불어 황제까지 허락을 내린 것이리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든든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자들이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생각보다 뒤쫓기가 더 힘들어서 고민이었는데, 덕분에 곧 성과가 있을 것 같네. 고마워, 칸나.”
“그런 말 마. 내가 전에 저 사람들 숙소에서 너와 힌, 핀이 가져다준 물건으로 능력을 읽어 냈었던 거 기억 안 나? 현자의 곁엔 지금 작정하고 숨기 좋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만 남아 있다고. 쉽지 않은 게 당연하지. 그래도 가케인 네가 폐하의 명을 따라 나한의 행방을 알아내긴 했잖아.”
케일루사 황제가 가케인과 정보부원들에게 명령한 일 중 가장 중요한 게 그것이었다. 가케인은 칸나를 비롯하여 추적에 능한 다른 마병단원들의 도움을 받아 나한이 향했을 방향을 추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도를 빠져나가 남쪽으로 갔지.”
나한은 수도의 남문을 통하여 사라졌다. 정확하게 남쪽 지방으로 갔다고 단정하긴 아직 어려웠지만, 가케인은 어쩐지 그가 그쪽으로 간 게 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현자와 완전히 갈라섰으니 나한도 이제 대놓고 자신의 편을 들 이들을 전부 모아서 독립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커. 서부 거점은 사라졌으니 중부 거점, 혹은 남부 거점으로 향했을 것 같아.”
“남부 거점으로 간 거면 거기 있을 유더와 단장님이 금방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좋을 텐데.”
“그러게. 유더 손에 걸리면 이번에야말로 나한도 별수 없이 잡히겠지?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닌 것 같던데 말야.”
칸나와 가케인은 동시에 입단 동기 중 마지막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디에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친구를 생각하면 저절로 슬쩍 웃음이 나왔다.
“이제 돌아가자.”
“그래.”
“아, 이제 가시게요? 조심해서 돌아가시고 나중에 뵈어요.”
“네, 사제님께서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단으로 돌아오셔야 해요!”
두 사람은 루산과 인사를 나누고 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생각지 못했던 연락과 마주쳤다.
“가케인! 칸나! 둘 다 왔군요! 태양궁에서 방금 연락이 왔어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에버가 드물게도 바짝 날이 선 얼굴로 말했다.
“연락요? 무슨……?”
가케인의 얼떨떨한 답에 에버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중요한 소식이 둘이에요. 첫 번째는 마병단 남부 지부가 있는 샬로인에서 헤른 공작가의 2공자가 각성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그래서 현재 마병단이 큰 의심을 받고 있다나 봐요.”
“…혹시 나한이 벌써 거기까지 간 건 아니겠지?”
칸나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에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순간이동이 가능한 호산라는 여기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단장님이 알아서 잘 처리하실 거라고만 믿고 있어선 안 돼. 우리도 언제든 남부에 지원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협력하라는 명이야.”
“어… 두 번째는 뭐죠?”
가케인의 질문에 에버가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는 감시 대상인 렌보우 자작이 현재 4구역 외곽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소식이에요. 폐하께선 그자가 있는 곳에 현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 중에서 은신이나 위장에 능한 이들을 뽑아 뒤쫓으라는 명이 왔어요.”
“아. 그러면 바로 가겠습니다!”
방금까지 일하다 돌아왔음에도 가케인은 불평 한마디 없이 바로 다시 뒤를 돌았다.
“잠깐만요, 가케인. 당신이 저번에 현자와 나한 측 모두에게 얼굴이 팔렸단 걸 잊은 건 아니죠?”
“……아.”
가케인이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삐걱대는 모습을 보며 에버가 살짝 웃었다.
“아니, 물론 가지 말란 뜻은 아니에요. 당연히 보내려고 찾은 거죠. 그림자 분신은 멋진 능력이잖아요? 하지만 이번엔 앞으로 나서선 안 돼요. 모습은 감추되 철저하게 그림자 분신으로 다른 동료들을 지원해 줘요. 할 수 있죠?”
“물론이죠! 그럼 나머지는 누가……?”
“저번에 얼굴이 팔리지 않은 힌과 핀, 그리고 아직 정식 단원은 아니지만 2차 단원 모집에 멋지게 합격해 곧 그렇게 될 사람들이요. 힌과 핀은 바깥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고, 나머지는…….”
말끝을 흐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두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어쩐지 두 분 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인형처럼 고운 얼굴을 지닌 가늘고 화사한 미소년, 레블린 샨 아페토.
그리고 그의 옆에 선 건 언뜻 상대적으로 평이해 보이는 외모 속에 영리한 눈빛을 지닌 금적색 머리칼의 청년, 프루엘레 반 타인이었다.
두 사람은 일련의 사건들 뒤 마병단의 임시 단원이란 신분으로 체류했으나 2기 모집이 시작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정식 지원 신청서를 내고 시험에 도전해 합격했다. 아직 모집 일정이 다 끝나진 않았지만 이젠 정식 단원이라 부를 수 있는 몸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4구역 외곽엔 귀족들이 주로 방문하는 외유 장소가 많죠. 자연스럽게 방문해 수상한 자들을 찾아내려면 우리가 적당할 것 같다고 에버 부단장님이 말씀해 주셔서 바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프루엘레가 합류한 이유를 밝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이렇게 저희 다섯만 가는 건가요?”
“아니요. 각성자를 찾아내야 하니 니폴렌도 데려갈 거예요. 사실 전 그냥 니폴렌의 보호자 자격으로 가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프루엘레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타인 가의 1공자이자 변신이라는 뛰어난 위장 능력을 갖춘 이의 말치고는 몹시 겸손한 태도였다.
“니폴렌의 능력이 분명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괜찮을까요? 사람이 많으면…….”
타인을 두려워하여 하루 대부분을 고양이 모습으로 지내는 니폴렌을 걱정한 칸나가 묻자 프루엘레가 흔쾌히 대답했다.
“오, 그럼요. 호수와 산책용 숲이 우거져 있어 니폴렌에게도 그리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프리실라… 음. 제 동생의 지원도 조금 받아서 공식적으론 그곳 근처에 있는 타인 가의 사유 공간을 방문하는 걸로 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괜찮다고 판단했답니다.”
프루엘레는 가문의 후계자 자격을 포기한 뒤 공식적으로는 반쯤 연을 끊은 상태로 마병단에 들어왔다. 그러나 형제자매들과는 여전히 친밀하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과 성에 미련이 전혀 없어 모두에게 자신의 이름을 엘레라고만 소개하는 소탈한 청년이 간만에 동생의 힘을 빌리기로 한 건 막내 니폴렌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아… 그렇군요. 괜한 걱정을 했네요.”
“그럴 리가요. 늘 니폴렌을 걱정해 주셔서 저희 남매 모두 진심으로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칸나 부단장님. 그리고 에버 부단장님도요.”
“어, 저요?”
“저번에 만들어 주신 방석을 니피가 정말 좋아했거든요.”
“아아…….”
심각한 상황조차 잊고 갑자기 분위기가 몹시 훈훈해졌다. 에버에게까지 감사 인사를 전한 프루엘레는 몹시 기분 좋은 얼굴로 가케인에게 눈짓을 했다.
“자, 그럼 가실까요?”
***
유더는 오래지 않아 키시아르가 말한 저택을 찾아냈다. 몹시 평범해 보이는 귀족가의 전통 있는 저택 그 자체였다.
앞을 지나다니는 이들도 한없이 평온하게만 보여 그 속에서 나단 주커만을 어찌 찾아내나 싶었지만, 유더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찾는 데 성공했다.
상대측에서 눈 깜박할 사이 어느샌가 등 뒤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셨군요.”
눈에 띄지 않는 차림새를 한 나단 주커만이 유더에게 눈짓을 했다.
“일단 따라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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