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화
“아, 오셨어요.”
“네, 사제님. 이논 약사님은요?”
“본부에 계세요.”
랭바튼과 엘라는 모두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혹 일어나도 또다시 자해하지 못하도록 구속하여 막아 둔 모습을 가케인은 찌푸린 얼굴로 꼼꼼히 훑었다.
그는 이들이 혀를 깨물던 당시 바깥에서 현자의 행방을 조사 중이었기에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저 모습만으로도 그때의 끔찍함이 저절로 충분하리만큼 상상되어 차가운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정신을 잃은 상태라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어떤 생명력 같은 게 모조리 빨려 나간 듯 메말라 보이는 건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니 당연히 정상 상태는 아니겠지만 말야…….’
가케인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이 혀를 깨물라고 세뇌한 게 현자겠지?”
“아마도.”
“능력 하나로 남의 생사까지 결정할 수 있다니 정말 무서운 힘이네. 그런데 이전의 다른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과 달리 이 사람들은 왜 잡히자마자 죽도록 만든 걸까.”
“그때는 필요가 없었고, 지금은 있어서가 아닐까요? 이 사람들이 황태자궁까지 드나든 사람들이란 걸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면 불리해질 테니까요. 증거와 증인을 한꺼번에 없애는 거죠.”
이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현자에 대해 얼추 알게 된 루산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칸나는 루산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각성자다운 생각으로 다른 의견을 말했다.
“사제님 말씀도 한 이유겠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죽이는 게 더 이득이 되기 때문에 죽였다면 현자는 다른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도 이미 죽였어야 해요. 하지만 아직 그러지 않았죠. 제 생각엔…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한 상대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가능성도 크다고 봐요.”
“능력을 쓸 수 있는 조건?”
가케인의 질문에 칸나가 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생각을 고르는 표정을 지었다.
“가케인. 내가 그간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사람들을 계속 조사해 온 건 알지?”
“물론 알지. 너보다 그 사람들에 대해 잘 아는 마병단원이 또 있겠어?”
“그래. 그렇게 많이 들여다보다 보니까 현자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발동되는 건지 슬슬 조금씩 알 것 같더라. 현자보다 나한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이번에 골고루 잡혀 온 게 도움이 많이 되었거든.”
그렇게 말한 뒤 칸나는 루산과 가케인을 향해 부탁을 하나 했다.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은 아직 추측에 불과하긴 하지만, 다른 곳에는 이야기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물론이죠. 신께 맹세코 비밀은 지킬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음… 네가 필요하다면 단장님이나 유더가 묻더라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면 될까?”
신에 대한 맹세와 비견될 만한 뭔가를 찾아 고민하던 가케인이 내뱉은 말에 칸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단장님이나 유더가 물으면 말해야지. 그쪽엔 당연히 곧 보고할 거니까!”
“하하……. 그래, 그러면 단장님과 유더만 빼고.”
“어쨌든, 내가 여태까지 힘을 써서 읽어 본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의 상태를 통해서 추측해 본 현자의 능력은 확실히 세뇌가 맞아. 다만, 그게 현자가 바라는 모든 걸 언제든 명할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어… 능력 사용에 한계가 있단 거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응. 현자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수준의 세뇌를 쉽게 쓸 수 있다면 애초에 나한 같은 사람이 나오지도 않았겠지? 아무리 믿는 상대라 해도 죽으라 명한다고 정말 곧바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살고자 하는 본능을 거스르게 만드는 능력은 어마어마하게 힘이 들고, 거기에 더해 사전 조건까지 필요했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야.”
현자나 나한 정도로 무서운 능력은 아니어도 마병단 정과에는 정신계 능력자가 몇몇 있었다. 그리고 칸나는 그들을 이끄는 이로서 정신계 능력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단원들에 비해 몹시 높았다.
“정신계 능력은 똑같이 발휘해도 상대에 따라 위력이 달라져. 이번에 가케인 너도 나한을 상대해 봤으니 알겠지만 의지가 강한 상대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데, 조건에 따라서는 본디 발휘할 수 있던 힘 이상으로 먹히기도 해. 여기까진 이해가 되지?”
“응. 그래서 그 사전 조건이라는 건 뭔데? 충성심?”
“물론 그것도 있겠지. 근데 여기서부터가 더 중요해.”
칸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그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을 만날 때 현자를 만난 첫 순간에 대해 질문해 봤어. 그리고 놀랄 만큼 공통된 경험 정보를 하나 읽어 냈지. 내 추측에 따르면 현자는 그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반드시 능력을 사용했던 것 같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능력을……? 세뇌를 대놓고 했단 거야?”
“나그란의 별에 처음 들어온 각성자는 반드시 현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직접 만나야만 가입이 승인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어. 그리고 나서는 현자에게 단체 생활 규범 교육을 받고, 그리고 나서야 적성에 따라 일을 분배받았대.”
이 사항은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이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이야기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칸나는 이야기한 이들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어떤 은밀한 것들을 그 속에서 읽어 냈다.
그건 그녀가 얼마 전 태양궁의 침범자들을 막아 냈던 일 이후로 능력이 또다시 한 발짝 성큼 성장한 덕이었다. 최초에는 그저 만진 대상의 정보를 무작위로 읽을 따름이었던 힘이 이제는 바라는 유형의 정보를 마음대로 골라내고 대상의 과거 정보를 토대로 기억이나 생각을 재구성해 읽어 내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무리하면 거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그녀의 힘이 닿은 대상과 닿은 적이 있는 제3자의 정보까지도 아주 조금 읽는 게 가능했다. 말하자면 ‘대상’을 일종의 매개체 삼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 방식은 ‘대상’에게 깊은 접촉이나 특징적인 경험을 남긴 제3자가 아닐 시에는 읽어 내기가 불가능했다.
즉 이번의 경우는 나그란의 별에 속해 있었던 모든 각성자들에게 ‘현자’와의 만남이 너무나 깊은 인상과 특별한 경험으로 남겨져 있었기에 한 다리를 건너뛰어서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생존을 위해 뭉친 비밀 조직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규칙이지. 근데 말야.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반드시 현자 혼자서만 신입 각성자를 만나고 교육을 담당했다는 게 좀… 그자의 능력을 생각하면 참 먹음직스러운 상황 아닐까?”
“그렇네. 세뇌 능력을 발휘하기에 교육만큼 좋은 요소는 없겠지. 가르치는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르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가케인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칸나가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믿음. 내가 읽어 낸 정보에 의하면 현자는 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도 고향을 떠나 힘들게 살아온 능력자라는 걸 밝히고 신입 각성자들에게 항상 같은 말을 했어. 뭐냐면, 태양신 경전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구야.”
“-빛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어둠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모든 두려움 속에서도, 믿으라! 나아가는 이를. …경전 3장 98행에 쓰인 ‘믿음의 유언’이겠군요.”
루산이 경전이란 말에 반응하여 바로 대답했다. 칸나가 정답을 선언했다.
“맞아요.”
“사자 오르헤가 태양으로 돌아가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하죠. 나아가는 이를 믿으라는 말 때문에 단체를 이끌어야 하는 사제님들이 특히 인용하길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아… 그것까진 몰랐네요. 하지만 그 말로 인해 사람들이 현자를 믿기 시작한 건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나그란의 별에 들어가기 전에 온갖 경험을 겪어 불신과 경계에 가득 차 있던 각성자들은 그 말을 들은 이후 무언가에 개안한 듯 마음을 열고 현자를 믿기 시작했다. 교육이 끝나고 나서는 현자가 얼마나 선량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반발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칸나는 이에 대해 설명한 뒤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있지. 세뇌란 건 말야, 너무 복잡하면 안 먹힌대. 날 믿으라는 말만큼 짧고 간단하면서 현자에게 이득이 될 말이 어디 있겠어?”
“그 방식으로 나그란의 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세뇌할 수 있었겠구나.”
“응. 그 이후에는 세뇌가 특별히 가장 잘 먹힌 것 같은 사람을 교육 과정에서 걸러내어 측근으로 삼고 계속 강화를 했겠지.”
칸나가 읽어 낸 바에 따르면 현자가 ‘믿으라’는 말 이외에 각성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말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걸 통해 생각해 보면 아마 현자가 사람에게 세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보통은 한 사람당 한 번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여. 그리고 한번 박아 넣은 세뇌를 강화하는 건 가능한 듯하지만, 그 이후 아예 다른 계통의 세뇌를 다시 하는 건 안 되는 것 같아. 예를 들면… 음……. 장미를 좋아하라고 세뇌한 사람의 세뇌를 심화해서 장미 가시를 삼키라고 하는 건 되는데, 갑자기 백합을 좋아하라고 하는 건 안 되는 그런 느낌? 뭔지 알겠어?”
“알 것 같아. 믿음을 계속 강화해서 혀까지 깨물게 만드는 건 되는데, 아예 다른 사람을 믿도록 만드는 건 안 된다는… 그런 거잖아? 그러면 나한에게 그 세뇌가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도 어쩌면…….”
가케인의 머릿속에 이전에 들었던 현자 측과 나한의 말다툼이 슬며시 떠올랐다.
“나한이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 합류하느라 교육 같은 과정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땐 초반이라 자길 믿으란 것 말고 뭔가 다른 걸 세뇌한 것일 수도 있었겠구나. 그러면 난리가 났는데도 능력을 안 쓰고 나한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이유도 설명이 되겠는데.”
“역시 가케인이야. 내 생각하고 똑같네. 설명을 잘 받아 줘서 고마워.”
그리 말한 뒤 칸나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랭바튼과 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랫동안 현자에게 반복해서 세뇌당했을 거야. 믿음이 계속해서 중첩되다 보면 현자의 일이 자신의 일이나 다름없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겠지. 그런 사람들이기에 현자가 여기까지 데려와 방패로 썼을 테고.”
“…….”
“내 추측이 얼마나 진실일지는 아직 몰라. 하지만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아.”
칸나가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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