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화
“…너무 슬퍼 마십시오. 우리는 언젠가 랭바튼과 엘라를 하늘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나한은… 그래요. 이 사람이 무리하여 디아카 공작을 뵈려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현자가 조용히 그들을 달래며 속내를 이야기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우리를 보호할 힘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계신 분은 황태자 전하가 아닙니다. 바로 그분을 그 자리에 세운 디아카 공작이시지요. 그분은 곧 이 제국의 모든 것을 쥐게 되실 분이며, 능력과 충성심이 있는 이라면 신분과 관계없이 똑바로 보아 주시기로 유명합니다.”
디아카 공작이 예전부터 실력은 출중하나 갈 곳이 없는 평민 출신 기사들이나 가난에 쪼들리는 몰락귀족 출신들을 소수 거두어 가문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온 건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최근 디아카 가의 사병을 각성자들로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좋은 의도에서 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현자의 말을 듣는 젊은 각성자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나그란의 별을 외면하더라도 그분께서만 믿어 주신다면 당당히 결백을 밝히고 나설 수 있습니다. 나한이 무슨 일을 한다 해도 우리를 더는 힘들게 하지 못할 겁니다.”
“아…….”
“그분이 우리의 편에 선다면, 우리의 말을 믿게 된다면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아도 됩니다. 죄지은 것도 없이 마병단을 피하며 두려워하던 형제자매들이 당당히 거점에서 빠져나와 능력을 펼치는 모습이 상상되십니까?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예. 상상됩니다… 상상되고말고요.”
네조가 눈시울을 붉히며 벅찬 표정을 지었다.
“이 시련만 이겨 내면 여러분은 이 제국의 주인이 될 분과 함께 나라를 이루는 새로운 한 축이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이 늙은 육신을 바치는 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현자님……!”
“저희를 위해 그렇게까지…….”
눈물 어린 목소리들을 들으며 현자는 힘겹게, 그러면서도 자애로운 보호자처럼 웃었다.
“자. 울지 마십시오. 오늘 저녁입니다. 저녁까지는 4구역에 가야 하니 이제 서두릅시다. …랭바튼과 엘라를 위해서.”
“랭바튼과 엘라를 위해서……!”
외침 속에서 현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빛은 입술에 걸린 웃음과 달리 몹시 서늘하고 차가웠다.
***
똑똑. 열려 있는 문을 두드리며 고개를 내민 가케인이 목소리를 내었다.
“칸나. 아직 바빠?”
“응? 아니. 안 바빠. 이제 곧 단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바쁘게 뭔가를 적고 있던 칸나가 씩 웃으며 마지막 글자 끝에 마침표를 찍고서 일어났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파티 때 마병단이 황제에게 하사받은 건물 중 한 곳이었다. 키시아르는 단 본부와 가까우면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그 건물을 간단히 손보아 각성자용 감옥과 조사 시설로 개조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옥과는 다소 다른 내부 구조를 띠고 있었다.
일단 이곳의 내부는 본디 저택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기에 몹시 밝고 따뜻했다. 수용 공간마다 창살과 잠금장치가 있기는 해도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겉만 보면 조금도 감옥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마법진과 단원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건물 전체와 그 주변까지 철저하게 봉쇄한 데다 방음은 물론, 주변을 지나다니는 이들의 인식을 저하하는 힘까지 적용되어 있어 평범한 이들은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키시아르가 없는 사이 이 건물을 관리하고 사용할 권한을 받은 이가 바로 정과 부단장 칸나 완드였다.
사실 그녀는 키시아르와 유더가 돌아올 때까지 이 건물의 문을 열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나그란의 별 폭발 사건이 예상을 깨고 이곳에 들어올 이를 대량으로 만들어 마병단 본부의 공간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칸나는 잡혀 온 각성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머물러야 했다.
칸나는 용건을 말하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하는 붉은 머리 친구를 향해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정보를 읽어 내면 가케인이 왜 왔는지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힘을 쓰지는 않는다. 그러기 위해 힘 조절 능력을 키우지 않았던가.
“그냥, 나도 이 근처에 있었는데 네가 곧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아서… 같이 단으로 가려고.”
“와. 여기서 단까지 가는 데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데 날 호위해 주려고 온 거야? 멋지네, 가케인. 과연 황제 폐하께도 칭찬받은 볼룬발트 경!”
“아니, 멋있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당연히 네 안전을 우선으로 챙기는 게 맞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직 너무 위험하고…… 혹시 네가 위협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칭찬은 너도 전에 똑같이 받았잖아…….”
칸나가 낄낄대며 놀리자 가케인이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로 항변했다. 그가 정말로 그저 칸나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무리해서 온 것임을 알기에 칸나는 그쯤에서 선량한 친구를 그만 놀리기로 했다.
“으응 그래, 역시 입단시험 동기밖에 없지. 고마워.”
입단시험 동기란 유더, 가케인, 칸나 셋을 일컫는 말이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좋아하긴 하지만, 칸나는 입단 시험 전부터 함께한 나머지 두 사람에게 각별한 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가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뭘 쓰고 있었던 거야?”
가케인이 칸나가 쓰다 만 종이를 흘긋 보며 화제를 돌렸다.
“음식 이름에, 지명에… 뭔가 이상한 단어가 많네.”
“아, 이거? 여기 들어와 있는 사람들한테서 읽어 낸 정보 정리한 거야. 양이 많아서 전부 다 계속 기억하고 있기는 힘드니까 일단 매일매일 다 적어 놓고, 보고할 때는 여기서 중요한 것만 빼내는 거지.”
“아…….”
칸나가 아무렇지 않게 갈겨 쓴 종이 내에 든 정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제야 깨달은 가케인이 깜짝 놀랐다.
“오늘 어치 정보는 다 썼으니까 이제 루산 사제님이 돌보는 사람들만 보고 가면 될 것 같아. 같이 갈래?”
“으음, 혀 깨물어서 난리가 났던 그 사람들 말이지.”
“그래.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라고만 표현했지만 누구인지는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그들은 폭발 사건에서 잡혀 온 이들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이질적인 자들이었다. 칸나가 읽어 낸 그들의 이름은 랭바튼과 엘라. 줄곧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칸나는 뛰어난 능력으로 그들이 현자를 따르던 이들이라는 사실까지 읽어 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칸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랭바튼과 엘라에게서 무언가 묘한 정보를 하나 더 읽어 냈다.
‘이 사람들한테서 뭔가 이상한 정보가 읽혀서 자꾸 신경이 쓰여. 아무래도 정신을 잃기 전… 사건 전후로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그걸 알아내기 위해 칸나는 코피를 흘릴 만큼 한계까지 능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유로 짐작되는 정보를 하나 읽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사람들은 그날 분명 어떤 정신계 능력을 마주했어. 나한의 환상이 아니라, 그것보다 먼저… 생명과 관계된 뭔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을.’
그리고 그건 아마 현자의 세뇌 능력과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판단한 그녀는 의료부 두 사람을 모두 소환한 뒤 비로소 눈을 뜬 두 사람에게 신중하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 현자를 따르던 사람들이죠. 그날 일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들은 별안간 혀를 깨물고 쓰러졌다. 아무런 징조도 없었고 공격성을 내보일 만큼 기력이 넘치지도 않았다.
그저 일어나서 입을 열 기운도 없이 겨우 눈만 깜박이던 이들이 동시에 내보인 행동에 모두 기겁했으나 다행히 바로 곁에 신성력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루산과 이전의 경력은 알 수 없어도 실력은 수상하도록 뛰어난 이논이 있었다.
이논은 미리 어디선가 준비하여 가져온 약을 먹여 그들의 멈춘 숨통을 도로 뚫었다. 루산은 끝없이 쏟아지는 피를 멈출 치유력을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다시 두 사람의 숨을 이 세상에 붙여 두는 데 성공했다.
약간의 수상함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칸나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칸나가 당당한 걸음으로 머물던 공간을 나섰다. 힘을 불어넣은 매개체를 통해 뭔가를 붙이는 게 가능한 마병단원이 한 달 어치 힘을 전부 써서 만든 복도는 서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곳이 이어져 있거나 혹은 떨어져 있어 처음 오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렇지만 칸나는 거침없이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잠시 후 도달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을 돌보던 루산이 고개를 돌렸다.
“아,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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