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04화 (704/805)

704화

‘게다가 우린 때마침 남부 어딘가에 숨어 있을 남국인 상인들을 쫓고 있지. 하필 남국계 하인에 각성자가 얽힌 살인 사건……. 연관이 있다 생각하고 쫓아 봐서 나쁠 건 없어.’

마이라가 떠난 뒤, 키시아르 또한 조사를 위해 떠난 이들을 마냥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마병단으로 잠시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나단. 나는 보좌와 함께 돌아가도록 할 테니 너는 먼저 내가 지시한 곳으로 가 있도록.”

“알겠습니다.”

확실히 남들에게 알려선 안 될 이야기를 하기에는 단둘만 있는 마차가 최적이었다. 유더는 마차에 올라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방금 새로 기억해 낸 정보와 자신의 추측을 전달했다.

“이전 게임에서는 콘체 남작가의 사람이 헤른 공작의 작위를 차지했었던 게 기억났습니다. 그러니 2공자의 죽음도 그들이 배후에 있다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고, 또 콘체 남작가의 뒤에 남국인 상인들의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역시 그랬군. 아까 콘체 남작가의 이름이 나올 때 반응이 남다르더라니.”

키시아르는 입술 밑을 가볍게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전 게임의 마이라 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네가 해 주었을 때,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공작 작위 승계권을 넘볼 수 있을 만한 이들을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

“네. 그런 말씀을 하셨었지요.”

“미처 조사를 제대로 마무리하기도 전에 또다시 2공자가 세상을 떠나 버리게 되어 내뱉은 말이 부끄럽게 되었지만, 승계권에 손을 댈 수 있을 만한 혈통을 지닌 가문들의 목록과 간단한 정보까진 알아냈었네. 콘체도 그중 하나였지.”

그 말을 나눈 지 고작 하루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대체 언제 조사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전부 다는 못 했다지만 그래도 키시아르가 콘체 남작가에 대한 부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유더는 새삼스레 키시아르 라 오르의 일 처리 속도에 약간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계속해서 경청했다.

“콘체 남작가는 헤른 가 내에서 그리 존재감이 크지 않아. 현 남작이 돈을 흥청망청 쓰는 타입이라 재산도 거의 없고, 헤른 가를 이루는 방계의 일원이자 혈통이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체면치레를 할 뿐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냐는 듯 키시아르가 한쪽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즉 만약 마이라 1공녀마저 사라져 후계자의 위치가 방계로 넘어가게 된다고 쳤을 때, 가문 내에서 그들을 지지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그런데도 이전 게임에서 그들이 승리했다면, 아마 2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금이 바로 그 ‘이유’를 보게 될 적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그리고 만약 그 이유가 정말로 남국인 상인들과 그 주변 세력 때문이라면…….”

“지금부터 콘체 남작가 주변을 살피고 있으면 그놈들 본인이든, 흔적이든 발견할 확률이 높아지겠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제가 가서 살피고 있겠습니다.”

유더는 바로 손을 들어 자원했다. 남국인 상인 놈들의 숫자가 총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키시아르의 검을 받아 낼 만큼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닌 놈이 섞여 있는 걸 본 이상 방심할 수 없었다.

키시아르 본인은 2공자 살해 건으로 완전히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병단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위치이고 시선이 몰려 있을 테니 지부를 오래 벗어나선 안 된다. 제가 은밀히 움직이는 게 제일 낫다고 판단했다.

혹 키시아르가 안 된다고 하면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유더의 표정만 한번 살피고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할 줄 알았네.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단, 나단과 함께.”

“…….”

“그 녀석도 검의 극의를 본 이니 방해가 되진 않을 거야.”

소드마스터인 나단 주커만을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 정도로 표현하면 안 될 듯했으나 키시아르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 넘겨 버렸다.

그리고 유더는 그제야 아까 떠나기 직전,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을 먼저 어디로 보냈는지 드디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출발도 전부터 꿰뚫고 있었던 거군.’

기가 막혀 쳐다보았으나 키시아르는 그저 웃었다.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과하다지만, 나는 이 일에 남국인 상인들이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맞을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네. 이전에 그들이 타인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일을 준비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초 남쪽의 주인인 헤른에게는 손을 안 썼을 거라 확신하기 힘드니까.”

“네.”

“참으로 위험한 자들이지.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너와 나단을 둘 다 보내려는 건 아니야.”

“…그럼 또 무슨 이유가 있으십니까?”

대부분의 경우 키시아르의 생각이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편이지만 이건 가늠하기 어려웠다.

유더가 의문을 드러내자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번에 확실히 그들의 수작을 확인한다면 우리가 얻는 정보가 하나 더 생기지. 바로 이전 게임에서도 그들이 똑같이 수를 썼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네.”

“…….”

“너는 이전 게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거기에 그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 그건 즉 그자들이 너에게도 미지의 적에 가깝다는 뜻이야.”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리고 깊은 울림을 담아 마차 내에 울려 퍼졌다.

“정보적 이점을 쥐고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쪽에 유리하게 바꿀 자신이 있는 다른 적들과는 달라. 이렇다 할 정보도 없고, 목적과 의도조차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방심해선 안 되겠지. 그런 상황에서 미지의 영악한 적을 탐색하기 위해 모험을 하기보다는 안전을 추구하며 1공녀를 확실하게 지킬 방도를 찾아내는 게 나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네.”

유더 또한 서부에서 남국인 상인들을 상대한 이래 그자들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정보부와 함께 제법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키시아르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야.’

키시아르가 왜 굳이 콘체 남작가를 살피는 일 따위에 자신에 이어 나단까지 보내는 강수를 썼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되었다. 그건 단 하나의 방심조차 남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유더는 지금까지 미래의 많은 부분을 비틀어 죽을 이를 살려 내고 본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결과를 얻어 내었다. 그렇게 많이 바뀌었는데도 또 어떤 사건들은 다른 조건 속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기도 했다. 헤른 2공자의 죽음이 그러했다.

유더에게조차 미지로 남아 있는 적, 남국의 부족이 연관되었기에 그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면 1공녀 마이라라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기 어렵다. 한시라도 빠른, 그리고 신뢰할 만한 확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자. 이걸 가져가게.”

콘체 남작가로 향하는 길을 알려 준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손가락에 낀 반지 하나를 내주었다. 이번에 내기 격투장에서 사용한 뒤 힘을 잃은 몇몇 마도구 대신 새로이 바꾸어 낀 반지였다. 유더는 그저 평범한 은반지처럼 보이는 반지 안쪽에 마도구답게 알 수 없는 진이 아주 작게 문양과 뒤섞여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3회쯤 쓸 수 있는 연락용 마도구네. 나단에게도 비슷한 게 있지만 하나 더 주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반대쪽 손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색이 다르지만 디자인은 거의 흡사한 반지 하나가 반대쪽 손가락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개가 한 쌍이고, 안쪽을 세 번 훑으면 서로 반응을 일으켜. 구조 요청을 필요로 할 때 사용하게.”

“알겠습니다.”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절대로 다치면 안 돼. 그리고… 이것.”

키시아르가 주머니에서 또 다른 뭔가를 내밀었다. 유더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고 확인하기 전, 키시아르가 그의 손가락을 겉에서 살며시 감싸 주먹을 말아 쥐게 만들었다. 손안에서 뭔가가 바스락거리는 감촉은 느껴졌지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내리고 난 뒤에 확인하게. 그럼 이따가 보지.”

“단장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유더의 인사를 들은 사내가 예쁘게 웃었다. 잠시 후 그가 마차의 줄을 당겨 유더를 내리도록 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콘체 남작가는 이 거리 끝에 있는 파란 지붕의 3층 저택이네. 나단은 그 근처에 있을 거야.”

유더는 떠나가는 마차를 잠시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던 손을 다시 펼쳤다.

안에 든 것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종이로 싼 사탕들이었다.

‘……대체 이걸 언제 또 챙긴 거지?’

분명 수도에서 떠나올 땐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 넣고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유더는 잠자코 사탕 중 하나를 펴고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혀를 적셨다.

“후우…….”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제부터 제대로 된 시작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0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