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그러면 이곳에서 더 찾아보았자 나올 건 없을 듯하니, 어떤가. 우리가 2공자의 시신이 있는 쪽으로 찾아가 살피고 조사를 돕는 건?”
그때, 키시아르가 라델에게 제안을 던졌다.
“예? 하지만 마병단은…….”
“그래.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의심받는 이들의 발을 묶어 두는 게 정석이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마병단은 2공자가 정말로 각성자에 의해 살해당한 게 맞을 시 누구보다 먼저 조사를 해야 할 입장이기도 하단 말이지. 2공자가 마병단에 오려 했다는 특수성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리되었을 테고.”
키시아르의 말이 맞았기에 라델과 기사들은 침묵했다.
“2공자가 정말로 각성자에게 살해당한 게 맞다면 우리보다 더 이 일을 빠르게 조사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거야. 더불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종이나 말에 대한 조사는 자네 말대로 빠를수록 좋을 테니 서로의 체면과 빠른 해결을 위해 마병단이 자네들을 우선 ‘돕는’ 형태로 가자고 제안하는 거라네.”
즉 마병단은 누명을 벗기 위해, 헤른과 샬로인 측은 진실을 얻기 위해 한 발짝씩 물러나 협조하자는 뜻이었다.
‘사실 마병단은 꿀릴 것이 없으니 저들이 모두 포기하고 나서 결백과 조사권을 돌려받을 때까지 버티고 있어도 되지만…… 그래서는 어느 놈들이 이딴 짓을 저질렀는지 빨리 알아내기 힘들지.’
그들은 애초에 이곳에 오래 있을 계획이 없었던 몸이다.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키시아르 또한 유더와 같은 생각을 하는 눈으로 빙긋이 웃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이 헤른 가와 마병단에 동시에 타격을 입히려 한 수작으로 느껴져 몹시 불쾌하거든. 그러니 좋은 결정을 기대하겠네.”
“저 혼자서 결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잠시 같이 온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라델과 기사들은 잠시 저들끼리 모여 작은 목소리로 회의를 했다. 눈치를 보며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 봤자, 키시아르나 나단 주커만, 바람의 힘을 살짝 이용한 유더의 귀는 피할 수 없었다.
‘이게 마병단의 함정일 수도 있다고 염려하는 자들이 많군. 한편으론 이 기회에 오히려 조사는 마병단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결과만 채 가는 쪽으로 판도를 트고 싶은 자들도 있는 것 같고…….’
그때,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나단 주커만이 뒤로 빠져 사라졌다.
“음… 이야기 결과, 마병단장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아무래도 마병단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기에, 그런 부분이 발견될 시에는…….”
“물론 그렇겠지. 그러나 우리 사이에서 적절한 조율과 도움을 줄 수 있을 제3의 단체가 마침 있지 않나?”
“예?”
바랐을 대화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아 당황한 라델과 기사들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달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 사건 소식을 전달받자마자 지노 장군님과 연락을 주고받느라…….”
그는 바로 제국군 각성자 특수부대의 대장, 선즈였다.
그가 나타남과 동시에 스르르 돌아와 본래의 자리에 서는 나단 주커만을 보면 그가 선즈를 이 타이밍에 맞추어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선즈는 자신을 떨떠름하게 보는 기사들 앞에서 당당히 경례와 함께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제국 남부군 소속 각협부대 대장 선즈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아까 모두 들었습니다. 헤른 가의 2공자께서 당한 불운한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서라면 남부를 지키는 제국군이자 전원 각성자인 저희 부대 측에서도 당연히 돕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됩니다.”
“전원 각성자인 부대……?”
“당신들이 이번 내기 격투장 사건에 나섰다는 그 제국군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는 아직 정식 부대가 아니지만, 남부군 본영의 지노 장군님께서 방금 소식을 전해 들으시자마자 부대의 이름을 걸고 조사와 도움을 위해 활동해도 좋다는 답을 보내 주셨습니다.”
선즈가 지노 장군이 보낸 짧은 서신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장군이 직접 찍은 문장 또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기사들이 수색을 위해 남부 지부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제국군도 모두 보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선즈가 해당 사항을 장군에게 보고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부군 본영은 샬로인에서 크게 멀지 않았기에 전서조를 이용하면 제법 빠른 연락이 가능하다는 걸 기억해 낸 기사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어제와 오늘, 이곳에는 저희 부대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이 상황에 대해 잘 판단하고 도움을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단순한 제국군이었더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즈의 부대는 마병단이 아니면서도 마병단의 활동을 일부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를 제3자가 맞았다.
지노 장군을 황제파 인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실 그 자체는 누구보다 중립적이고 청렴한 사람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소드마스터임에도 영욕을 쫓지 않고 남부군 장군이라는 자리 하나를 수십 년간 지킨 제국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하나였다. 여기서 지노 장군의 서신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상관없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임을 모든 기사들이 인지했다.
마병단의 조력을 받아들이는 형태를 취하는 대신 주도권을 잡을 예정이었던 라델은 찌푸린 얼굴로 선즈를 응시했다.
“……확실히, 공작 전하의 말씀대로 전원이 각성자이자 지노 장군님께 직접 명을 듣는 부대라면 이번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러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출발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그가 황궁기사단 수준의 바보라 감히 이 제안에 대놓고 항의하거나 토를 단다면 그때는 유더가 나설 생각이었는데, 그럴 일은 없었다. 2공자를 따랐던 티를 내며 자꾸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짜증이 났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태도가 조금만 더 불손했어도 가는 길 편안치 않게 해 주었을 텐데.’
라델이 알았다면 소름 끼쳐 했을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한 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랐다.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바람으로 살짝 주변을 휘저은 뒤 말을 거는 건 몹시 쉬운 일이었다.
“선즈를 끌어들이신 건 그의 능력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기는 하지. 이 상황에서 가장 빠르고 유용할 능력을 지녔으니까.”
“칸나의 부재가 조금 아쉽군요.”
유더가 보기에 키시아르가 선즈를 끌어들인 이유는 단순히 제3자 역할만 기대한 게 아니었다. 그의 투시 능력이 이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선즈의 투시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보이지 않는 정보까지 읽어 내는 칸나에 비할 수는 없다. 이런 사건이 터질 줄 몰랐기에 그녀의 부재가 아쉬워졌다.
수도와 남부는 샬로인과 지노 장군 정도만큼 가까운 거리가 결코 아니다. 설령 지금 당장 칸나를 안개질풍마에 태워 이곳으로 보낸다 해도 2주 가까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아니. 칸나의 체력이나 건강을 생각하면 2주도 빠르지. 사람은 원래 꼬박꼬박 자고 먹으면서 움직이는 존재니까…….’
그러니 최선의 방책은 조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될 만한 물건들을 얻어 칸나에게 보내 조사시키고 답신만 전달받는 방법이었다.
‘괜찮은 것들을 얻어 내려면 그만한 활동을 해야 할 텐데. 어디, 어떤 놈들이 이런 간 큰 짓을 저질렀는지 보자고.’
2공자의 시신은 샬로인 치안대에 있었다. 극소수의 인원만 들어갈 수 있도록 통제된 구역으로 들어서자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보지 않아도 좋다고 했음에도 기어이 고집을 부려 함께 들어온 1공녀 마이라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이를 악물었다. 헛구역질을 참기 위해서였다.
“천을 걷겠습니다.”
코와 입을 천으로 막은 기사 한 사람이 시신을 덮은 검은 천을 걷었다. 유더는 서슴없이 가까이 다가가 드러난 시신의 상태를 살폈다.
2공자는 마이라와 제법 닮은 생김새였다. 밝은 백금발이 특히 비슷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무엇이 닮았는지 더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끔찍했다. 전신에 가득한 상처 때문이었다.
‘번개에 지져진 것 같은 자국이 많아. 그 외엔 커다란 손이 쥐었다 편 것처럼 뼈가 바스라지고 피부에 자국이 남은 게 눈에 띄는군.’
“확실히 이런 상처는 기사도, 마법사도 내기 어렵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니 더욱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유더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저희 마병단 소속이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일순 침묵이 공간 내를 휩쓸었다.
“그리 확신하신다는 건…….”
“현재 마병단 내에 있는 각성자들 중에는 이런 상처를 낼 능력을 지닌 이가 없습니다.”
“실제 능력을 숨긴 채 저지른 짓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은 외부의 공범이 있거나…….”
“글쎄요. 공범 이야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각성자에 대해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유더는 시체 가까이로 다가가 번개에 지져진 듯 검고 가느다란 자국이 남은 손을 들어 올렸다. 시체에 상대적으로 익숙할 기사들도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으나 키시아르와 마병단원, 그리고 선즈와 에몬은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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