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단장님. 다녀왔습니다.”
“아. 마침 잘 왔네. 큐레이지나의 조사 결과가 올라온 참이었거든.”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유더가 다녀오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유더는 흐린 날씨도 맑은 날씨로 바꿀 듯 빛나는 사내를 잠시 응시하다 시선을 돌려 그의 옆에 시립해 있는 나단 주커만을 보았다. 각자 속한 집단 내에서 침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 시선이 오고 갔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
나단 주커만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키시아르가 기분이 좋아질 만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당장 꼭 물어봐야 할 만큼 중요한 건 아니라 보아도 될 듯했다.
‘그럼 뭐, 상관없겠지. 필요하다면 키시아르 쪽에서 나중에 이야기해 줄 테니.’
유더는 담담히 키시아르의 앞으로 다가가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읽었다. 큐레이지나의 조사를 맡은 마병단원이 받아 적은 글이 요약 정리된 종이였다.
“보면 알겠지만, 스스로 했던 말대로 누키조가 저질러 온 비리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고 있더군. 각성자 격투장을 연 뒤로 방문했던 모든 귀빈의 명단과 내부에서 묻힌 범죄, 누키조와 로비를 주고받은 외부 세력가들, 심지어 비자금을 숨겨 둔 곳까지 모두 알려 주었어.”
“…양이 굉장하군요.”
요약본인데도 끈으로 묶어야 할 만큼 양이 엄청났다. 작은 글씨로 가득 채워도 열 페이지가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래. 그 정도면 예상보다 훨씬 더 감형받을 수 있겠지. 그런데 우리가 가장 흥미 있게 보아야 할 부분은 3페이지에 있네.”
유더는 바로 3페이지로 넘겼다. 빠르게 읽어 내리던 시선이 이내 한곳에서 멈추었다.
‘-격투장에 자주 방문하지는 않았으나 누키조와 간혹 연락한 인물 중, 남국에서 왔다는 상인들이 있었다. 평소에는 얼굴과 피부색을 가리고 다니지만 누키조의 앞에서 드러낸 독특한 인상착의 덕에 기억에 남았다. 누키조의 말에 의하면 각성자 격투장을 따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 그들 덕분이라고 했다. 얼마 전, 그들 일부가 찾아와 누키조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갔다. 누키조는 품질에 문제가 생긴 ‘소금’을 그들에게서 싸게 들여오기로 계약했다고 말했다…….’
한눈에 보아도 이게 바로 키시아르가 흥미 있게 본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아래로는 격투장에 방문했었다는 남국인 상인들의 조금 더 자세한 인상착의와 ‘소금’이란 은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샬로인의 뒷골목에서 가루로 만들어진 재료 이름은 곧 마약을 뜻한다더군. 그중에서도 소금은 요리에 꼭 필요한 재료이자 바다에 인접한 남부에서 생명의 근원 취급을 받는 물건이기에 특히 질이 좋은 물건을 의미한다고 해.”
그러니까 즉 품질에 문제가 생긴 소금이란, 어떤 이유로 제값을 받기 어려워진 고품질 마약을 뜻한단 소리다.
유더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싸늘하고도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으려 했던 놈들이 제 발로 찾아와 주는군요.”
유더는 이놈들이 서부에서 놓친 그 남국인 상인들이라는 데 돈도 걸 수 있었다. 전직 마병단장의 감이 확실하다고 외쳤다. 키시아르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품질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싸게 팔려 했다는 걸 보면 우리가 바꿔치기한 가루가 상했다는 걸 이제 깨닫긴 한 모양이다 싶더군. 아직까지도 몰랐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다행이지 뭔가.”
“문제 있는 물건을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본래 계획대로 처분하자니 어려웠겠지요. 그런 물건을 팔면 어디서든 냄새가 날 겁니다.”
“우리는 그 냄새만 따라가면 될 테고.”
키시아르가 박자를 맞추어 대답했다.
“본래대로였다면 누키조는 3일 뒤 그들과 접선하여 마약을 받아 올 계획이었네. 하지만 죽어 버렸으니 그들도 꽤나 난감한 상황이겠지.”
“헤른 1공녀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할지 알겠군요.”
나단 주커만은 쿵짝이 아주 잘 맞는 단장과 보좌를 묵묵히 바라보며 차를 내왔다. 좋은 향을 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키시아르가 비밀이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 일과 나그란의 별 쪽 일을 합해서 늦어도 일주일 내로는 처리하고 떠나도록 하지. 어떤가?”
“일주일도 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느 정도 예상하지?”
“그자들도 마음이 급할 테니 잘만 흔들면 사흘도 가능할 겁니다.”
“음. 좋아. 오늘 들어 본 말 중 가장 숨 막히게 멋진 대사였네. 어떨지 한번 볼까.”
키시아르가 티스푼을 흔들며 윙크한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작게 톡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에 작은 통을 매단 전서조가 날갯짓을 하며 부리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큰 보폭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준 나단 주커만이 새의 다리에 묶인 통을 열어 작은 쪽지를 꺼냈다. 암호로 작게 적힌 겉면의 문장을 읽어 낸 기사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새벽궁에서 보낸 긴급한 전갈입니다.”
“새벽궁에서?”
키시아르는 바로 그것을 열었다. 순식간에 내용을 모두 파악한 사내가 눈을 내리깔며 음 하고 작은 소리를 흘렸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군.”
“무슨 일입니까.”
“수도에서 현자 측과 나한 측이 드디어 만남을 가진 모양이네. 물론 그리 얌전한 대화는 아니었던 모양이고.”
말을 들은 유더의 표정도 순식간에 평소의 날카로운 얼굴로 되돌아왔다.
“…사고가 났습니까?”
“여기 적힌 대로라면 건물 하나가 반파된 모양이야. 다만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병단이 그쪽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라 대처가 빨랐다고 하네. 폐하께서도 큰 피해는 없으리라 판단하셨다는군.”
현자와 나한 사이의 갈등과 분쟁 자체는 이미 이전 생에서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게 이번 생이라고 달라지진 않아서, 현자가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 측에 붙고 나한이 수도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다.
다만 이전 생에는 그들의 분쟁이 가시화된 게 수도가 아니라 남부였다는 것만이 차이점일 뿐이었다.
‘이전에는 진짜 현자가 눈에 띄게 수도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어. 나한의 존재도 마병단에 알려진 적이 없었지.’
아마 그때의 그들은 각자의 진짜 목표를 향해 본격적으로 나아가기 전, 내분으로 인해 남부 거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기에 이런 차이가 생겼으리라.
미리 대비해 놓고 온 덕에 마병단이 잘 대처한 듯하여 다행이지만, 혹 그들 사이에서 피해가 생긴 건 아닐까 조금 우려가 되었다.
“그 외에 마병단의 상황은 따로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일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바로 보낸 모양이라 거기까진 적혀 있지 않네. 아마 곧 하나가 더 오겠지.”
“…….”
요주의 인물들이 일을 쳤다는데 소식을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유더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여태까지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 거의 그 중심부에 있었거나 곧바로 뛰어들었지, 바깥에서 마냥 지켜만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내가 수도에 있었어야 했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유더는 이내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 냈다.
그도 키시아르도 마병단을 그리 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등 뒤를 맡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고 판단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걱정되나?”
키시아르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물었다. 유더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제가 거기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없어도 되도록 대비해 두고 왔으니 괜찮습니다.”
“그래. 지휘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지.”
“다만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합니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가장 멀리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볼 때야말로 판의 전체적인 모습을 잘 읽어 낼 수 있네. 패가 움직여 결과를 얻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순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지휘하는 이는 그때가 아니면 판을 읽고 다음 패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없지.”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유더가 그 말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해 함께 싸우는 때라고 생각해 보게. 그러면 불필요한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초조함이 나아질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해 함께 싸우고 있는 때일 뿐이다.
전술 게임에 빗댄 그 말이 유더에게 새삼 몹시 새롭게 다가오며 앙금처럼 남아 있던 약간의 초조함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제 손등에 닿은 키시아르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군요.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다음 소식이 수도에서 날아올 때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해 두고 다음 일을 해 볼까.”
때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병단장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른 1공녀의 시기적절한 재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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