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화
“나한이란 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일전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바다. 아일 남작은 물론, 펠레타 공작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 도망쳤었다지. 또한 현자라는 자는 도망쳐 보았자 어디로 갔을지 짐작할 수 있으니 괜찮다.”
“짐작하신다 함은……?”
감히 황제의 말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케인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황제는 이번에도 불쾌해하는 대신 도리어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짐과 마병단은 그자들이 이 궁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디서 온 이들인지 모두 알고 있으나 그들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아직 모르지.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경들과 마주쳤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면, 다시 돌아올 곳이 이곳밖에 더 있을까.”
조심성이 강하여 제 목숨을 구하려 하는 게 우선인 자들이라면 황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자가 그런 자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시작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라고 케일루사 황제는 추측했다. 그의 추측은 몹시 정확했다.
“그러니 경들이 할 일은 간단하다. 마병단은 짐을 도와 그들이 황궁에 재차 발을 들이는 즉시 잡아들이고, 도망친 나한의 뒤를 쫓도록 하라.”
명을 내린 황제는 가케인에게 그 이상의 사죄를 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실로 관대하고도 냉정하며 실리적인 태도였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명까지 들은 건 처음이었지만, 가케인을 비롯한 정보부원들은 모두 황제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보부원들이 황궁을 빠져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다른 마병단원들이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논이 보낸 심부름꾼의 연락을 받고 달려왔던 지원조였다. 그 선두에는 신과 부단장 에버가 서 있었다.
그들은 함께 마병단으로 돌아가며 겨우 긴장을 풀고 조금씩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아무도 크게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가케인이 쓰러져 있는 걸 봤을 땐 진짜 간담이 서늘했거든요.”
“하하…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에버.”
에버의 말에 가케인이 미안해하자 엘더 남매가 별안간 양옆에서 그의 엉덩이와 허리를 세차게 두드렸다. 격려라기엔 상당히 감정이 실린 손길들이었다.
“아얏. 왜… 왜 때려?”
가케인이 얼얼한 둔부를 문지르며 어이없어하자 남매가 소리쳤다.
“더 사과하지 말라고 황제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 그런데 왜 또 사과해! 그러니까 징벌이다!”
“징벌이다! 사과할 시간에 나한 그 자식 정보나 하나 더 불란 말야! 다음에 마주치면 우리가 절대 가만 안 둘 거니까!”
“아얏. 아야. 으음. 아… 알겠어. 말할게. 어차피 말하려고 했으니까 그만 두드려 줘.”
키가 작은 힌과 핀의 위치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다 커서 엉덩이를 맞자니 영 부끄러웠다.
가케인이 머쓱해하다가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나한과의 대치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지 짐작한 다른 단원들도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한의 환각 능력에 대해선 이미 유더나 루산 사제님께 들었었지만… 직접 당해 보니 정말 대단하더라.”
“하나도 대응 못 한 거야?”
“거의… 그렇다고 봐야겠지. 시야를 혼란시켰을 뿐인데도 그게 가짜란 걸 알면서 힘조차 제대로 쓸 수가 없었어. 만약 나한이 날 죽일 생각으로 능력을 썼다면 난 이미 여기 없었을지도 몰라.”
“설마. 네가 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 너 자신을 너무 낮게 평하지 마.”
데브란이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들 데브란에게 동의했으나 가케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에 유더가 정신계 능력을 상대하는 훈련 메뉴를 짜 준 게 도움이 되긴 한 것 같아. 내 몸을 두드리고 주변을 때리면서 감각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니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거든. 일단 그자의 환상 범위 안에 안 들어가는 게 가장 최선이겠지만, 다들 기억해 두면 좋겠어.”
“진짜 골치 아픈 놈이네. 싸움이란 건 순간의 한 방으로 결판이 나는 건데, 그놈이 그런 식으로 갑자기 눈을 확 가려 버리면 누구라도 당황하게 되잖아. 사기야!”
“자기 능력을 그만큼 잘 파악하고 유용하게 쓰는 방법을 일찍 터득한 거죠. 환상이라는 힘 자체엔 사실 아무런 실체도 없다는 걸 모두 알잖아요.”
에버가 냉정하게 평가했다.
“쓸데없이 머리만 좋단 뜻이네. 우린 죽도록 훈련해서 하나하나 깨친 건데… 대체 왜 그런 놈이 나그란의 별에 들어간 거야?”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가케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까 폐하께도 말씀드렸지만, 나한은 자기의 목표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 분명 이대로 순순히 사라지진 않을 거야. 현자를 재차 노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칠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려운 문제네… 어쨌든 남부로 연락을 보냈으니 유더가 뭐라고 답을 줄지 봐야겠는걸.”
“난 유더가 보낼 답신에 나한 놈에 대한 얘기 세 줄, 우리한테 시킬 새로운 훈련 메뉴 열 장이 추가되어 있다는 데 저녁 간식 걸 거야.”
“열 장? 장난해? 총 열 장이 아니라 한 사람당 열 장이겠지. 나는 금요일 특식 건다!”
“뭐야? 그럼 나는……!”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 마병단원들 사이에서 가케인은 무거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더가 없는 동안 잘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그러기 어렵겠네.’
***
내기 격투장에서 하마터면 유더 아일의 격투 상대가 될 뻔했던 소년, 재크는 드디어 길었던 조사를 모두 마치고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을 한 동료들의 얼굴이었다.
“어……. 다들 언제부터 여기…….”
“네가 여기 들어갈 때부터 있었다! 왜!”
나그란의 별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젊은 각성자들이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바보 같은 녀석. 네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 온들 우리가 기뻐할 것 같았어? 내기 격투장이라니. 거기서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미안해요. 진짜 그땐 내가 뭐에 홀렸었나 봐요.”
재크는 순순히 머리를 박고 사과했다. 마병단과 제국군의 합동 조사를 받는 내내 그는 자신이 갇힐 뻔했던 내기 격투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 들었다. 그곳에 1년 넘게 갇혀 있었다던 다른 각성자의 사례와 죽어 나간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소름이 끼쳤다. 운 좋게도 유더와 마병단장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친구들은 아마 그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
저 혼자 죽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친구들의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의 멍청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우리가 왜 거점에서 빠져나와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 다 안전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였잖아. 이제 마병단 1차 합격까지 하고 좀 사정이 피나 싶더니……. 누가 네게 돈 벌어 오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만해. 재크도 반성하고 있잖아. 이제 알아들었을 거야.”
속상해하는 각성자를 달랜 이가 울먹이는 재크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랬다.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됐다. 마병단에서 우리에게 2차 시험이 끝날 때까지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 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젠 그냥 시험 준비만 해. 알겠지?”
“네……. 진짜 다신 안 그럴게요.”
“…….”
재크가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려 했는지 사실 동료들도 모두 너무나 잘 알았다. 알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그만큼 소년들을 구해 준 마병단에 감사함을 느꼈다.
나그란의 별에서 듣기만 했던 마병단의 무시무시한 소문과 실제 마병단은 정말 하나도 들어맞는 게 없었다. 마병단은 정체를 숨긴 각성자들을 무시하거나 무조건 잡아들이지도, 별 이유 없이 무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재크처럼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 범법자가 될 뻔한 녀석들까지 건져 내어 멀쩡하게 보내 주지 않았던가. 조사를 한 것도 그저 격투장에서 겪은 일을 듣기 위해서일 뿐, 뭔가를 알아내려고 윽박지르거나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각성자란 이유로 나그란의 별을 잡아들여 죽였다는 소문이 났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동료들을 다시 만난 재크는 빠르게 회복하여 금세 명랑한 성격을 되찾았다. 그는 격투장에서 만난 유더 아일과 마병단장의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어 댔는데, 아닌 척하면서도 모두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유더가 격투장 무대 안팎을 오가며 혼자서 누키조의 부하 수백 명을 때려눕혔다는 무용담은 특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은 솔직한 심경으로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사람이 혼자서 그렇게 싸울 수 있다고? 상처 하나 안 입고? 그게 진짜 가능해?”
“아무리 유더 아일이란 사람이 서부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지만… 재크, 그건 좀 뻥 같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제가 다 봤어요!”
“그래요. 저 소년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저도 봤으니까요.”
억울해하는 재크의 뒤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흠칫 놀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은 엄청나게 덩치가 큰 데다 뿔과 날개까지 달린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당신은…….”
“저도 거기 갇혀 있던 각성자 중 한 명입니다. 엘포킨스라고 해요. 그리고 당신들처럼 마병단 지원자죠. 방금 1차 합격을 했고요.”
“아… 그랬군요.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엘포킨스가 씩 웃었다. 그는 격투장에서 스쳐 지나간 재크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무섭고 낯설었던 생김새와 달리 친절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를 본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나그란의 별에서도 이런 각성자들을 많이 보았기에 엘포킨스의 순박함과 진심을 금세 알아보았다. 모두 입장이 비슷하다 보니 친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엘포킨스와 재크가 유더 아일의 무용담을 주거니 받거니 더 이야기하는 사이, 점차 주변에 청중이 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조사를 마치고 나온 격투장의 각성자들, 일하다 잠깐 빠져나온 마병단원, 식사를 하려고 나온 제국군 특수부대원들까지.
모두 둘러앉아 열성적으로 그날 자신들이 본 대단한 광경을 이야기하고 눈을 빛내며 같은 감정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하루가 지나자 격투장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전설이라 할 만한 엄청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유더 아일 본인은 그것을 몰랐으나, 충직한 부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흐드러지게 웃었다.
“그거 정말 멋진 이야기군. 마음에 들어. 기왕이면 거기에 나도 한 마디 더 보태 볼까?”
“…….”
나단 주커만은 주군의 진심 어린 장난을 언제나처럼 묵인했다.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순조롭게 강화되어, 유더 아일이 맨몸으로 천 명의 적과 백 마리 몬스터를 낙엽처럼 쓸어 버렸다는 신화에 가까운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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