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화
순식간에 혼란스러운 대치가 벌어졌다. 가케인은 그림자 분신을 꺼내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상대하기 시작하는 한편, 몇 사람을 데리고 교묘하게 뒤로 빠져나가려 하는 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데브란을 불렀다.
‘데브란! 여긴 내가 상대할 테니 넌 저길 쫓아가!’
‘알겠어!’
데브란이 사라지자 남은 나한 측 각성자들이 가케인을 중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러 능력이 그를 옭아매고 오감을 가리려 했으나 그는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능력을 지닌 마병단 동료들을 상대로도 쉽게 지지 않을 만큼 실력이 오른 상태였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림자 분신 능력과 함께 최근 열심히 수련한 검까지 들자 마음이 절로 든든해졌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해야 했음에도 놀랄 만큼 긴장감은 적었다.
물과 불처럼 ‘보이는’ 공격은 피하면 그만이다. 숨통을 조이거나 눈앞을 가리려 드는 등의 ‘보이지 않는’ 공격은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실체가 없다 느끼는 순간 목표를 잃고 흐트러지니 그림자 분신을 통해 분산하면 된다.
그는 그림자 분신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감추고 드러내기를 반복하며 싸웠다. 그림자 분신의 장점은 크기를 마음대로 늘리고 줄어들게 할 수 있으며, 공격을 받아 사라져도 본체에는 피해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케인을 공격하려 든 이들은 그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별안간 사각지대에서 다시 나타나 공격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한 측이 상대해야 했던 건 가케인뿐만은 아니었다. 놀랍지만 그사이를 틈타 예전의 동료를 치려고 남은 현자 측 각성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건 그들이 이제 마병단보다 서로를 더 경계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들은 현자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그리고 그간 마병단과 손을 잡고도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긴 나한에게 단죄를 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아 그들을 공격했다.
‘나한! 내가 죽어도 너만은 여기서 가만두지 않을 거다!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아!’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나한 측 각성자들은 오히려 현자가 마병단과 손을 잡고 자신들을 완전히 배제하기로 결심한 것이라 판단해 절망과 분노에 빠졌다. 도망치는 현자를 뒤쫓으려고 마병단 한 사람이 갔다는 사실 따윈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짜고 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현자님이 우릴 정말 버렸어……!’
‘나한! 뛸 수 있겠어? 이대로라면 우린 다 죽을 거야!’
‘나한! 어떻게 좀 해 줘……! 우린 널 믿고 여기까지 왔어! 다 너 때문이잖아!’
그 난리를 가케인은 황제에게 이렇게 요약하여 설명했다.
“일부는 저희에게 달려들고, 일부는 다른 이들을 도망시키려 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걸 저지하려 자기들끼리 공격하는 바람에 내부가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현자 측 각성자 일부가 나한을 데리고 도망치려 하는 이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나한 측 각성자들이라고 그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가케인을 향한 공격보다 서로를 향한 공격이 더 많아지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겨났다.
‘……이 사람들. 이젠 완전히 서로 싸우고 있잖아?’
조금 황당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가케인은 한숨을 돌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상황을 살폈다.
그가 바깥에서 곧 올 마병단의 지원을 기다리며 신경을 잠시 바깥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뒤에서 부축받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나한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화상으로 얼룩진 얼굴 위로 흡뜬 초점 없는 눈동자가 공간 안에 있는 모두를 훑었다.
급하게 움직이던 도중 부상이 악화되기라도 했는지, 그의 옷 곳곳에는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힘이라고는 조금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멈춰.’
쿵.
순간 모든 이들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게 나한의 능력 발동으로 인한 효과임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모든 게 빙글빙글 돌아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시야를 혼란하게 만드는 환각임을 느꼈지만 머리가 멍해져 빠져나갈 방법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뭘까.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너무 어지러워… 지금은 밤인가? 낮인가? 여긴 어디였지? 토할 것 같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고 뿌드득 악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그 통증으로 인해 그제야 희미하게 청각과 시각이 조금 복구되었다.
잔뜩 취한 듯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 몸이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비명의 내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입술에 이어 손을 움직여 스스로의 몸을 쥐어뜯었다. 바닥을 내리치고 제 몸을 때리니 조금씩 감각이 더 살아났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땅을 쥐어뜯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바닥을 힘겹게 더듬어 보았지만 그의 칼은 쓰러지면서 튕겨 나갔는지 잡히지 않았다.
‘젠…장.’
오래전 그는 기사가 되기 위해 검을 배웠다. 기사가 손에서 검을 놓치는 건 정말 지독하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다시 검을 재차 제대로 잡을 마음을 먹었는데, 그걸 놓치다니.
무뚝뚝하지만 가차 없는 새 스승 나단 주커만의 얼굴과, 어떤 면에서는 나단 주커만보다 훨씬 무섭고 더 단호한 친우 유더 아일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가케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앞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한이었다.
‘거기 서……!’
가케인이 억누른 목소리로 외치자 나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 공간에서 혼자서만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렇다고 멀쩡하지는 않아서, 입술에서 끝없이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섬뜩한 화상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사내는 가케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그림자 분신을 불러내려 해 보았지만 여전히 환각의 여파에 시달리는 몸은 익숙한 힘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정말 지독한 능력이었다.
‘…거기 서라고…했잖아! 주변은 이미… 마병단이 모두 와 있으니… 포기하고…….’
자수하라고 말하면서 검을 되찾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한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의심했었는데, 그 근성과 능력을 보니 정말 마병단이기는 한가 보군. 이상하게도 너희들은 내 힘에 영향을 덜 받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알 수 없는 말에 가케인이 멈칫한 순간, 그가 물었다.
‘마병단은 정말로 현자와 손을 잡았나?’
‘…….’
‘…그래. 이제 그 답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겠지. 중요한 건 이제 혼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뿐이니.’
싸울 셈인가. 가케인이 긴장한 채로 다시 한번 죽을힘을 다해 힘을 끌어 올리자 겨우 그림자 분신이 재차 흔들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토할 듯 어지러웠으나 가케인은 꾹 참고 비로소 제 발로 일어나 그를 마주하고 섰다.
사내가 일그러진 얼굴 쪽을 움직여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형제는 죽이지 않아. 날 그렇게 상대하고도 마병단은 아직 나를 모르는군.’
‘…….’
‘하지만 나의 유일한 목표를 포기할 생각도 없어. 누군가 앞으로의 내 생각을 묻는다면 그렇게 전해.’
그 뒤, 가케인은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데브란을 비롯한 마병단 동료들이 그를 흔들고 있었다.
‘가케인! 정신 차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여기까지 이야기한 뒤 가케인은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사죄했다.
“저의 동료 데브란도, 저도 각자 목표로 했던 자들을 전부 다는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건 모두 그때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저의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현자를 쫓았던 데브란도 결국 그를 놓쳤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자와 그 일행이 하늘로 솟은 듯 사라져 버렸던 탓이었다.
그 전에 쓰러트려 제압한 자들과 나한의 능력에 당해 쓰러진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붙잡았으나 가케인은 못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볼룬발트 경, 고개를 들라.”
케일루사 황제가 그를 불렀다. 가케인이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 황제는 뜻밖에도 그리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나한이란 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일전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바다. 아일 남작은 물론, 펠레타 공작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 도망쳤었다지. 또한 현자라는 자는 도망쳐 보았자 어디로 갔을지 짐작할 수 있으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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