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화
“폐하. 마병단에서 방금 전해진 급보입니다. 황태자의 치료사들과 그들의 전 동료들이 수도 5구역 내에서 충돌을 빚어 건물 하나가 반파되었다고 합니다. 사상자 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현재 현장에 마병단원 몇 사람이 잠입해 범인 체포 및 주변 수습을 시행 중이라고 합니다.”
케일루사 황제는 황후와 함께 들던 식사를 멈추었다. 황후가 염려 어린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황제는 자신이 조금도 놀라지 않았으며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소식을 전한 시종장을 향하여 명했다.
“그들이 오늘 모두 자리를 비웠다기에 염려하라 이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정말 빨리도 일이 일어나는군. 황궁기사단과 수도 치안경비대에 즉시 연락하여 주변 제국민들의 대피와 수습을 돕고, 혹 있을지 모를 주변의 수상한 자들을 추적 및 체포하도록 하라. 그리고 마병단으로 이 물건을 전달하여 현장에 함께 가져가라 전하도록.”
황제가 집어 건넨 것은 식탁 위에 장식해 둔 작은 꽃이었다. 그가 거기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음을 안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고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황제의 명은 얼핏 평범해 보여도 내포된 뜻이 분명했다. 그는 마병단 외의 다른 전력은 현장에 더 들이지 않고 주변 수습에만 전념시키도록 명했다. 그것은 다른 집단이 마병단을 방해하지 않도록 막음과 동시에 수습 뒤의 여론을 대비할 수 있는 방향을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식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군요. 황후까지 짐 때문에 식사를 거를 필요는 없으니 전부 들고 나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저 또한 새벽궁으로 돌아가 이 일이 다른 곳으로 쓸데없이 퍼지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남부에 있을 펠레타 공작에게도 전갈을 보내야지요. 폐하보다 제가 움직이는 것이 빠를 테니까요.”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이 할 일을 언급했다. 긴장한 듯하면서도 단단한 표정을 본 황제의 얼굴에 그제야 부드러운 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든든하군요.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소식을 보낼 테니, 혹 무슨 일이 있다면 짐을 부르십시오. 방법은… 알고 있겠지요.”
황제의 눈길이 향한 곳은 황후가 얼마 전부터 늘 꽂고 다니게 된 단추의 장식용 꽃이었다. 그것을 통해 황제는 늘 황후의 주변을 살피고 그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기민하게 대응했다.
황후가 단추를 가볍게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알고 있어요.”
부부는 악수하듯 손을 꽉 맞잡은 뒤 놓고 등을 돌렸다.
집무실로 돌아간 케일루사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병단 측에서 ‘일이 종결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만 모든 게 마병단이 본래 예정했던 대로 잘 된 건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이 보낸 꽃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기에 현장에 있었던 마병단원들을 비밀리에 빠르게 불러들였다.
곧 그의 앞에 정보부원들이 달려와 부복했다. 다만 그중에 약사 이논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현장에서 나온 부상자의 치료를 돕기 위함이었지만 실은 본인이 ‘내가 가지 않아도 충분할 텐데 뭐 하러 가느냐’고 대놓고 거절한 탓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부복한 마병단원들의 얼굴을 훑었다. 대부분 먼지투성이였고, 두어 명에게서는 피 냄새도 났다. 몸을 정돈할 시간도 없이 급박하게 달려왔다는 티가 역력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피 냄새가 강한 붉은 머리의 미남자를 향해 황제는 입을 열었다.
“이전에 본 기억이 나는군. 가케인 볼룬발트 경. 용감한 태도로 짐을 위해 맞서 싸워 주었지.”
어디서 맞서 싸웠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으나 둘 모두 답을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억하여 주시니 황공합니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가케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미약하게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는 오늘 ‘나그란의 별’이라 불리는 각성자 집단에서도 특히 위험하다 판단된 이들이 수도에서 모임을 가진다는 정보를 입수해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정보가 틀리지 않아 그들이 만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가케인은 데브란과 함께 폭발음이 들려온 집으로 뛰쳐 들어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이 들어갈 때부터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반쯤 반파된 벽을 통해 복도 안쪽의 풍경이 약간 눈에 들어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를 끌어안은 이들이 다른 이들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가케인은 쓰러진 이 측에 나한이, 그 반대편에 중년의 ‘현자’가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나한. 네놈을 따르는 녀석들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라는 건 잘 알겠다! 독립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감히 우릴 공격해!’
‘무슨 소리야! 엑시가 일어서서 제일 먼저 공격한 게 나한이라는 걸 못 봤어? 랭바튼 네놈이 엑시를 조종해 공격시킨 거잖아!’
‘죄를 우리 쪽에 뒤집어씌우시겠다? 네놈들이 저지른 짓을 봐! 너흰 이제 우리의 형제도, 동료도 아니야!’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에 가케인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두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린 채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팽팽한 대치 상황. 그 속에서 거의 뒷모습만 보이는 나한이 입을 열어 나직이 말했다.
‘이게 당신의 뜻인 거군.’
‘나한. 그런 말로 오해를 부추기지 마십시오. 늘 때가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결국 상의 없이 이곳까지 와 다른 형제자매들까지 위험하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대체 왜 이렇게 늘 경솔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까.’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중년의 사내가 진심으로 안타까워 보이는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경솔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쪽이 더 경솔한 게 아닐까.’
‘나한! 감히 현자님께 그따위로 말하다니!’
누군가 악을 쓰며 소리쳤으나 나한은 미동도 없었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을 때, 나는 그것이 그리 고맙지 않았어. 하지만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을 내게 짓도록 만들고 그 이름이 뜻하는 바를 위하여 함께 나아가자는 말은 몹시 감명 깊다 생각했지.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 여길 정도로 말이야.’
나한의 말에는 기이한 무게감이 있었다. 오랜 부상의 여파로 잔뜩 쉬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더욱 듣는 이의 공포를 자극하는 목소리. 마치 잔뜩 녹슨 쇠를 떠올리게 하는 그 음성에 나머지 모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는 가케인과 데브란마저도 바로 진입하지 못하고 멈칫했을 정도로 싸늘하고 무거운 기운이 공간 전체를 짓눌렀다.
‘…….’
‘그런데 약속이 차일피일 미루어질 때부터 점차 그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왜 그 말을 그리 믿고 있었지? 애초에 약속한 건 나뿐, 당신은 처음부터 확답한 적이 없었다는 게 떠오르더라고.’
‘나한……. 그러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그래서 그 ‘때’는 대체 언제쯤 오는 거냐고 여러 번 묻지 않았던가? 그것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만 당신은 확답하지 않고, 나머지 형제들만 뭔가에 사로잡힌 인형처럼 벽을 세워 나를 막으려 들고 있군. 이게 답이 아니라면 무엇이 답일까. 이미 한 형제의 목숨이 사라졌는데도 답을 주지 않을 건가?’
현자는 침묵했다.
그의 답을 기다리듯 가만히 서 있던 나한이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알겠군. 현자께선 내가 무서운 거야. 그렇지?’
그 순간, 나한을 따르던 각성자들마저 놀란 얼굴로 나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케인과 데브란 또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데브란!’
‘알겠어!’
데브란이 즉시 능력을 사용하여 불꽃을 뿜어냈다. 불이 반파된 벽을 뚫어 버리자마자 대치 중이던 각성자들이 당혹하여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우린 마병단이다.’
가케인은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보부를 이끄는 든든한 부장이자 그들의 친우, 유더 아일이 얼마 전 보낸 편지를 통해 이 비슷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측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마병단 협력자 명단에 나그란의 별이 올라가게 되면 놈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 서로를 의심하며 대치할 가능성이 커지겠지. 혹 그 과정에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생긴다면 쓸데없이 길게 말하지 말고 마병단이라는 정체만 밝히고 대응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놈들이 알아서 생각할 테니까.’
과연 유더의 말이 옳았다. 마병단이 이리 빨리 달려올 줄 몰랐던 이들이 깜짝 놀라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빨리…… 네놈들이 불렀구나!’
‘무슨 소리야. 네놈들이 불렀겠지!’
고함 속에서 누군가 가케인과 데브란을 공격했다. 공교롭게도 데브란과 같은 불꽃 능력이었다. 그러나 데브란이 손을 휘젓자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불은 곧 사라져 버렸다. 그의 불 다루는 능력은 아직 유더에 비하면 화력이나 조절 양면에서 여러모로 부족했으나, 같은 불 계열 각성자들의 능력까지 제 것처럼 다룰 수 있다는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는 했다. 그간 열심히 구르며 수련한 덕에 이 정도는 이제 잠을 자면서도 할 정도였다.
‘현자님! 피하십시오! 여긴 저희가……!’
‘나한! 도망쳐!’
순식간에 혼란스러운 대치가 벌어졌다. 가케인은 그림자 분신을 꺼내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상대하기 시작하는 한편, 몇 사람을 데리고 교묘하게 뒤로 빠져나가려 하는 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데브란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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