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이거 참, 놀라운 손님이 오셨군.”
“제가 올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농도 잘 치시는군요.”
마이라 엘 헤른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아니, 정말 몰랐네. 이곳이 헤른의 앞마당이니 그쪽에서 누군가 올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제일 먼저 온 이가 1공녀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것도 연락조차 없이 홀로.”
키시아르의 말을 들은 마이라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먼저 연락을 드릴 겨를도 없이 찾아온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작 전하께서도 아무런 언질 없이 이 샬로인에 갑자기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셨으니 약간의 무례 정도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참 교묘한 말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일으킨 갑작스러운 사건을 빗대어 짚었다는 면에서 그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굳이 택한 ‘폭풍’이란 단어는 책망 같아 보여도 사실은 감탄에 가까운 느낌을 주어 이쪽의 기분을 그리 나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 한마디만으로 유더는 그녀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마냥 곱게 자란 귀족 영애는 확실히 아니었다.
성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쪽에 분노나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닌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전에는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파악할 만한 시간이 전혀 없었기에 이 상황이 상당히 신선하게 여겨졌다.
“들어 보니 그 ‘폭풍’ 때문에 온 건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공식적으로는 맞습니다. 마병단이 그곳에서 잡아들인 멍청한 이들 중 한 사람이 제 친척이거든요.”
마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멍청한 이들’이라는 거친 단어를 사용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얼굴을 보면 진심이었다.
키시아르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더욱 깊이 휘었다.
“음……. 그러면 비공식적으로는?”
“사실 마병단에서 그 멍청이를 어떻게 처리하시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토록 급히 온 건 2공자보다 먼저 공작 전하와 마병단을 뵙고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족 간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거라면 우리 마병단이 굳이 나설 일은 없어 보이는데, 이 대화를 굳이 지금 나누어야 할 이유는?”
“헤른은 현재 이번 사건을 두고 마병단을 어찌 대해야 할지 고심 중에 있습니다. 그간 남부의 골칫거리였던 자들을 이번 기회에 쓸어 버릴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협조하자는 생각을 지닌 이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여기는 이들도 있지요. 저는 전자입니다.”
“흐음. 각성자들을 가두고 못살게 굴던 내기 격투장 하나를 부쉈을 뿐인데 다들 지나치게 심각하게들 구는군. 우린 새 단원 모집만으로도 바쁜 상황인데, 지금까지처럼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겠나? 남부의 골칫거리니, 뭐니 하는 것까진 그리 관심이 없는데.”
키시아르가 생각 없는 한량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이라가 건넨 심각한 이야기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생각지 못한 답이라 여겼는지 마이라의 눈 사이로 당혹한 감정이 슬쩍 스쳐 지나갔다. 그녀 나름대로는 이리 직설적인 호의를 드러내면 이쪽에서도 바로 환영의 기색을 밝힐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속내를 숨긴 연기나 정치적인 대응에 능숙하진 않군. 나이를 생각하면 그쪽이 당연하긴 하지.’
여태 만나 본 4대 공작가의 젊은이들 중에서 비교하자면 타인 가의 프루엘레와 프리실라가 가장 머리가 좋고 냉정한 대응에 강했다. 아페토 3형제는 순하고 착한 레블린을 제외하면 전부 감정적이고 음흉했고, 디아카의 키올레는… 다른 가문 자제들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만큼 바보였다.
‘그렇지만 저 정도로 적당히 속내를 비쳐 주는 쪽이 이쪽에서는 오히려 파악하고 대하기 편하지.’
유더는 그리 생각하며 키시아르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뜻이 마이라를 거절하고자 하는 건 아닐 터다. 마이라와 협력할 수 있다면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마이라의 말만 들으면 헤른과 마병단이 협력을 하는 게 아니라, 헤른이 마병단에게 슬쩍 손을 보태 자신들의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하자는 것만 같다. 아마 그게 문제였을 것이다.
마병단이 헤른을 돕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협력이란 서로 원하는 걸 제시한 뒤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저 젊은 헤른의 1공녀가 마병단과 협력하길 원한다면, 우선 그걸 깨달아야 할 터다.
자.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을 헤른의 1공녀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감정이 앞선다면 찬바람을 뿌리며 나갈 테고, 이성이 앞선다면 다른 판단을 하겠지. 유더는 지그시 마이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건 마병단이 바라는 바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한참 뒤 마이라가 내뱉은 말은 후자에 가까웠다.
“으음? 마병단이 원하는 바를 공녀가 어찌 알고?”
“오기 전에 마병단이 이번 일을 어찌 해결했는지 모두 알아보고 왔습니다. 갇혀 있던 각성자들을 통해 그런 격투장이 여기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파악하셨겠지요. 마병단이 여태 보였던 활약상을 보면 하나만 구하고 손을 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바로 다음 계획을 짜고 계실 텐데, 아닌가요?”
키시아르의 천연덕스러운 반문에도 마이라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하루도 되지 않아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 해도 대단한 속도인데, 그사이에 마병단의 일처리까지 파악하고 온 건 상당한 수완이라 할 만했다. 바로 다음 계획을 짜고 있지 않느냐는 말도 정답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은 누구도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이곳에 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하였기에 잠입을 통하여 해결하실 수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밝혀졌으니 다른 자들은 최대한 몸을 사려 숨으려 할 것입니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측의 협력이 없다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시기 힘들지 않을까요? 저에게 협력할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여 손을 보태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 보겠습니다. 사실 마병단이 이 일에 나서 주시고 제가 그걸 도울 수 있다면, 저 개인에게도 굉장히 큰 이익이 될 겁니다. 남부의 골칫덩이들을 해결하는 건 제가 헤른의 후계자 후보로서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마이라도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이 일이 자신에게도 확실히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명시하는 건 ‘그러니 이쪽에서 혹 다른 뜻을 가지고 협력을 요청하는 것일까 봐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불어 태도도 자신이 마병단을 돕는 위치로 확실하게 낮추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저만 하진 않을 겁니다. 저의 가장 큰 경쟁자인 2공자 아쉴라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죠. 그쪽에서 마병단과 먼저 협력하게 되면 헤른과 남부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겠지만, 저 개인에겐 치명적인 손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반드시 마병단과 먼저 협력하여 이번 일을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후계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마병단이 하는 일에 손을 보태고 싶단 거군.”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마이라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새벽궁의 주인께 들어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헤른의 후계자 경쟁은 제가 태어난 이래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일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제 손을 들어 주시길 바라며 오래 연락을 나누었습니다만, 아직까지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지요. 이번 협력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면 그분의 지지까지 제 몫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욕심도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전부 다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그녀의 사정을 짐작하기는 충분했다.
‘결국 여기나 저기나 후계자 구도가 문제인 거군.’
키시아르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도는 마이라의 얼굴을 향하여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음… 하나만 묻겠네.”
“네.”
“만약 우리가 이런 이야기까지 들었음에도 공녀가 아니라 추후 찾아올지 모를 2공자와 협력하기로 한다면 어쩔 셈인가?”
일순 마이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키시아르를 찔러 죽일 듯한 눈빛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정말 슬픈 가정이로군요. 그렇다 해도 헤른과 남부에 도움이 된다면 저는 감내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저보다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마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일을 위해 마병단은 아주 먼 길을 돌아가게 되시지 않을까요?”
거의 협박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키시아르의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헤른의 1공녀는 35년 만에 태어난 헤른의 딸다운 기상이 넘친다더니 과연 그렇군. 잘 알겠네. 하루만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어도 되겠나?”
마이라는 당혹한 눈빛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키시아르를 몹시 이상한 사람이라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나갈 때까지 태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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