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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689화 (689/805)

689화

“단장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손님? 누구지.’

내기 격투장을 말 그대로 부숴 버린 직후, 올 만한 이들은 이미 마병단 남부 지부에 한 번씩은 다 얼굴도장을 찍으러 다녀간 상태였다.

샬로인의 치안 경비대 책임자. 콧대 높던 샬로인 영주가 보낸 하인. 현장에서 체포된 도박꾼들을 풀어 달라며 항의하기 위해 방문한 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시끄러웠던 귀빈들의 가문 소속 사람들.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를 만나겠다며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큰일을 끝냈더니 몸이 아프다’며 대놓고 드러누운 마병단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분하기야 했겠지만 어쩌겠는가. 이 일로 약점을 잡힌 게 그쪽인 이상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것은 예전에 키시아르가 서부 타이누에서 열린 불법 경매 때도 항의하러 온 귀족들을 상대로 몇 번인가 써먹었던 방법이었는데, 이번에도 참 잘 먹혔다. 아니, 그때보다 더 잘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타이누의 빌름 남작처럼 아예 제 자리 보전도 못 하고 박살 날 수 있다는 걸 봤을 테니까.’

한때 타이누의 영주였던 빌름 남작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파멸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타인 공작을 위하여 헌신했으나 자기 자신의 앞길조차 가리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타인 공작은 그를 외면했다.

유더가 알기로 현재 그는 이미 물려받은 작위와 귀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재산을 전부 몰수당한 뒤 15년의 징역과 30년의 노역형, 금화 300만어치의 벌금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죗값을 줄일 방법은 오직 타인을 끌어들이는 것뿐이기에, 빌름은 현재 자신의 동생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 귀족들, 그리고 타인 공작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고 늘어지며 죄를 고발하는 중이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불명예스럽다 여겨 여간해서는 하지 않을 짓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뒤에서 교묘하게 빌름을 설득한 타인 1공자 프루엘레와 2공녀 프리실라의 공이 컸다.

‘어차피 벌을 받고 사라질 일만 남은 놈이니 가문의 이름으로 약간의 감형과 가족의 안전을 약속하며 원수 같은 아버지를 더 확실하게 끝내 버린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지. 타인 가 쪽에게도, 그리고 황제 폐하와 우리에게도.’

그토록 더러운 삶을 산 빌름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딸들만은 안전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덕분에 그들의 재판은 아직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4대 공작가의 고귀한 공작이 직접 재판장에 선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들썩거렸지만, 상황이 이리되자 이제는 모두가 이 일을 타인 가 내부의 권력 싸움처럼 인식했다.

황제가 마병단과 함께 타인 가를 쳐 내려는 거라면 귀족파가 반발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저 타인 가 내부 싸움이 막장으로 치달아 이런 꼴이 되었을 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 상황에 익숙해진 세간의 관심은 떨어질 것이고, 공작위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된 프리실라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더욱 확실하게 다질 시간을 얻을 수 있을 터다. 그리하여 마침내 적당한 때가 왔다고 판단되면 타인 공작은 누구도 편들어 주지 않는 가운데 더욱 큰 처벌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프루엘레와 프리실라, 그리고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 사이에 오고 간 정치적 합의의 결과였다. 재판 결과가 나오려면 적어도 몇 달에서 길면 몇 년은 걸리겠지만 이쪽의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귀족들은 거기까진 알 수 없지.’

샬로인의 귀족들에겐 그저 마병단에게 잘못 걸렸다가 파멸한 빌름 남작만이 머릿속에 깊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찔리는 게 많은 놈들일수록 키시아르 쪽에서 피곤하다고 하면 그냥 돌아가게 마련인데… 손님이 왔다는 알림을 전했다는 건 상대 쪽에서 그걸 개의치 않았다는 뜻이지.’

“피곤해서 볼 수 없다고 전했는데도 나를 보겠다고 하나?”

유더의 곁에 있던 키시아르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눈빛으로 물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문 바깥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네. 꼭 지금 뵈셔야겠다고 하는군요.”

“이름은 누구라고 하던가.”

“저희에겐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새벽의 주인을 잘 아는 분이라고 말씀드리면 단장님께서도 아실 거라 하셨습니다만…….”

다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은 키시아르의 눈동자 속에 일순 이채가 감돌았다.

“헤른 공작가의 사람이군.”

“헤른 공작가 말입니까? 왜…… 아.”

왜냐고 물으려던 찰나, 답이 떠올랐다.

‘헤른 공작가는 황후 폐하의 가문이었지. 황후궁의 이름은 새벽궁이니……. 그래서 그렇게 지칭한 거군.’

“들어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키시아르가 기대고 있던 유더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유더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위치인 사내의 한 발짝 뒤로 돌아갔다. 키시아르가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모처럼 조금 쉬어 볼까 했는데 그럴 틈이 없겠군.”

“헤른 가의 사람이라면… 샬로인 영주가 부른 걸까요.”

“이곳의 영주가 헤른 가의 방계 혈통이긴 하지만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네.”

“왜입니까.”

“새벽의 주인을 언급했기 때문이지.”

키시아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온몸을 덮는 고급스러운 여행자용 로브를 벗자 안에서 황후와 거의 비슷한 백금발이 물결치며 흘러내렸다.

한눈에 보아도 고귀하게 자란 귀족다워 보이는 영애였다. 인상이 몹시 강인하여 보는 이를 저절로 주눅 들게 만들 만큼 차갑고 위엄 넘쳐 보였으나, 눈가와 입가의 점이 지나친 날카로움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로브 안에 입고 있는 승마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유더는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마이라 엘 헤른.’

유더는 이전 생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헤른이 내민 카치안 황제의 황후 후보였다.

카치안 황제는 양자 출신으로,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지 고작 몇 년 만에 몰아치듯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특이하게도 황태자비를 두지 못한 채 황제가 된 사례였다. 물론 황태자 시절 암암리에 이야기가 오가던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케일루사 황제가 일찍 승하하면서 모든 상황이 백지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4대 공작가는 황제의 옆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디아카 가문은 당연히도 디아카 가의 사람을 내밀었고, 나머지 3가문은 디아카 가문이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는 점을 대놓고 꼬집어 욕하며 자신들의 사람을 천거했다.

그중 헤른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의 직계 혈통을 후보로 내민 유일한 공작가였다. 논리도 분명했다.

‘이전의 황후는 엄연히 말하자면 우리가 세운 사람이라 볼 수 없다. 헤른은 이전 황후의 사치와 여러 사고 때문에 수많은 피해를 보았고, 그것을 감당하느라 여태까지 애써 왔으므로 재차 기회를 주는 쪽이 도리에 맞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디아카가 한발 물러서서 헤른의 손을 들어 주게 된 것 같다. 그렇게 하여 눈앞의 마이라 엘 헤른은 카치안 황제의 황후가 되었는데, 당연하겠지만 결혼 생활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카치안 황제는 첫날밤에 황후궁에서 몸에 할퀸 손톱자국과 비슷한 상처를 입었다.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였다는 은밀한 소문이 궁을 떠돌았다.

그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황후궁을 찾는 일이 없었다. 후계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간언하는 이들이 나오면 짐이 아직 젊은데 반역의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헤른 공작가가 불쾌해했지만 디아카 공작가와 다른 가문들은 썩 만족했다. 그 틈을 타 자신 쪽 사람들을 후궁이나 정부 후보로 내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치안 황제가 디아카 가를 비롯하여 다른 가문들의 실세를 교묘하게 암살하거나 손에 쥐고 흔들기 시작한 이후로 마이라 황후의 처지는 더욱 좋지 않아졌다. 황제에게 미움받아 유폐되다시피 한 황후를 찾아갈 간 큰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텅 빈 듯이 조용하기로 유명한 황후궁.

그곳에서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몰랐다.

유더 또한, 죽을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이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전까지 그녀의 이름조차 거의 잊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고 나니 결혼식 때 보았던 모습이 겹쳐지며 단숨에 다시 기억이 났다.

유더가 눈을 미묘하게 찌푸린 채 깜박이는 모습을 유심히,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흘긋 본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놀라운 손님이 오셨군.”

“제가 올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농도 잘 치시는군요.”

마이라 엘 헤른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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