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화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정보부원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제일 먼저 나서서 입을 연 이는 가케인 볼룬발트였다.
“…아무래도 기다릴 필요 따윈 없겠네. 힌과 핀은 약사님과 함께 사람들을 돕고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줘. 큰 소리가 났으니 곧 치안 경비대나 기사들이 올 텐데, 저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각성자니까 우리 책임이라는 걸 잊지 마. 마병단과 황제 폐하가 계신 곳으로 바로 연락해야 해!”
예전의 엘더 남매라면 가장 위험한 곳에서 싸우는 재미있는 일 대신 왜 자신들이 뒤로 물러나 남들을 대피시키는 일을 해야 하느냐고 항의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었던 지난 서부에서의 경험은 이 독설가 장난꾸러기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능력의 적성과 동료와의 협업이란 게 무엇인지를 확실히 인식시켰다.
물건은 물론, 사람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남매의 능력은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된다. 또 다른 능력인 괴력 또한 공격에도 탁월하지만 누군가를 구할 때도 그만큼 빛을 발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인정하기에 조금 심술이 나긴 해도 가케인 볼룬발트는 확실히 위기 상황일수록 믿음직스러워지는 동료이기도 했다.
서부 대삼림에서 동료들을 이끌었던 그는 그 자리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끈질긴 성정을 발휘해 열심히 임했고, 남을 위해 매번 가장 어려운 일을 자처했다. 그러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도 그의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금방 호의를 사는 외견을 지녔는데 요령을 부리며 편하게 살려 하지 않는 놈이란 점에서 가케인은 조금 불쌍하고 괜찮은 녀석이라고 엘더 남매는 생각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데브란 또한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에 가케인이 나서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리라.
‘데브란도 원래는 한 욕심, 한 자존심 해서 엄청 나서고 싶어 하던 녀석인데 말야. 이런 걸 보면 유더가 왜 정보부를 만들면서 가케인부터 뽑으려고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좋아. 그렇게 할게!”
엘더 남매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케인이 걱정을 한결 던 얼굴로 짧게 웃었다.
“고마워. 그럼 데브란. 넌 나와 함께 가자!”
“알겠어. 가자!”
데브란이 재빨리 가케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약사님. 저희도 가요!”
“아. 그런데 마병단에 소식은 어떻게 보내지? 쪽지를 능력으로 보내 두기엔 좀 먼데.”
“그건 이쪽에서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지붕을 보던 이논이 무심히 대답했다.
“엥? 어떻게요?”
“이 근처에 아는 녀석들이 많이 어슬렁대고 있을 테니 대충 한 녀석 잡아서 전해 달라고 하면 되지.”
그리고 이논은 정말 그렇게 했다. 그는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막 근처를 달려 도망치고 있던 상점가 심부름꾼 한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도망치던 와중에도 이논을 알아보고 부름에 응한 심부름꾼 청년은 ‘7구역의 마병단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들어주었다. 그뿐인가? 간만에 이런 곳에서 만나 반갑다며 친밀한 태도로 안부까지 물었다.
“아니. 그런데 이논 님은 도망 안 가세요?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예요?”
“너 내가 약방 닫고 마병단 약사로 취직했단 소식 아직 못 들었구나.”
“아, 그래요? 요즘 다른 데 관심을 둘 만큼 여유가 없었더니… 그렇구나. 마병단에서 돈은 많이 줘요?”
“돈은 많이 주는데 일도 더럽게 많이 시켜. 왜. 너도 거기 취직하려고?”
이논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청년이 잠시 상황조차 잊고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아… 좀 솔깃하긴 한데 일이 너무 많은 건 싫어서 고민 좀 해 볼게요. 그러면 갑니다!”
“그래. 바로 못 갈 것 같으면 컬레이그 쪽 녀석들 아무나 붙잡고 넘겨라. 최대한 빨리 전해야 하거든.”
“걱정 마세요. 상위 구역으로 가는 거면 모를까, 7구역이면 제가 아는 길을 통해 금방 갈 수 있어요!”
심부름꾼 청년이 씩 웃더니 금방 사라졌다. 할 일 하나를 던 엘더 남매는 몹시 신기한 눈빛으로 이논을 올려다보았다.
“약사님. 원래 뭐 하던 분이에요? 인맥이 엄청나시네?”
“방금 들었잖아. 그냥 여기서 약을 오래 팔았을 뿐이야. 신기해할 것 없어.”
“이걸 어떻게 안 신기해해요? 약을 좀 오래 팔았다고 누구나 이 정도로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으면 유더가 약사님을 정보부에 끼워 넣었을 리 없지!”
“컬레이그는 누구예요? 정보 길드 뭐 그런 쪽 사람?”
“와. 그런 쪽은 접촉하는 것부터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던데. 그게 진짜면 약사님은 혹시 약사를 가장한 정보 길드의 실세 뭐 그런 건가……?”
“음! 가능성 있어.”
악동들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번쩍거렸으나 이논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멀지 않은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고갯짓했을 뿐이었다.
“쓸데없는 소릴 할 시간이 있으면 저기 넘어진 사람이나 살피지 그래.”
이논의 정체를 좀 더 자세히 캐 보려던 엘더 남매의 시도는 곧바로 좌초되었다. 그들은 작게 투덜대면서도 빠르게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이논은 계속해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벽돌집을 찌푸린 얼굴로 계속해서 살폈다. 별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은 듯 보여도 그의 시선은 미세하면서도 바쁘게 주변을 훑는 중이었다.
‘수도 내에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이 다수 모여 요동치는 꼴을 직접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뿜어져 나오는 독기가 너무 강해. 다행히 대처가 재빨라 내가 나서서 방어해야 할 만큼의 문제는 아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늘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생각에 잠겨 있던 이논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고작 이 정도다만… 내가 모르는 그때는 어땠을까.’
그때라는 건 이논이 존재를 짐작만 할 뿐, 실제로는 체감한 적 없는 시간을 뜻한다.
지금은 수도를 떠나 여기에 없는 녀석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을 존재하지 않는 미래이자 과거.
이논은 유더 아일이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믿게 된 뒤로 종종 그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있었다. 유더 같은 성격을 지닌 녀석이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든다는 건 그만큼 그가 지나온 시간이 평화롭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논 자신이 사라졌었다는 말 하나만으로도 떠올려 볼 만한 끔찍한 요소는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유더가 미리 대비해 두고 간 모든 수단들이 모여 수도를 지키는 중이었다.
이논은 먼 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저 맑은 하늘이 보일 따름이지만, 그 너머에는 현재 이곳에 없는 녀석이 있을 터였다.
‘하여튼 골치 아픈 놈 같으니라고. 귀찮은 일만 엄청나게 시키고! 돌아왔을 때 떠나기 전 상태에서 몸이 조금이라도 상해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
“…….”
유더는 묘한 한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북쪽 하늘에 보이는 거라곤 그저 남부 지부의 열린 창문 밖으로 한가롭게 날아가는 새뿐이었다.
“왜 그러지, 유더? 거기 누가 있나? 혹시 서부의 영웅을 보기 위해 벽을 기어 올라온 간 큰 팬이라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창문이 좀 오래 열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바람이 슬슬 차지는 듯하니 닫겠습니다.”
예민하게도 유더의 반응을 바로 알아차린 키시아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더는 고개를 젓고서 창문을 닫았다.
“남부라 해도 겨울은 겨울이니 조심해야겠지. 이리 오게.”
격동의 하루가 지나간 뒤, 남부 지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워졌다. 수많은 방문객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붙잡은 자들을 조사하는 한편, 셀 수 없이 많은 항의자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나갈 정도로 바빠진 남부 지부 단원들은 비명을 질렀으나 키시아르와 유더에게는 아주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유더를 곁으로 부른 사내가 푹신한 의자에 그를 앉히고 어깨를 기대었다. 유더는 말없이 바람의 힘을 사용하여 마석 난로 곁에 놓인 마석을 안으로 던졌다. 오색 불꽃이 훅 일며 타닥이는 소리가 강해졌다.
“어제 구출한 이들은 대부분 마병단 지원을 원한다고 밝혔더군. 개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이도 있어 지원할 생각이네.”
“잘 되었군요. 원하는 대로 해 주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야겠군. 그리고 큐레이지나는…….”
그때,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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