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입술이 마르셨습니다, 폐하. 차를 좀 더 채워 드리겠습니다.”
충성심 깊은 늙은 시종장이 황제의 찻잔에 정성스럽게 차를 따랐다. 그 차를 마시고 난 뒤 케일루사 황제는 비로소 확연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들이군. 펠레타 공작의 남부행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혹하고, 이쪽의 동향을 알아내려 하고 있어.”
“그렇습니까. 다행이로군요.”
“디아카 공작이 렌보우 자작과 황태자의 치료사들을 이용하여 마병단원 모집에 손을 댈 계획이라니 키시아르에게 편지를 보내 주어야겠군.”
“그분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정보란 건 자세히 얻으면 얻을수록 더 좋은 법이지요.”
시종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꽃을 받았다 하여 디아카 공작이 태양궁의 침범자 조사 건에서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이더군.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예정대로 그들이 내밀 범인 후보에 대응할 준비를 하는 한편, 황태자에게 진짜 범인의 정체를 흘린다. 그리고 렌보우 자작의 집에도 물건을 하나 심어 두도록 하여 자세한 동향을…….”
케일루사 황제의 입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줄줄 흘러나왔다. 새로이 얻은 정보들에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할 일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시종장은 내심 기쁨과 감동을 삼켰다.
몇 번을 보아도 황제가 이렇게 건강히, 괴로워하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궁중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경험은 어디로 갔는지 주책없이 목이 메고는 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모습을 뵙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는데.’
황제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고통에 신음하지 않았다.
그건 모두 그가 각성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각성자가 된 뒤로는 잠도 잘 잤으며 식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다. 시종장만큼이나 충성심이 깊은 황궁 요리사는 아직도 황제가 먹고 난 접시를 회수해 받아 들 때마다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물론 죽음의 문을 넘을 뻔했던 여파가 마법처럼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았기에 몸은 여전히 말랐고 체력도 아직 약했다. 그래도 시종장은 걱정하지 않았다.
“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집무실로 사용하는 방 한편에 놓인 괘종시계를 흘긋 본 황제가 가볍게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누르며 눈가의 피로를 풀었다.
“훈련 시간이니 옷을 갈아입으러 가야겠군.”
“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각성자가 된 뒤 이전과 가장 많이 달라진 게 바로 이 ‘훈련’이었다.
이전의 케일루사 황제는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1황자는 승마나 검술에 매진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책을 한 권 더 보고 학자들과 토론하는 걸 훨씬 좋아했었다.
황제가 된 뒤로도 그 경향은 달라지지 않아서, 체력 관리를 위해 하는 최소한의 운동과 황후와 함께 하는 산책 정도가 스스로 하는 운동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황제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무도 들어오지 않도록 사람을 물린 빈 공간에서 스스로 각성자식 훈련을 했다. 각성자의 힘을 다루는 훈련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시종장조차 가끔 놀랄 만큼 강도가 센 체력 운동이 그 훈련의 첫 번째 순서였다.
‘폐하를 가르치신 아일 남작께서 몸을 스스로 다루지 못한다면 힘도 다룰 수 없다고 말했었다지.’
황제는 유더 아일이 떠나기 전 주고 간 훈련 목록의 맨 위부터 아래까지 차례차례 인내심 있게 따랐다. 힘이 들다 못해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그저 부족한 체력 때문이란 걸 황제의 젊은 스승이 냉정하게 지적한 바 있었다.
‘힘을 더 잘 사용하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 같은 위험한 것은 잘도 바치려 굴면서, 이상하게도 그보다 훨씬 안전하고 언제든 쓸 수 있는 노력과 시간은 바치기 싫어하더군요. 하지만 장담하는데, 후자 쪽이 더 적은 대가로 훨씬 많은 걸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급해하지 말라고 유더 아일은 담담히 말했다.
마치 수십 년쯤 살아온 사람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반박할 수 없이 옳았다.
훈련을 하는 동안 황제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예전에는 이 느낌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땀의 대가로 사랑하는 이를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힘을 거머쥘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면 지금보다 열 배의 땀을 더 흘려야 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으니 가시지요.”
훈련이 끝난 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황제는 시종장의 말을 듣고 힘겹게 일어났다. 예전이라면 부축을 받아 일어났겠지만 각성자가 된 후로는 가능하면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려 노력했다.
“훈련을 하시는 동안 새벽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황후가? 저녁 식사 후 산책 때문인가?”
“그것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용무는 헤른과 관련된 듯했습니다.”
“헤른?”
“자세한 것은 이것을 보아 주십시오. 황후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황제는 욕조에 잠겨 있던 손을 닦고 황후가 보낸 짧은 서신을 읽었다. 내리깔았던 붉은 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끝까지 읽고 난 뒤 도로 시종장을 향했다.
“그렇군. 샬로인에서 일이 났으니 역시나 헤른 쪽에서 반응하는 모양이야. 남부의 별장에서 요양 중이라던 헤른 공작이 이번 일에 상당한 불쾌감을 토로했다는군.”
“마병단 측에 알려야겠군요.”
“황후의 말로는 이미 이 소식을 전해 준 헤른 1공녀가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아, 그분이라면…….”
“그래.”
고개를 작게 끄덕인 황제가 들고 있던 서신을 시종장에게 건네며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어쩌면 이번 일로 수년간 여우굴에 숨어 있던 여우 대장을 끌어낼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겠군. 뭐… 그쪽은 키시아르가 알아서 잘 맡아 주리라 믿고 짐은 아우가 걱정할 일이 없도록 이쪽 일에 집중하는 쪽이 맞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의 귀에는 그가 몰래 심어 두거나 보낸 물건들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비밀스러운 음모. 아무도 모르리라 여길 대화. 새어 나가는 줄도 모른 채 줄줄 흘러나오는 정보들.
황제는 그 모든 것을 잘 기억하여 머릿속에 갈무리해 두었다.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 그의 무기가 되어 줄 터였다.
그는 목욕을 끝내며 시종장에게 새로운 명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듣기로 황태자의 치료사들이 계속 바깥으로 나돈다고 하더군. 키시아르가 마병단의 협력자 명단을 발표한 뒤 그들 쪽에서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한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때가 지금일지도 모른다. 해당 사항은 마병단에서 담당 중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흐트러짐 없이 대비하라 이르도록.”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
“디에먼.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왠지 누가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황제가 명을 내리던 시각. 현자를 따르는 다섯 각성자는 아주 오랜만에 다 함께 밖으로 나와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순례자의 옷을 입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현자의 뒤를 따르며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보 같긴. 네조가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다는 걸 능력으로 모두 보고 나서 가고 있다는 걸 잊었어? 괜히 두리번거리면서 수상한 티 내지 마. 혹시라도 나한 쪽 녀석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랭바튼이 면박을 주자 능력 복사 능력을 지닌 디에먼도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네조라고 모든 걸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나한 쪽 형제들이 본다 해도……. 그게 뭐?”
“그게 뭐? 지금 네 그 행동이 잘했다는 거야?”
랭바튼이 기막혀하며 쏘아붙이자 현자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찔끔하여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랭바튼은 억눌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디에먼, 저 얼빠진 놈. 얼마 전 현자님을 혼자 모시고 다녀온 이후로 은근히 계속 기고만장하더라니, 오늘은 완전히 기가 살았군. 남의 능력을 잡스럽게 베끼기밖에 못 하는 주제에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시기인 줄도 모르고!’
그들이 오늘 위험을 무릅쓰고 한꺼번에 나온 건 얼마 전 공개된 마병단의 협력자 명단 때문이었다. 마병단의 협력자로 나그란의 별이 언급된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 현자는 대부분의 일을 제쳐 두고 수도 어딘가에 있을 나한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은 오직 나그란의 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처리해야 했기에 렌보우 자작 같은 이의 도움도 구하기 어려웠다.
수도의 지리에 익숙하지도 않고 딱히 도움을 받을 이도 없으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게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거기서는 현자가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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