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85화 (685/805)

685화

“…펠레타 공작이 지금 샬로인에 있다고? 게다가 불법 내기 격투장을 때려 부수고 상습적으로 도박을 한 귀족 자제 여럿을 체포해? 이게 무슨 소리냐.”

카치안 황태자의 물음에 시종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비밀리에 마병단원 지원 모집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 내려가셨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나는 마병단 본부 내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이가 거기까지 움직이는 동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너희의 아둔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비밀리에 움직인다고 아무것도 모를 거라면 내가 너를 무엇 하러 눈과 귀로 써야 하지?”

카치안 황태자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오르자 시종이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움직인 데다 변장을 했었다는 말도 있어 남부 현지의 사람들조차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분의 정체를 알았다고 합니다.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그곳에 가셨다는 건 디아카 공작 전하께서도 모르셨기에…….”

“디아카 공작이 모르면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결단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정도로 마병단에서 비밀스럽게 움직였다는 의미로…….”

“변명은 필요 없다. 결국 너에게도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 거겠지. 나가라!”

황태자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편지를 구겨 던졌다. 그가 더욱 화를 내기 전에 시종은 서둘러 사죄의 말을 중얼거리며 황태자가 던진 종이 뭉치를 주워 도망치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황태자의 방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깨지는 게 제 머리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시종이 몸서리를 치자 그의 곁에 있던 또 다른 시종이 은밀히 말을 걸어 속삭였다.

“그러게 펠레타 공작 전하나 마병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특별히 더 조심하라 하지 않았어. 얼마 전 디아카 경만 데리고서 황가의 식사 자리에 참석하셨던 일 이후로 얼마나 예민해지셨는데.”

“최대한 조심하여 말씀드린다고 한 게 이 꼴이네. 한동안 태양궁의 침입자를 조사하시는 일에 집중하시느라 디아카 공작 전하와도 사이가 회복되신 줄 알았는데 디아카 공작 전하 이야기에 오히려 더 화가 나신 것 같더군.”

“아마 그건 디아카 공작 전하 얘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자네는 오전에 다른 곳에 다녀오느라 못 봤겠지만 아까 황제 폐하께서 바로 그 태양궁 침입자 수사 건으로 독촉의 편지를 보내셨거든.”

“아……. 내가 맞은 이 종이 뭉치가 그건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려다본 시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전하께서도 참 우려가 크시겠어. 그분께선 황태자 전하를 위해 태양궁의 침입자를 잡아들이는 일에도 도움을 주고 계시지 않으시던가?”

“실질적인 일은 다 그분께서 마음을 써 주셨지. 치료사를 보내 준 것도 그분이 아니시던가.”

“세상에 이리 훌륭한 분이 또 계실까…….”

황태자의 시종임에도 디아카 공작 쪽에 더욱 무게를 둔 발언이란 점에서 사실 카치안 황태자의 분노도 그리 억측은 아니었다.

황태자의 방 안에서 들려오던 요란한 소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시종 한 사람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럴 때 그 치료사란 자들이 눈치 빠르게 빨리 와 주면 좋으련만! 꼭 이럴 때는 나가 있으니.”

“그러게나 말이야. 대체 그자들은 황태자 전하를 치료하러 왔다면서 무얼 그리 돌아다니는 거야? 요즘 들어 모습을 제대로 보이는 때가 없어.”

“새로 구한 숙소를 살피러 갔다고 들었네. 아무리 해도 황태자 전하의 심화를 완전히 낫게 하지 못하니 도망칠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있더군.”

“설마. 그런 짓을 저지르면 그자들을 관리하는 렌보우 자작님께서도 곤란해지실 텐데…….”

그 시각, 렌보우 자작은 시종들이 이야기하던 디아카 공작의 집에 있었다.

머리를 몽롱하게 만드는 연초를 입에 문 디아카 공작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스로를 현자라 칭하던 그 여우 같은 각성자들이 알아서 마병단 모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보겠다더니, 대체 무얼 한 건지 모르겠군. 펠레타 공작이 남부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다던가?”

“그것이…….”

렌보우 자작은 등 뒤로 진땀을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여기서 대체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와 현자는 마병단의 새로운 단원 모집을 틈타 그곳에 간자를 심어 넣고 결과를 보고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시작으로 사람을 보내 본 서부는 하필 유더 아일이 나타나 귀신처럼 간자를 모두 집어내어 불합격시키면서 망해 버렸고, 복수하려고 뒤쫓아 보낸 용병들은 돈만 받아 챙기고 모두 실종되어 버렸다. 어찌나 도망을 잘 쳤는지 꽁무니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진짜 계획은 남부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기에 괜찮다고 여겼다.

바로 그 남부에 홀연히 펠레타 공작이 나타나 각성자 불법 내기 격투장을 때려 부수면서 제국민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자는 왠지 정신이 어디론가 가 있는 듯 연락이 뜸했다. 남부에 침투시킬 각성자들의 정보도 제대로 주고받지 못해 계획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만 알았더라면 여기서 이 정도로 할 말이 없진 않았을 텐데…….’

지금만 해도 그렇다. 현자가 곁에 있었더라면 디아카 공작 앞에 혼자 서서 이 압박감을 견뎌 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갑자기 무언가 중요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비웠고, 렌보우는 혼자 이곳에 오게 되었다.

현자를 깊이 믿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만 남겨 두고 도망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듣지 않아도 답은 알겠군그래.”

디아카 공작이 깊이 연기를 내뿜었다. 렌보우 자작은 기침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크흠. 흠. 심려를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라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현자는 남부에 아는 이가 많다며, 그곳에서 확실하게 공작님의 사람이 될 이들을 넣어 두겠노라 장담했었습니다. 마병단 모집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부디 조금만 더 지켜보아 주십시오.”

“그래. 뭐, 자네들이 할 수 있다 했던 건 그쪽 일이었을 뿐, 펠레타 공작이 사고를 치는 걸 미리 알고 막는 게 아니기는 했지. 물론 일을 제대로 준비하고 있었다면야 그런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네…….”

하나를 맡았다고 하나밖에 안 하는 건 멍청한 놈이다. 펠레타 공작이 남부에 갔다는 정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는 비아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태도로 디아카 공작이 웃음을 흘렸다. 그의 차가운 웃음에 렌보우의 손이 수치심으로 조금씩 떨렸다.

“렌보우, 자네의 말대로 마병단 모집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 어디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한번 기대해 보겠네. 나야 자네들이 무얼 하는지 들은 바가 없어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니.”

그 말의 속뜻은 즉 렌보우와 현자가 꾸민 일이 실패하더라도 디아카 공작 측에서는 처음부터 일의 진행에 대해 들은 바가 없으니 철저하게 모른 척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떠한가. 치료는 잘되어 가시는가?”

“아… 예. 물론입니다. 요즘은 식사나 수면에도 아무 문제가 없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태양궁 침입자 조사 건도 디아카 공작 전하께서 도움을 주신 대로 잘 수행하고 계시며…….”

“아, 그거 말이지. 그거 아는가? 오늘 태양궁에서 이 디아카 저에 꽃을 하나 보내 주셨더군.”

갑작스러운 말에 렌보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셨습니까?”

“그래. 열심히 일한 이를 격려할 때 치하를 위해 내리는 마카레아 꽃다발이었지.”

렌보우는 그제야 디아카 공작의 시선이 닿은 곳에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꽃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급스러운 유리병에는 황제가 사용하는 태양궁의 문양이 희미하게 도드라져 있었고, 꽂혀 있던 건 몹시도 화사한 마카레아 꽃이었다. 그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디아카 공작이 중얼거렸다.

“이것을 황태자궁이 아니라 내게 보냈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확실하지. 실질적으로 일하는 게 나라는 걸 알고 있으니 얌전히 있으라는 거야.”

“…….”

대담하다 못해 내일을 생각지 않는 듯한, 그러면서도 예의와 우아함을 가장한 도발이었다. 황제가 내린 치하품은 그게 무엇이든 함부로 내버릴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렌보우는 얼마 전 마병단의 승리를 기념하는 파티에서 잠시 보았던 젊은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몸이 아파 칩거하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는 4대 공작가의 수장들과 이런 식의 도발을 주고받으며 황권을 올리고 귀족들을 억누르는 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쳐 댔었다. 마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 듯했다.

죽음을 앞둔 이는 겁이 없어진다는데,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아니면…….

“몸이 위독하시다는 소문이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참 의문스럽지 않나?”

렌보우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디아카 공작이 입에 담았다.

누구도 듣지 못할 비밀스러운 대화였다. 하지만 때로는 무생물에게도 귀가 있어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법이다.

시종들이 쥐고 있던 구겨진 편지에서, 그리고 디아카 공작의 앞에 꽂힌 마카레아 꽃에서 약속이나 한 듯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동시에 황태자가 머무는 광휘궁에서 멀리 떨어진 태양궁의 책상 앞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케일루사 황제가 스르르 눈을 떴다.

“후우.”

“입술이 마르셨습니다, 폐하. 차를 좀 더 채워 드리겠습니다.”

충성심 깊은 늙은 시종장이 황제의 찻잔에 정성스럽게 차를 따랐다. 그 차를 마시고 난 뒤 케일루사 황제는 비로소 확연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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