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화
잠시 멍하니 그 시선을 마주했던 큐레이지나가 뢰네브를 본 뒤, 이를 악물며 숨을 삼켰다.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큐레이지나보다 한발 먼저 나선 누키조의 부하 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소리를 쳤다. 누키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내 입을 다물고 눈만 굴리며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던 약삭빠른 자였다. 그는 귀빈들과 다른 동료들의 협박이 섞인 사나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키조의 귀빈이란 사실만 확인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냥 확인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키시아르가 요구한 건 귀빈들의 이름과 정보였다.
답을 들은 사내는 재빨리 몇 개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가문의 이름, 즉 성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말한 이름의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인지도 제대로 짚어 내지 못했다.
“저 하나 살고자 거짓말을 일삼는군! 그런 엉터리 이름을 지닌 자가 여기 어디에 있단 말이냐!”
“아, 뭐, 조금 틀릴 순 있겠지만 아무튼 아는 대로 모두 말했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 정도로는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증거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발언뿐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는 마병단원들에게 손짓을 하여 명을 내렸다.
“저자의 포박을 풀어 주게.”
“네? 아… 알겠습니다.”
단장의 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단원들은 일단 군말 없이 명에 따랐다.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국군 특수부대원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포박에서 풀려난 누키조의 부하는 얼얼했던 팔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벌써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만만한 눈빛이었다.
그러자 누키조의 다른 부하들도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로 치열하게 눈치를 보던 자들이 점차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도, 하나 정도는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저도…….”
“이 새끼들.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다른 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억하는 이름을 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일 먼저 말한 이와 다름없이 엉망진창이었다.
정보라고 보기조차 힘들 아우성들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모두 들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걸로 끝인가?”
“…….”
“제대로 가문과 이름을 배치해 낸 이는 한 사람도 없군. 참으로 아쉬워. 그럴 수 있는 이가 있었다면 상당한 감형을 약속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네.”
“…….”
“정말로 더는 없나?”
“…제가, 전부 압니다.”
희미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 말을 한 큐레이지나에게로 쏠렸다.
“흐음, 그래? 좋아. 한번 말해 보게.”
키시아르가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큐레이지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귀빈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가장 왼쪽 끝에 있는 이부터 한 사람씩 가리키며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저기 계신 초록 옷의 귀빈은 살마카 가문의 둘째이신 콜레스 님입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분은 아브카치아 가문의 다섯째이신 에네스카 님. 그 옆은…….”
여태까지 그저 기세등등하게 호통만 치던 귀빈들의 얼굴색이 일순 크게 변화했다. 차마 숨기지 못한 놀란 표정과 당혹감에서 큐레이지나가 ‘정답’을 말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다 거짓말이야!”
“네깟 것이 지금 감히 내 이름을……!”
누군가 외쳤으나 그 외침에는 힘이 없이 공허했다. 큐레이지나는 그들이 무어라 욕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한 사람의 이름까지 모두 읊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그녀가 말한 정보에는 이름과 가문 외에도 그들이 오늘 격투장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은 순서, 위치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입니다.”
그녀가 말을 끝내고 나자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이는 이전에 다른 이들이 엉망진창으로 아무 이름이나 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한 표정을 한 키시아르였다.
“정말 세세하고 정확한 정보들이군. 억지로 지어내어 말했다고는 느껴지지 않아. 이름까지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어찌 그리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나?”
“저는 이곳의 주인인 누키조 아래서 각성자 격투장이 처음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일했습니다. 누키조는 제게 항상 귀빈석의 경호와 접대를 맡겼고, 손님들 사이의 대화를 엿들어 쓸 만한 정보를 가져오도록 명했습니다. 귀가 있는 이상 자연히 외울 수밖에 없더군요.”
“뭐라고?”
“그놈이 감히!”
당혹에 사로잡힌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키조는 이미 죽었으니 그 욕을 먹을 이는 여기 없었다.
“누키조가 수집한 쓸 만한 정보라. 생각지 못한 수확이군. 그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궁금한데, 좀 더 알려 줄 생각이 있나? 물론 정보의 정확도와 도움이 되는 정도에 따라 마병단 또한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지.”
큐레이지나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을 한번 꽉 감았다 뜬 뒤 드러난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물론입니다. 고귀하신 분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아는 것을 모두 밝히겠습니다. 저만큼 그자의 치부와 숨기고자 했던 것들을 잘 아는 이는 없으리라 장담합니다.”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은 큐레이지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배신자!”
그녀의 등 뒤에서 저주 섞인 목소리들이 쇄도했으나 그것들은 그녀와 마병단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이것으로 감형은 확실히 약속되겠군.’
큐레이지나가 귀빈들에 대해 몹시 잘 알고 있었던 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은신할 수 있는 각성자를 부하로 둔 이상 누키조 같은 놈이 그걸 이리 써먹지 않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그걸 여기까지 극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뽑아내어 감형 거래를 당연하게 이끌어 낸 건 키시아르가 아니었다면 어려웠으리라.
‘어쩌면… 투명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귀빈들을 보호하는 일을 맡았다는 정보 하나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지금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유더는 비로소 조금 마음을 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뢰네브가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중이었다.
‘보통 죗값을 치른 이후에도 많은 놈들이 재범을 저지르지. 처벌만으로는 교화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 저들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군.’
키시아르는 미소를 지으며 이제 모든 이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갈 것을 명했다.
“나가자마자 모두 마병단 남부 지부로 이송하도록. 조사를 해야 하니 다들 피곤해지겠지만,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뭐? 마병단으로 끌려간다니요. 정보를 말했으니 풀어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까 포박에서 풀려났던 누키조의 부하가 크게 반발했다.
“글쎄. 포박을 풀라 했지, 조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았었지?”
“무…… 뭐……!”
기막힌 얼굴로 누키조의 부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욕설을 내뱉지 못했던 건 말장난을 친 키시아르의 바로 옆에서 유더가 싸늘한 눈을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빈들 또한 끌려가기 싫어 반발을 했으나, 유더와 시선이 마주친 후로는 몹시도 얌전해졌다.
마침내 그들이 무너진 구멍을 넘어 검은 범고래 술집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바깥을 지키던 소수의 단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곁에는 누키조의 부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다.
“단장님! 유더! 모두 무사하셨군요! 뭐,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에게 보호받으며 어깨에 모포를 두르고 있던 엘포킨스도 허둥지둥 뛰어왔다.
“정말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저, 마, 마병단에 들어가려고 지원서를 썼어요!”
“그래.”
감동으로 눈물을 흘린 티가 역력한 그의 얼굴이 다소 우스웠으나, 유더는 웃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 마병단에서 보게 되겠군.”
“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 사이로 포박된 이들이 줄줄이 끌려가거나 실려 갔다. 귀빈들이 아무리 화를 내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해도 마병단원들은 가차 없이 그들을 누키조의 부하들과 다를 바 없이 취급했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가운데, 큐레이지나만이 아무 말 없이 침착한 태도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마병단장과 그의 보좌가 남부 지부에 도착한 뒤의 긴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 소식은 당연히도 곧장 수도와 전국으로 퍼져 많은 이들을 충격받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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