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화
“…최대한 빨리 올라가 보아야겠군요.”
“그래. 그러는 쪽이 좋겠지.”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가 동의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찾던 이들이 그들의 앞에 알아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군.”
“설마…….”
유더의 표정을 본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의 뛰어난 지원군들이 비밀 통로를 먼저 발견한 듯해. 대치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어서 가야겠군. 그리고… 뢰네브?”
키시아르의 부름에 맨 뒤에서 따라오던 뢰네브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예?”
“우리가 어제 부탁했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나?”
“아…….”
뢰네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제 그녀에게 구출을 약속했을 때, 키시아르와 유더는 뢰네브가 해 주어야 할 일들을 몇 가지 부탁했었다.
첫째는 그들이 지하 3층에 갇힌 이들에게 상황을 모두 알리고 난 뒤 억제하던 힘을 거두어 줄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누키조의 각성자 부하라는 은신 능력자를 발견하는 즉시, 혹은 누키조 측에 더 있을지 모를 각성자 부하와 마주하는 상황이 오면 바로 힘을 발휘해 줄 것이었다.
첫 번째도 중요했지만 두 번째는 더 중요했다. 누키조에게 각성자 부하가 더 있을 경우 뢰네브만큼 확실하게 그걸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누키조의 각성자 부하는 다름 아닌 큐레이지나였다.
“기억……합니다.”
“그래. 곧 두 번째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때가 올 것 같군. 싸우는 이들을 발견하는 즉시 부탁하겠네.”
키시아르의 표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평온하고 느긋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늘 그렇듯, 그러한 행동의 내부에는 유더조차 다 짐작하기 어려운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터다.
‘뢰네브에게 큐레이지나에게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고 두 번째 부탁을 끌어 올리는 걸 보면 아마… 일종의 시험이기도 하겠지.’
뢰네브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더는 뢰네브가 혹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언제든 자신이 나설 수 있도록 검 손잡이에 손을 지그시 올렸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뢰네브는 보이지 않는 공격을 상대하고 있는 이들의 비명을 듣자마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는 지금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일단 막았군.’
큐레이지나. 큐릴이 제국군과 마병단 일부에게 상해를 입히긴 했지만 심각한 부상자는 없었다. 오히려 큐릴 쪽의 부상이 훨씬 심각했다.
‘처음 보는 능력자를 상대로도 당황하지 않고 상황 파악을 하여 움직인 건 장하지만, 그래도 거의 아마추어인 각성자를 상대로 부상까지 입다니.’
유더는 남부 지부 마병단원들에게 다른 지부에 준 것보다 훨씬 힘들고 강력한 훈련 메뉴를 새로이 짜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단원들이 내용을 보았다면 그 즉시 공포에 질려 나자빠졌을 법한 훈련 이름 몇 가지가 그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사이, 나단 주커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키시아르의 망토를 걸친 피투성이 유더와, 그 곁에서 당당하게 살결을 드러낸 차림새로 싱글거리는 주군을 한번 번갈아 바라본 뒤 아무 말 없이 등에 둘러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끌렀다. 거기에는 키시아르가 예상했던 대로 망토 하나가 더 들어 있었다.
“역시 네가 이런 걸 하나쯤 챙겨 오리라 생각했지. 고맙다, 나단.”
“아닙니다.”
황족 출신이자 공작으로서의 체면을 좀 더 생각하라는 충언을 할 법도 하련만, 나단 주커만은 제 주군 못지않게 침착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한 모습에서 장인과도 같은 노련함이 느껴졌다.
대체 그간 무슨 일들을 겪어 왔기에 나단 주커만이 이런 준비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걸까. 처음으로 조금 궁금해졌지만 상황이 상황이기에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볍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망토를 두른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하여 눈을 한번 찡긋한 다음, 반항하는 이들을 열심히 포박 중인 마병단원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포박하면서 저들의 이름과 정보 또한 될 수 있는 한 파악해 두게. 바깥에 나가면 주변 상황이 어지러운 틈을 타 도주를 시도하거나 바꿔치기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헛소리 마라! 이름이라니! 네놈들에겐 절대로 안 알려 줄 것이다!”
당연히도 귀빈들은 거세게 아우성치며 반발했다. 누키조의 부하들 또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병단원들이 골치 아픈 얼굴로 쑥덕거렸다.
“흠… 몇 대 쥐어패거나 거꾸로 매달아서 발바닥을 간지럽히면 불지 않는 놈이 없을 텐데. 그러면 안 되려나?”
그 말을 들은 귀빈들이 너무나 끔찍한 발언을 들었다는 듯 몸서리치며 욕을 해 댔다.
“이 천박한 놈들. 나는 그저 납치당했다고 하질 않았나! 무고한 이의 몸에 손을 대는 놈들은 내 가문의 이름으로 후환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발언, 책임질 수 있는 거겠지? 마병단은 제대로 된 확인조차 하지 않고서 죄 없는 이들을 잡아 묶는 곳이라고 만천하에 알려 주마!”
“나는 죄가 없다. 네놈들이 아무리 죄가 있다 한들 샬로인 사람들이 네놈들의 말 따윌 믿을 것 같으냐!”
누가 보아도 이들에겐 죄가 있다. 누키조의 귀빈씩이나 되는 놈들이 납치당한 무고한 자들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그들이 여기서 뭘 했는지 증언하는 자가 없다면 그런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사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데려온 누키조의 부하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계속해서 뻔뻔하게 무고를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는지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교묘한 주장들이 계속되자, 마병단원들은 짜증과 당혹을 느꼈다. 서부에서 불법 경매장에 참여한 귀족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이렇게까지 뻔뻔한 놈들은 없었는데, 이자들은 얼굴 피부가 철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자신에겐 죄가 없다고만 하는군. 정말로 다들 이곳에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도 못했다는 건가?”
“그렇다! ……악!”
아주 당당하게 하대 섞인 대답을 지껄인 귀빈 한 사람이 갑자기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머리를 휘청이며 비명을 질렀다. 범인은 당연히도 키시아르의 곁에 서 있던 유더 아일이었다.
“마병단을 이끄는 분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느리고 차가운 목소리.
단 한 마디뿐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고, 묶인 이들이 두려움을 확실히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단원들이 키시아르를 단장님이라 부르는 걸 보았을 텐데도 저따위 태도를 보인다는 건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를 우습게 보는 자들이 아직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그가 신검의 주인이 되었고, 마병단의 단장으로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일부러 못 들은 척, 모르는 척하는 야비한 놈들.
그런 놈들을 참아 줄 필요가 있을까?
‘아니. 없지.’
하지만 유더가 끌어 올린 힘 때문에 펼치고 있을 무력화 능력에 순간적으로 타격을 입었을 뢰네브에게는 사과를 해야 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
“괜찮, 아요. 갑자기 일부가 깨져서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유더가 끌어 올린 힘은 아주 작았기에 뢰네브는 놀라기만 했을 뿐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리라 생각하여 나름대로 조절을 하긴 했지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작은 힘이라고 맞은 놈의 받는 타격까지 작아지는 건 아니지.’
유더가 한 건 바람의 힘으로 바닥의 아주 작은 돌 부스러기 한 알을 쏘아 보낸 것이었다. 조그만 돌도 빠른 속도로 때리면 바위보다 아플 수 있다는 걸 저 귀빈 놈들은 이제 충분히 알게 될 터였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분위기 속에서 키시아르가 쑥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능력 있는 보좌 덕분에 애써 목소리를 키워 말할 필요가 없어졌군. 정말 고맙네.”
“…….”
“그래, 아무튼 주장은 자유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마련. 나는 기억이 안 난다는 이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가장 잘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이 여기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정말 아무도 없을까.”
“…….”
“무엇이 자신의 앞길에 도움이 될지 판단하는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잊지 않는 자들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지.”
누키조의 부하들이라고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것이 간접적인 회유임을 알아차린 자들이 어깨를 움찔거렸으나, 한 놈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입을 여는 놈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조용히 해!”
하지만 키시아르는 그들 너머, 큐레이지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멍하니 그 시선을 마주했던 큐레이지나가 뢰네브를 본 뒤, 이를 악물며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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